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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당신들의 암살범에 돈을 대주고 있소"

[전쟁국가 미국] 1차 아프간전쟁(1979-89) (하) 이슬람 신정의 병기고...폭력의 세계화와 사유화

1982년 초, 레이건 대통령은 매년 3월 10일을 '아프간의 날'로 지정했다. "세계 안보와 안정의 기초로서 자신들의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려는 아프간 '자유의 전사'들을 지지"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 해 예정된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의 우주비행을 아프간 국민에게 헌정했다. 소련에 대한 아프간인들의 저항이 "자유에 대한 인류의 가장 고매한 이상"을 대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음 해에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무자헤딘(자유의 전사) 대표들을 직접 만나 연대와 지지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는 대국민 홍보 쇼에 불과했다. 아프간전쟁의 실상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대리전쟁이었고, 미국의 전쟁 목표는 아프간의 자주독립이 아니라 소련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아프간전쟁이 아프간 국민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독립투쟁이 아닌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거의 모든 반군이 보수를 받고 싸웠다. 돈을 받고 싸우는 자들은 용병이지, 독립군이라 할 수 없다. 둘째, 단일한 정치적 중심이 없이 무려 7개의 무장세력이 난립해 서로 다투고 경쟁했다. 셋째, 전쟁 말기 세속적인 온건파 정부 수립을 위해 정치 협상을 하자는 소련 측의 요청이나 미 국무부의 건의는 철저히 묵살됐다.

미국의 군사전문가 앤드류 바세비치는 아프간전쟁에 참여한 다양한 국가들의 공통점에 대해 첫째, 어떤 나라도 아프간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고 둘째, 오직 파키스탄만이 아프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했다고 지적했는데, 바로 이것이 아프간전쟁의 결과와 중동지역의 미래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끝없는 내전과 '폭력의 세계화', 그리고 '폭력의 사유화'가 그것이다.

파키스탄만이 아프간을 중시한 이유는 숙적 인도와의 대결 때문이다. 인도와의 세 차례 전쟁에서(1947, 65, 71년) 패배한 파키스탄으로서는 이웃 나라인 아프간에 우호적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절대적 과제였다. 아프간 반군에 대한 무기 및 자금 공급의 절대적 통제권을 갖고 있었던 파키스탄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을 집중 지원했다. 7개 무장세력 중 4개 이슬람주의 세력이 전체 지원의 3분의 2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아프간 반군 중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온건파, 좌파, 왕정파 세력들은 이슬람주의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일반 병사 월 1백-3백 달러, 지역사령관은 최대 10만 달러

1983년 여름, 당시 전쟁을 취재했던 한 언론인의 추산에 따르면 아프간 28개 주 전역의 3백여 지역에서 반군 활동이 펼쳐졌다. 상근 게릴라 전사는 8만-15만 명, 이밖에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반군에 가담하는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민간인 파트타임 게릴라는 수십만에 이르렀다. 상근 전사들은 월 1백-3백 달러의 보수를 받았다.

전쟁 초기인 1980년 아프간 공산정부를 방문한 이집트 언론인에 따르면 아프간 정부군 일반 병사의 월급은 162달러로 파키스탄 육군 대위의 월급과 맞먹었다. 병사들의 잦은 탈영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 때문에 1980년 한 해 동안 미국은 3천만-1억 달러를 쓴 반면 소련은 무려 10억 달러를 퍼부어야 했다.

한편 미국 언론인 스티브 콜이 쓴 <유령의 전쟁(Ghost Wars)>에 따르면 소규모 지역의 반군 사령관은 월 2만-2만 5천 달러, 한두 개 주 이상을 관장하는 대규모 지역사령관은 월 1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1984년 대소 항전 강화

1984년 초를 경계로 아프간전쟁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그저 소련을 괴롭히는 정도였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소련군 철수'가 확실한 전략 목표로 정해진다. 1984년 초의 전쟁 평가에서 그동안의 반군 활동이 매우 효과적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984년 1월, 윌리엄 케이시 중앙정보국장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지난 4년간의 전쟁 성과를 보고했다. CIA의 비밀 집계에 따르면 무자헤딘은 소련군 1만 7천명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고, 농촌지역의 62%를 지배했다. 소련군 항공기 350-400대, 탱크 및 장갑차 2750대, 트럭 등 차량 8천대가 파괴됐고 소련의 전쟁비용은 120억 달러에 이르렀다. 반면 미국의 전쟁 비용은 2억 달러, 사우디까지도 합쳐도 4억 달러에 불과했다.

