한국전쟁기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본 딸이 있었습니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받은 여성과 아버지를 잃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동생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경찰의 진압에 동료의 목숨을 잃은 한때의 여공도 만났습니다.
지난 한 달여 간 다섯 명의 국가폭력 여성 피해자‧유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그간 살아온 삶과 당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연을 직접 쓴 문서와 사건 관련 자료가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얼굴 드러내기를 꺼리면서도 어떤 사명감 혹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인터뷰에 나선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제 다 극복했다는 듯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다가도 막상 사건이 있던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는 인터뷰이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고 그 영향과 고통이 이토록 끈질긴데, '과거사'라는 말은 온당한가? 이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들이 겪은 일은 현재 진행형 아닌가.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피해자'라는 말 안에 가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가 겪은 일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또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에서 준비한 '국가폭력과 여성' 기획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세번째 주인공은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55) 씨입니다. 호정 씨의 아버지 김추백 씨는 1977년 간첩 누명을 쓰고 끌려가 옥살이를 하던 중 쓰러져 1979년 병원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호정 씨가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내고 대법원에서 아버지의 간첩혐의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39년이 걸렸습니다.
호정 씨와의 인터뷰는 지난해 11월 5일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진행됐습니다. 해당 인터뷰와 1기 진실화해위의 '김추백 등에 의한 간첩조작 의혹 사건' 조사 보고서,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11명과 가족들의 이야기와 진실 규명 과정을 기록한 <발부리 아래의 돌>(김호정 지음, 우리학교 펴냄)을 바탕으로 호정 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 희생자 김추백 씨의 딸 김호정(55) 씨는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쓰고 중앙정보부에 잡혀가기 전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의 가족이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 유족이 돼 수십 년간 고통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다정했던 아버지는 1977년 2월의 어느 날 낯선 사람들과 함께 차에 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 호정 씨의 나이는 9살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고 했다.
처음에는 어머니도 아버지가 곧 풀려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이라고 잡아갔으니 당연했다. 어머니는 이틀만 지나면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고 했다. 고혈압을 앓던 아버지의 혈압약도 이틀분만 챙겨줬다. 이틀이 아닌 두 달, 두 달이 아닌 2년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2년 여가 지난 1979년 5월 광주의 한 대학병원에서 호정 씨는 '이제 영영 아버지가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11살이었던 호정 씨는 그때도 아버지가 아파서 돌아가신 줄만 알고 길게 울었다.
간첩 누명을 뒤집어쓴 아버지가 죽기 열흘 전까지도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은 15년 뒤에야 알았다. 진실화해위가 추백 씨의 간첩 혐의는 조작됐다고 규명하기까지 다시 16년이 걸렸다. 대법원이 간접 조작을 인정하는 판결을 확정하는데 또 6년이 필요했다.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에게 남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
당시 중앙정보부는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호정 씨의 아버지를 포함한 11명을 잡아가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법원도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주동자로 지목된 강우규 씨는 사형을 선고 받은 뒤 1988년 서울올림픽 특사로 석방됐지만 고문후유증을 앓다 2007년 유명을 달리했다. 호정 씨의 아버지는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형을 살다 형기를 1년 3개월 남겨두고 감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뒤 생을 마감했다.
간첩 누명을 쓰기 전 호정 씨의 아버지가 특별히 눈에 띄는 사회 비판적 활동을 하기라도 했던 걸까. 마음 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호정 씨가 기억하기로는 그렇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1970년대의 평범한 시민 중 한 명이었다.
국가는 그런 아버지를 있지도 않은 간첩단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바빠졌다. 파출부로도 일하고 출판사 외판원으로도 일했다. 다니던 성당 주임신부의 허락을 받고 성당 앞에서 노점상을 열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다 클 때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결코 털어놓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라도 나쁜 영향을 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으로도 아버지의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막을 수도 없었다. 국가가 날벼락처럼 내리친 폭력은 평범하지만 단란했던 호정 씨네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상처는 이후로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15년 만에 알게 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이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호정 씨가 13살이던 해의 일이다. 언니와 놀다 장롱에서 아버지가 쓴 엽서를 한 무더기 발견했다. 발신지는 광주 북구 문흥동 어디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곳은 광주교도소였다.
호정 씨가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건 20대 후반이 된 1994년의 일이었다. 그해 '강경대의 친구들' 세대였던 동생이 술김에 운동권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훼손했다 경찰서에 구류됐다. 그곳에서 신원을 조회하던 경찰이 동생에게 너희 아버지가 억울한 일을 겪은 것 같다고 했다. 네가 사회에 나가면 명예회복을 시켜줘야 하지 않겠냐고도 했다.
집에 온 동생은 가족들에게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어머니는 그제야 가슴속에 15년간 묻어둔 비밀을 털어놨다. 차곡차곡 쌓아둔 탄원서와 판결문도 꺼냈다. 호정 씨는 그때 처음 아버지가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됐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호정 씨 동생이 어머니가 모아둔 자료를 들고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가를 만나고 온 일도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 인권위원회라고 별 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안타까웠지만 당장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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