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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석유 빼앗기"...미국은 새로운 전쟁,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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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석유 빼앗기"...미국은 새로운 전쟁,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전쟁국가 미국] 1차 이라크전쟁 (하) 석유를 위한 전쟁 : 미국의 대응

걸프지역 군사 점령이라는 '미국인의 꿈'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 이후 미국인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는 '군사력에 의한 걸프지역 유전 점령'이라는 꿈이 잠재해 있었다. 일례로 1975년 1월, 정치학자 로버트 터커(존스홉킨스대 교수)는 네오콘 잡지 <코멘타리>에 실린 글 "석유와 미국의 개입"을 통해 아랍세계에 대한 미국의 무력 개입을 촉구했다.

이어 명망 있는 잡지 <하퍼스> 3월호에는 "아랍 석유 빼앗기(Seizing Arab Oil)"라는 노골적 제목 아래 군사 점령의 구체적 계획이 실렸다. 미 육군 4개 사단과 공군력,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도움으로 사우디의 유전을 점령한 다음, 미국인 기술자들이 운영케 한다면 석유로 인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일스 이그노투스라는 가명을 쓴 이 필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유가를 결정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허망한 유화정책일 뿐이며 강력한 군사행동만이 깔끔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아랍인들이 만들어낸 것도, 발견한 것도 아니며" "어쩌다 그들의 영토 안에 있을 뿐인" 석유를 얻기 위해 아랍의 왕이나 독재자들의 정치적 협박에 굴복한다는 것은 수치이며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무려 8명의 논객이 비슷한 시기에 '사우디 군사 점령'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무언가 강력한 근거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사우디 주재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애킨스는 TV에 나와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범죄자, 아니면 소련의 첩자"라고 발언했다가 결국 해임됐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아이이어의 원천이 다름 아닌 백악관 안보보좌관 키신저였기 때문이다. 유가를 단숨에 4배 인상시킨 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에 분노한 키신저가 사우디 군사 점령에 관한 극비 계획을 일부 인사들에게 브리핑했던 것이다.

이러한 닉슨 행정부의 군사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미국의 군사행동이 소련의 반발을 불러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키신저 등 미국인들이 석유파동에 분노한 것은 유가 인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미국과 영국의 석유 카르텔이 갖고 있었던 석유 통제권(가격 및 생산량 결정권)이 산유국(OPEC)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키신저는 걸프 연안의 작은 산유국(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바레인 등) 중 한 정권을 전복시켜 "사우디에게 따끔한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중앙정보국(CIA)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라크 악마화'와 미군의 사우디 주둔

1차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성사된 미군의 사우디 주둔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미국인의 꿈이 실현됐음을 의미한다. '지켜준다'는 것은 사실상 '통제한다'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보호'이지만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우디 국민에게는 '점령'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의 다음 목표는 사우디'라는 점을 설득시켜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은 사우디를 침공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후세인의 군사적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즉 이라크를 악마화 시킴으로써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이라크 악마화' 작업은 이란·이라크전쟁에서 이라크가 승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스티븐 펠레티에에 따르면 미국은 이라크의 승리를 예상하지도 못했고, 이를 받아들일 의향도 없었다. 이는 곧 아랍지역에서 이라크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이라크가 독가스라는 사악한 수단을 동원해 전쟁에서 승리했고, 심지어 자기 나라 국민들까지 죽였다는 선전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1988년 9월 8일 이란과의 평화협상을 중재하겠다며 이라크 외무장관을 워싱턴에 불러들인 슐츠 국무장관은 그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느닷없이 이라크가 그해 3월 자국 내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바로 다음 날 미국 상원은 슐츠의 주장만을 근거로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를 결의했다. 또한 현장 조사를 위해 상원 보좌관 두 명을 이라크에 급파했고, 이들은 불과 1주일 만에 후세인의 독가스 공격으로 최대 10만 명의 이라크 국민이 사망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독한 중상모략이었다. 그 목적은 경제제재로 이라크의 전쟁 부채 상환을 가로막겠다는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반대로 미 의회의 경제 제재는 무산됐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모략은 지금까지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 국민들의 뇌리에 진실로 각인돼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펠레티에에 따르면 1988년 3월 쿠르드족의 경우, 당시 전투 중이던 이라크와 이란 모두가 독가스를 사용했으며 실제 시민들을 죽게 한 것은 이란 측이 살포한 시안계 독가스였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국방정보국(DIA)의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미 육군대학이 발행한 보고서(Lessons Learned : the Iran-Iraq War)에 실려 있다. 또한 CIA는 2003년 10월 발표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보고서에서 1988년 이란이라크전쟁의 마지막 총공세에서 이라크가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즉 후세인이 독가스로 전쟁에 승리했고, 독가스로 자국 국민을 대거 살해했다는 미 국무부와 의회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었던 셈이다. (스티븐 펠레티에 <America's Oil Wars> 176쪽)

하지만 미국과 영국 언론의 이라크 악마화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특히 1990년 봄에는 이라크가 핵무기 및 대형 방사포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보도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가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침공의 정당화는 이미 1차 이라크전쟁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라크 악마화의 절정, '베이비 킬러(Baby Killer)' 증언

이라크 악마화의 절정은 쿠웨이트 침공 두 달 여 후인 10월 10일, 미 의회에서 있었던 이른바 '베이비 킬러(Baby Killer)' 증언이었다. 나이라라는 이름의 15세 쿠웨이트 소녀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라며 이라크 군인들이 병원에 난입해 인큐베이터에 있던 미숙아 15명을 꺼내 차가운 마룻바닥에 방치함으로써 결국은 죽게 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영국의 권위 있는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사망한 미숙아가 3백 명이 넘는다고 발표했다. 불 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다.

