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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금' 위한 미국의 중동 전쟁,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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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금' 위한 미국의 중동 전쟁,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두 얼굴

[전쟁국가 미국] 1차 이라크전쟁(1990.8-1991.2) (중)

흔히 1차 이라크전쟁은 지역 평화를 위한 전쟁, 2차 이라크전쟁(2003년)은 석유 통제권을 둘러싼 전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차 이라크 전쟁부터가 석유전쟁이었다. 왜 그런가.

1979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했던 사담 후세인(1937-2006년)은 오늘날 이웃나라인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불법 점령한 침략자, 제 나라 국민을 독가스로 살해한 잔인한 독재자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미국 등 서방측에 의해 과장 유포된 것일 뿐, 그의 실제 행적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통치 방식이 강압적이긴 했으나, 그는 자국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해 이라크를 아랍 최초의 복지국가로 만들어낸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이란의 혁명 위협으로부터 아랍을 지켜낸 데 이어(이란이라크전쟁), 아랍 국가들의 경제.군사 협력을 통해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아랍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실현하려 했던 아랍주의자였다.

그러나 후세인의 이러한 시도는 미국의 중동 전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게도 중동의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은 핵심 국익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라크가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소련과 손을 잡은 것을 미국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미국의 숙적 소련의 영향력이 중동지역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란의 이슬람혁명이라는 돌발 사태에 대한 임시 대응으로 이란이라크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하기는 했으나, 전쟁에서 승리한 이라크의 지역 패권 장악만은 반드시 저지하려 했다. 이란이라크전쟁 승리 2년 만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사태 전개였다.

미국은 1차 이라크전쟁을 통해 국제 평화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확보한 것과 함께 이라크의 지역 패권 장악을 저지했고 중동지역에 군사적 교두보(미군의 사우디 주둔)를 마련하면서 중동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의 아랍 전문가인 스티븐 펠레티에의 2001년 저서 <이라크와 국제 석유 시스템 : 미국은 왜 걸프전쟁을 벌였나>를 중심으로 1차 이라크전쟁 당시 석유 통제권을 둘러싼 이라크의 시도와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알아본다. 펠레티에는 버클리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언론인 생활을 거쳐 1980-88년 중앙정보국(CIA) 선임 정치분석관으로 이란이라크전쟁을 관찰해 책을 냈으며, 이후 미 육군 국방대학(War College) 선임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2004년에는 <미국의 석유전쟁들>이란 책을 펴냈다.

석유산업 국유화, 모사데크의 실패와 후세인의 성공

펠레티에의 핵심 요지는 1928년 이후 미영 석유기업들의 국제카르텔이 장악했던 석유통제권이 1973년 1차 석유파동에 의해 사우디 등 산유국들에(OPEC) 일단 넘어갔고, 이후 통제권을 둘러싼 투쟁이 1차 이라크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중동의 주요 산유국은 사우디, 이란, 이라크 등 세 나라이다. 이중 사우디는 1945년 2월 루스벨트-사우드 국왕의 석유-안보 교환 협정 이래 줄곧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이란은 1951년 모사데크의 국유화 시도가 국제카르텔의 석유 판로 봉쇄와 미 CIA의 비밀공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반면 1961년 12월 시작된 이라크의 국유화는 10여년의 우여곡절 끝에 1972년 성공한다.

이라크의 석유산업 국유화를 성공시킨 인물이 당시 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이다. 그는 소련 및 동구권과의 바터무역을 통해 자국산 석유의 판로를 개척해냈다. 특히 1973년 10월 석유파동이 발생하면서 이라크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석유카르텔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국유화의 시점이 절묘했던 것이다. 국유화가 단행된 1972년 이라크의 석유 수출 수입이 574달러에 불과했다는 것은 서방측의 방해가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반증한다. 그러나 2년 뒤인 1974년 석유 수입은 57억 달러로 무려 1천만 배 증가한다.