당시는 미국이 소련에 대한 호전적 태도를 노골화하던 때였다. 1983년 3월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했고, '스타 워스'의 이름으로 미사일 방어망 계획을 천명했으며, 서유럽에는 소련을 겨냥한 퍼싱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추진했다. 아프간전쟁을 통해 그토록 적은 비용으로, 게다가 미국인의 희생은 전혀 없이 소련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중앙정보국장 케이시는 레이건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 행정부 내 실질적 2인자였고, 알렌 덜레스 이래 가장 강력한 중앙정보국장으로 군림했다. 매일 미사를 올릴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누구보다 공산주의를 증오했고, 이슬람주의를 강력한 우군으로 생각했다. 또한 CIA의 전신 전략첩보국(OSS) 출신답게 대담한 행동을 강조했다. '필요한 공작이라면 일단 저질러놓고(불법 여부는 고려하지 말고) 뒷감당은 나중에 생각하라'는 게 그의 신조였다.

1984년 7월 CIA는 아프간 공작을 전면 재평가했고 이에 따라 10월 시작되는 85회계연도의 아프간 관련 예산이 전년 대비 3배인 2.5억 달러로 급증했다. 이후 86회계연도 4.7억 달러, 87년 6.3억 달러로 계속 늘어났다. 1985년 3월 레이건 대통령은 '아프간 반군에 대한 미국 지원 증대'라는 제목의 NSDD 166(국가안보 결정 지침 166)을 통해 CIA의 확전 방침을 뒤늦게 공식 승인했다. 이제 전쟁 목표는 '소련 괴롭히기'에서 '소련군 철수'로 바뀌었다.

이러한 확전의 배경에는 미 의회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다. 당시 미 의회는 중미 니카라과 반군 등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는 강력한 견제구를 날린 반면 아프간 확전에는 전폭 찬성했다. 특히 민주당 출신의 텍사스주 하원의원 찰리 윌슨은 아프간 현지를 14번이나 방문한 열혈 지지자로 CIA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팅어 미사일 공급을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그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2004년 아프간 전쟁을 정리한 <찰리 윌슨의 전쟁>(조지 크릴 지음)이란 책에 이어 2007년에는 톰 행크스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난민수용소에서 만난 아프간 모녀. 오랜 전쟁에 지친 모습이 묻어난다 Ⓒ김재명

소련 국경 침범과 스팅어 미사일

1984년 후반부터 미국의 전쟁 수행은 더욱 대담해졌다. 우선 1984년 말부터 아프간 반군은 북쪽 국경을 넘어 소련 영내인 중앙아시아 지역에 침투했다. 처음에는 현지어로 번역된 코란을 배포하는 등 선전 목적이었지만, 1985년 봄부터 소련 영내 25킬로미터까지 침범해 로켓 공격을 하고 현지 반군세력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기도 했다. 영내 침입의 목적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주민의 반소 봉기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케이시 국장의 최고위 보좌관이었고 케이시 사후(1987년 4월) 국장 대행을 맡았던 로버트 게이츠에 따르면 이러한 국경 침범은 "케이시의 독려 하에" 이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명백한 범법 행위다. 외국과의 전쟁 행위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악의 경우 미소 간의 3차 대전, 또는 소련의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아프간 반군의 국경 침범에 대해 소련은 주변 아프간 지역에 대한 폭격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1987년 4월 소련은 아프간 반군의 국경 침범에 대해 미국과 파키스탄에 경고했다. 더 이상 "파키스탄의 안보와 통합"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파키스탄 공격에 대한 우회적 암시였다. 이를 계기로 국경 침범은 종료된다.

한편 CIA는 1986년 2월, 내부의 강력한 반대를 억누르고 대공 미사일 스팅어의 반군 공급을 결정했다. 소련의 제공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1986년 9월 26일 처음으로 반군의 스팅어 미사일이 소련의 공격용 헬리콥터 3대를 격추시켰다. 이후 소련 비행기는 미사일 공격을 피해 고도 3700미터 이상으로 날아야 했기 때문에 공군력을 통한 반군 제압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미국 측은 스팅어가 아프간 전황을 바꾼 게임 체인저였다고 자랑해 왔지만 이는 아전인수에 불과한 해석이다. 소련은 이미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취임한 1985년 3월부터 아프간 철수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레이건과의 첫 정상회담에서는 협상에 의한 아프간 문제 해결이 논의되기도 했다. 오히려 미국은 전쟁 이후 적국 이란으로까지 흘러들어간 스팅어 미사일을 회수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소련의 철군 결정과 미국의 (무)대응