나이라의 '베이비 킬러' 증언은 CNN, 뉴욕타임스 등을 통해 삽시간에, 그리고 전쟁 발발(91. 1. 17) 직전까지 석 달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이후 한 달간 다섯 번이나 이 증언을 언급하면서 사담 후세인은 히틀러보다 더 잔혹한 독재자라고 규탄했다. 후세인이 유태인 6백만 명을 몰살한 히틀러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1990년 10월 10일 미 의회에서 증언하고 있는 '쿠웨이트 소녀' 나이라. 그의 '베이비킬러' 증언은 거짓인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이 증언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전쟁 종료 보름 후인 1991년 3월 15일, ABC방송의 존 마틴 기자는 쿠웨이트 보건 담당 책임자로부터미숙아 사망의 원인은 단지 이들을 돌볼 간호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증언을 들었다. 이 책임자는 이라크 군인이 미숙아들을 인큐베이터에서 꺼냈다는 나이라의 '목격담'에 대해 "그건 순전히 선전 목적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답했다. 뒤이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도 '미숙아 3백 명 사망'이라는 자신들의 이전 발표를 철회했다. 이를 입증할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년 후 나이라의 정체가 밝혀졌다. 이 소녀는 미국 주재 쿠웨이트 대사이며 쿠웨이트 왕족인 사우드 나시르 알사바의 딸이었다. 쿠웨이트 왕실은 침공 직후 미국의 세계 최대 홍보회사이자 미국 정계와의 막강한 연줄을 자랑하는 '힐 앤 놀튼'과 계약을 맺고 수천만 달러를 들여 반(反)이라크 캠페인을 벌였다. 베이비 킬러 증언은 그 백미였다. 당시 쿠웨이트 측은 증언자 보호를 이유로 나이라의 성(姓)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언론의 검증을 피해 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라크 악마화가 미국을 1차 이라크전쟁으로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전쟁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군산복합체

중동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 쿠웨이트의 홍보전 외에 미국을 전쟁으로 이끌어간 또 하나의 주요한 요인이 있다. 바로 군산복합체의 생존 노력이다. 1990년 당시 군산복합체는 냉전 종식으로 군사 수요의 급격한 감소가 예상되면서 소멸의 위기에 처했다. 예컨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7년간 국방장관을 역임한 맥나마라는 1989년 12월 의회 청문회에 나와 연간 3천억 달러 규모의 국방예산이 2000년에는 절반으로 줄 것으로 예상했다. 줄어든 국방예산은 국민에게는 평화배당금이지만 방위산업체에게는 매출의 절대적 감소, 나아가 생존의 위기였다. 또한 대규모 군대의 유지도 필요 없어질 것이었다. 따라서 군산복합체에게는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미국의 방위산업체는 이미 1970년대 이러한 생존의 위기를 겪은 바 있다. 베트남전쟁 막바지인 1969년, 미국의 <포춘> 100대 기업 중 79개가 방위산업체일 정도로 군산복합체는 엄청난 호황을 누렸으나 이후 1975년에 국방비가 32%나 감소하면서 무기산업은 위기에 처한다. 국방예산 감소라는 위기의 타개책은 이란, 사우디 등 석유파동으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인 중동 산유국에게 미제 무기를 파는 것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1972년 이란을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대리인으로 지목하면서 첨단 무기를 팔기 시작했다. 1950-72년 15억 달러에 불과했던 이란의 미국 무기 구매는 1973년 한 해에만 20억 달러, 이후 6년간(1974-79년) 계약액은 자그마치 190억 달러로 급증했다.

한편 사우디와는 1974년 군사경제협조조약을 통해 향후 석유 판매는 미 달러화로만 결제하되 사우디는 미국 무기를 대량 구매하기로 했다. 그 액수는 1974년 26억 달러에서 1985년 230억 달러로 9배 늘어났다. 사우디는 1974년 석유 수출 수입의 7.5%만을 무기 구매에 썼으나 1985년에는 무려 88%를 투입했다. 석유 수입의 거의 전부를 무기 구입에 사용한 셈이다. 사우디는 1985년부터 약 10년간 재정적자를 겪었는데, 그 원인은 미국 무기 구입이었다. 1990-93년에는 중동 산유국들이 미 국방부보다 더 많은 미제 무기를 구매했다고 한다.

게다가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레이건 행정부 8년간(1981-89년) 2조 달러,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군비 증강으로 어마어마하게 비대해진 상태였다. 냉전 종식으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가 정착된다면 미국의 군대와 방위산업체는 엄청난 규모 축소에 직면할 터였다.

그리하여 소련의 뒤를 이은 미국의 새로운 적으로 이라크가 간택된 것이다. 그 작업을 주도한 세력이 바로 네오콘이다. 네오콘은 1960년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전향한 유대계 지식인들로 이들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안보를 중시했다. 이라크는 이란이라크전쟁 승리 이후 아랍지역의 패권 확보에 가장 근접한 국가였던 동시에 아랍 국가 중 가장 이스라엘에 적대적이었고,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라크는 반드시 제거돼야 했다. 2차 이라크전쟁이 필요했던 이유다.

1차 이라크전쟁 이후 클린턴 행정부는 친이스라엘 인사인 마틴 인둑(Martin Indyk)을 중동 담당 특사로 임명해 이른바 '이중봉쇄' 정책을 시행한다. 미국의 적대국인 이란과 이라크의 군사 위협을 이유로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지속하는 동시에 이란,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제한하고 사우디에게 그 몫을 할당하는 방법으로 국제석유체제를 통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사우디 주둔은 오사마 빈 라덴 등 아랍의 반발을 초래해 결국 9.11테러로 이어지는 빌미가 된다.

▲조지 H. W. 부시(왼쪽)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자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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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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