아랍 최초의 복지국가

이라크는 자원 국유화로 얻은 국부를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투입했다. 1인당 식량 소비 액수가 1958년 47.64달러에서 1975년 159달러로 4배 가까이 증가했고, 1970년대 말에는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 이상으로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역 전체에서 최고의 소득수준을 달성한다(한국은 1977년 1천 달러 목표 달성). 특히 여성들도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과 공무원, 정계에도 진출하는 등 중동지역에서 여성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말하자면 이라크는 아랍 최초의 복지국가였던 셈이다.

다만 이라크는 강력한 통제국가였다. 무역 상대였던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로부터 사회통제 수법을 전수받은 것이다. 1978년 전체 공무원 66.2만 명 중 15.1만 명이 경찰, 공안 등 사회통제 담당이었다. 후세인은 이처럼 강력한 사회통제를 근대화 작업에 활용했다. 예컨대 '글자를 배우든가, 아니면 감옥에 가든가'를 강요해 문맹률을 급속하게 낮춘 것이다. 후세인의 강압적 문자교육은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유네스코가 현지 조사를 나올 정도였다.

반면 이란의 팔레비 국왕은 문맹률이 80%나 됨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군사동맹과 미제 첨단 무기의 대거 도입으로 군사강국이 되면 그것이 곧 근대화라고 믿었다가 결국 국민들의 저항으로 실각하고 말았다.

이라크 정부의 이러한 민중지향성은 1958년 군사혁명 이래의 전통이었다. 펠레티에에 따르면 1958년 이라크 혁명은 아랍 국가들 중 가장 근원적 혁명이었다. 즉 밑으로부터의 혁명이었다. 파이잘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한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은(1958. 7-1963. 2 집권) 광범위한 사회경제 개혁 조치를 시행했다. 주택과 상점 임대료를 10-20% 인하하고, 국민들의 주식인 빵에 대해 33%의 정부보조금을 지급하며, 8시간 노동제 및 노동조합 결성을 허용하고, 상병 및 실업보험을 시행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1960년 9월 바그다드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립총회를 주관하고 1961년 12월 이라크 석유산업 국유화를 시작한 것도 그였다.

카심 장군은 1963년 2월 바트당(아랍사회주의부활당)에 의해 실각, 살해됐으나 그의 개혁정책은 지속된다. 바트당은 10개월 뒤 군부 출신에 정권을 빼앗겼다가 1968년 7월 재집권에 성공했는데, 두 차례 정권 장악 과정에서 미국 CIA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한다. 이처럼 바트당정권은 공산주의와는 앙숙이었으나 집권 후 실제 정책은 사회주의 성향이었다. 이에 대해 펠레티에는 근본적 사회혁명에 대한 이라크 국민들의 기대로 인해 개혁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석유 국유화 등 자립경제에 대한 서방측의 적대적 태도 때문에 결국 바트당이 기댈 곳은 소련 등 동구권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아랍의 수호자를 자임한 후세인

이란 이슬람혁명이 진행 중인 1979년 7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세인은 1980년 9월 이란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다. 개전에 앞서 후세인은 아랍의 방위는 아랍인이 맡는다는 취지의 선언(일종의 '아랍헌장')을 했다. 당시는 1950년대 나세르 집권 이래 아랍의 맹주로 군림했던 이집트가 미국의 중재 아래 아랍의 숙적 이스라엘과 단독 강화를(1979년 3월 캠프데이비드 협정) 한 대가로 아랍연맹에서 축출된 상태였다. 말하자면 나세르의 이집트를 이어 후세인의 이라크가 아랍의 맹주로 떠오르는 참이었다.

후세인이 아랍의 수호자를 자임한 데는 미국에 대한 실망감도 작용했다. 이란 혁명의 여파로 사우디, 쿠웨이트, 바레인의 시아파 인구가 반정부 봉기를 일으키고, 호메이니는 이슬람혁명을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에까지 수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도 미국은 아무런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의 개입 위험성과 테헤란 대사관 인질들의 안위 때문에 군사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의 이란 공격은 아랍 입장에서는 일종의 방어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사우디와 쿠웨이트 등은 전쟁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라크를 지원했다.