소련은 1986년 11월 13일 정치국 비밀회의에서 아프간 철군 방침을 결정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1,2년 내 전쟁을 끝내고 철군하는 것이 전략적 목표"라고 선언했다. 또 철군의 선결 조건으로 "아프간에 소련에 우호적인 중립적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정치협상을 미국과 추진하려 했다. 12월에는 아프간의 나지불라 대통령을 모스크바로 불러 '2년 내 소련군의 전면 철수에 대비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2년 뒤에는 소련의 군사적 보호가 끝날 테니 최대한 많은 정파를 포용해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미국의 반응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철군 결정 이후 1년이 다 되도록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오히려 CIA는 '아프간전쟁이 소련경제에 전혀 부담이 되지 않고 있고, 전쟁은 무기한 계속될 것 같으며, 아마도 소련이 이기고 있는 것 같다'는 황당한 내용의 정보 보고를 올렸다. 미국이 아프간과 중앙아시아의 미래와 관련한 정치적 협상에 응할 용의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고르바초프는 "미국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프간문제의 해결을 방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작정"한 것 같다고 개탄했다.

결국 1987년 9월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뉴욕에서 슐츠 국무장관을 직접 만나 철수 방침을 통보했다. 그는 "우리는 아프간에서 철수합니다" "5개월 내지 1년 정도 걸릴 겁니다. 분명한 것은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나의 직을 걸고 아프간 철수라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셰바르드나제의 통보에 충격을 받은 슐츠는 이후 수주일간 침묵을 지켰다. 소련이 철군을 결정했고 이 결정이 진짜인 것 같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순간, 케이시를 비롯한 레이건 행정부 내 강경파들에게 소련에 대해 무르다는 비판을 받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실 셰바르드나제가 기대했던 것은 이슬람근본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협조였다. 이란에 이어 아프간에도 이슬람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선다면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동 전체의 안정이 무너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의 고위 관리 대부분은 소련의 요청에 관심이 없었고 이를 무시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은 미국의 적이지만 사우디, 파키스탄, 아프간 등의 수니파 이슬람은 미국의 맹방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있었다. 또한 아프간 독립이나 안정은 전혀 관심 밖이었고 오로지 소련군 철수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1987년 12월 4일, 워싱턴 미소 정상회담을 앞두고 로버트 게이츠 CIA 국장 대행과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KGB 국장이 워싱턴 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나 미소관계 전반에 대해 논의했다. 양국의 정보기관 수장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크류츠코프는 소련군의 아프간 철수에 대한 미국의 협조를 요청했으나 허사였다. 게이츠는 소련의 철수 자체를 믿지 않으려 했다. 크류츠코프는 "당신네들은 단지 한 종류의 이슬람근본주의 정권(이란)에 대해서만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 같구려"라고 비아냥댔다.

12월 8일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에게 소련의 아프간 철군 대신 미국의 아프간반군 지원 중단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다음날 부시 부통령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만일 우리가 아프간 철수를 시작했는데 미국의 반군 지원이 계속된다면, 아프간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시작될 겁니다"라고 지적했다. 미래를 정확히 내다본 것이었다.

당시 부시 부통령은 "우리는 아프간에 일방적으로 친미 정권을 세우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미국의 정책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유령의 전쟁>의 저자 스티브 콜은 "당시 미국은 아프간 국내 정치에 대한 정책이 없었다. 파키스탄의 국익 증진을 위한 파키스탄 정보기관(ISI)의 아프간정책만이 있을 뿐이었다"고 지적했다.

1988년 4월 1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소련군의 아프간 철수에 관한 4자협정이 체결됐다. 미국, 소련, 파키스탄과 아프간 정부가 협정 당사자였고 아프간 반군은 배제됐다. 당시 미 국무부는 협정 이후 아프간 반군 지원을 중단하려 했으나 레이건 대통령의 지시로 무산됐다. 소련이 아프간 정부를 지원하는 한 미국의 반군 지원도 계속돼야 한다는 게 레이건의 입장이었다. 1988년 5월 소련군의 철수가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의 반군 지원이 계속되면서 내전의 발발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무부의 이견과 CIA의 묵살

1988년 늦은 봄, 미 국무부는 주아프간 대사관의 2인자 에드먼드 맥윌리엄스를 아프간 특사에 임명해 아프간의 정치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보수 성향의 외교관인 그는 이후 두 달간 파키스탄의 아프간 부족 지역을 방문해 광범위하게 민심을 청취했다.

결론은 파키스탄과 사우디 정보기관을 앞세운 미국의 아프간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었다. 특히 소련이 철군하는 동안, 아프간 반군 중 가장 광신적인 이슬람주의자이자 반미주의자이며 파키스탄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는 굴부딘 헤크마티야르와 파키스탄 정보국(ISI)이 온건파, 좌파, 왕정파 등 아프간 내 반대파를 조직적으로 척결하고 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한 아프간 망명객은 "신에게 맹세컨대 당신들은 당신들의 암살범에 돈을 대주고 있소"라고 말했다.

1988년 10월 맥윌리엄스는 국무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는데, 이는 미국의 아프간정책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내부 이견이었다.

"이념과 정파를 떠나 거의 모든 아프간인들이 파키스탄과 미국에 대해 점증하는, 거의 적대감에 가까운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중략) 대부분의 관측통들은 헤크마티야르와 ISI가 파키스탄의 급진 이슬람정당인 자마트이슬라미(이슬람협회)와 아랍 과격분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프간의 온건파 정치단체들을 박멸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무부 중간관리에 불과한 그의 이견이 레이건 행정부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아프간전쟁을 주관해온 CIA는 그를 '미친 놈' 취급을 했고, 국무부는 그의 충성도를 의심해 그가 동성애자나 알콜중독자가 아닌지 뒷조사를 했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프간인의 70%가 국왕이 군림하고 '로야 지르가'라는 부족협의체에 의해 통치되는 1973년 이전 왕정으로의 복귀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1989년 2월 15일 소련의 아프간 철군이 완료됐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은 이란이 아니다.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는 이 나라에 미국의 돈을 써가며 국가 재건을 도모할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이 다시 아프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년 가까이 지난 1998년, 미국 석유기업 유노칼이 카스피해산 석유 수송을 위해 아프간을 지나는 송유관 건설을 추진할 때였다.

아프간이 이슬람근본주의의 근거지가 된 이유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오늘날까지도 어째서 아프간에는 세속적 온건파 정권이 들어서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로버트 드레퓌스의 <악마의 게임>에 나오는 한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다. 랜드연구소의 이슬람주의 전문가이며 9.11 이후 첫 아프간 대사를 역임한 잘마이 칼릴자드의 부인이기도 한 체릴 베나드는 2004년 7월 드레퓌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프간에서 의도적 선택을 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맨 처음 우리들 모두는 소련을 물리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했던 것은 최악의 미치광이들을 찾아내 이들을 소련에 대항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부수적 피해도 상당했다. 우리는 이들이, 이들 조직의 성향이 어떤지를 정확히 알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이 온건파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죽이는 것을 승인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프간에서 온건파 지도자를 갖지 못한 것은 미치광이들로 하여금 이들 모두를 죽이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좌파, 온건파, 중도파들을 모두 죽였다. 간단히 말해 1980년대 이후 세속파들은 모두 제거된 것이다."

폭력의 세계화, 폭력의 사유화

아프간전쟁(1979-89년) 10년간 아프간의 1천 5백만 인구 중 100-150만 명이 사망하고, 같은 숫자가 부상했으며 6백만 명이 파키스탄이나 이란등으로 국외 망명했다. 농업 생산은 50%가 감소했다. 자주독립은커녕 이후에도 최근까지 전쟁의 참화에 시달려야 했다.

2차 대전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을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라고 자임했다. 여기에 빗대 미국의 군사전문가 앤드류 바세비치는 아프간을 '이슬람 신정(神政)의 병기고(Arsenal of Theocracy)'라고 명명했다. 아프간전쟁을 통해 미국의 무기와 첨단 군사 기술을 전수받은 10만 이상의 이슬람 무장세력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미국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소련과 군사적으로 대치했으나 유럽에서는 총 한 번 쏘지 않고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는 비기고(한국전쟁) 베트남에서는 패배했지만, 이들 국가들을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시킴으로써 더 이상의 군사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반면 중동지역에서는 1980년대 이후 폭력을 크게 확산시켰다. 그 발단은 1972년 닉슨독트린에 따라 이란을 중동의 군사적 대리인으로 위촉하고 첨단무기를 판매한 것, 1973년 석유파동 이후 달러화 방위를 위해 사우디 등에 대한 대대적 무기 판매 등이었다. 그러나 역시 결정적 계기는 아프간전쟁이었다. 아프간전쟁을 통해 미국발 '폭력의 세계화'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프간전쟁을 비밀대리전쟁으로 수행함으로써 특정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비국가 세력의 폭력 행사, 즉 오사마 빈 라덴 등에 의한 '폭력의 사유화'도 본격화됐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의 세계화'와 '폭력의 사유화'에 의한 세계적 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혼돈의 제국(Empire of Chaos)'으로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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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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