▲2003년 4월 9일 사담 후세인 동상이 이라크 바그다드 알 피르다우스 광장에서 끌어내려지고 있다. ⓒAP연합뉴스
▲법정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담 후세인. 그는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확정돼 2006년 12월 30일 사형에 처해졌다. ⓒAP연합뉴스

이란·이라크전쟁 승리 이후 후세인의 구상

1988년 7월 이란의 패배 인정 후 후세인은 평화협상을 기다리면서 새로운 아랍의 질서를 모색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전, 미국 언론에 보도된 후세인의 구상은 다음과 같다.

우선 요르단, 이집트, 예멘 등과 함께 가칭 '아랍협력협의회(ACC)'를 구상했다. 역내 무역블록 형성과 관세 혜택 등을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 육성하기 위한 것이다.(1989년 2월 17일 <뉴욕타임스>)

두 번째는 사우디, 이집트 등과 함께 아랍의 독자적인 방위산업을 육성하려 했다. 자주 국방을 꾀한 것이다.(1989년 6월 <인터내셔널 디펜스 리뷰>의 이라크 장성과의 인터뷰)

세 번째는 사우디, 쿠웨이트, 아랍에미레이트(UAE) 등과 함께 세계 석유 공급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하겠다는 계획이다.(1989년 10월 23일 <워싱턴 포스트>)

이상은 당시 언론 보도일 뿐, 이제 와서 실제 실현 가능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아랍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지향하는 이러한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미국 등 서방측에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 경제의 혈액인 석유의 공급을 소련의 우방국 이라크 주도로 통제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1970년대 이후 미국산 무기의 절반 가까이를 사우디 등 아랍 산유국들이 구매하는 상황에서 아랍의 자체 무기 생산은 미국 군산복합체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서방은 아랍이 서방의 요구에 순종적인 석유 공급처로 남을 것을 원하지, 자체 산업 기반을 확보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전후 복구 및 전쟁부채 상환이라는 장애물

문제는 후세인의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려면 우선 8년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라크 경제의 복구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전쟁 부채를 갚아야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바로 뜻밖의 장애물이 등장한다. 쿠웨이트, 아랍에미레이트 등의 방해공작(?)이 그것이다.

이라크의 전쟁 부채는 800억 달러, 이중 370억 달러는 사우디, 쿠웨이트 등 아랍 산유국에 진 빚이었다. 전쟁 부채는 결국 석유 수출 수입으로 갚아야 하는데 당시 유가가 너무 낮았다. 이라크 입장에서는 배럴당 25달러는 돼야 했는데 당시 유가는 17달러였다. 당시 이라크는 유가가 1달러 떨어지면 석유 수입이 10억 달러 감소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쿠웨이트, 아랍에미레이트 등이 생산량까지 속여가면서 할당량 이상의 증산으로 유가를 더욱 끌어내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인구 소국인 이들 나라가 유가 인하를 감수하고 증산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는 군사강국인 이라크의 이익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행위였다.

특히 쿠웨이트는 이례적으로 전쟁 부채의 상환까지 요구했다. 이라크가 아랍을 대신해 전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사우디는 전쟁 부채를 공여로 처리하고 상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쿠웨이트가 전쟁 부채의 상환을 요구하자 유럽은행들도 줄줄이 상환 연기를 불허하면서 이라크의 재정 사정은 날로 어려워졌다. 쿠웨이트는 전통적인 영국의 피후견국으로 대처 총리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였다.

결국 후세인은 1990년 7월 25일 주이라크 미국 대사 에이프릴 글래스피를 불러 미국의 협조를 호소했다. 후세인은 '전쟁미망인의 연금도 주지 못할 정도로' 이라크 재정이 쪼들리고 있다면서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쿠웨이트, 아랍에미레이트의 석유 증산을 막고 쿠웨이트 전쟁 부채 문제 등이 해결되지 못할 경우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글래스피 대사로부터 희망적 답변을 듣지 못한 후세인은 1주일 후인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 48시간 만에 점령을 완료했다.

후세인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글래스피 면담 당시 미국과 쿠웨이트 등 왕정 산유국들이 이라크를 상대로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는데, 어쩌면 쿠웨이트를 볼모삼아 '부채의 덫'에서 탈출하기 위한 담판을 지으려 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후세인은 8월 12일부터 9월 30일까지 네 차례 발표한 성명에서 이러한 의향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후세인의 속셈은 결정적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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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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