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연재 초반에 <인사이드 경제>는 플랫폼 자본이 멀쩡한 노동자를 프리랜서나 자영업자처럼 둔갑시키는 마술은 노동시간 '녹이기'에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자본의 오랜 꿈 '플랫폼' … 노동시간 살살 '녹이기')
배달 라이더의 노동시간은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 우버나 대리운전 기사들의 노동시간은? 가사 플랫폼에 묶여서 일하는 가사노동자 노동시간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용자 지휘·감독 아래 대기시간은 노동시간
지난번에 소개한 것처럼 영국 대법원은 우버 기사의 경우 앱에 로그인(Log-in)한 시간부터 로그아웃(Log-out)한 시간까지를 노동시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승객을 태우고 움직인 시간만이 아니라 다음 승객의 호출이 오기까지 대기하는 시간도 노동시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판결은 우리의 근로기준법 제50조 제3항에 명시된 것과 같은 취지이다.
우버 기사가 앱에 로그인 되어 있는 시간 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호출이 오면 튀어가야 하고, 이 호출을 자주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는다. 결국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에 있는 대기시간이라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의 이 법리만 적극적으로 적용해도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시간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노동시간을 제대로 계산할 수만 있다면 근로기준법의 다른 조항들을 적용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노동시간 계산의 특례
하지만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점점 더 노동시간을 확정하기 어려운 업종이 생기고 있다는 점도 사실 아닌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니, 심지어 더 늘어날 거다. 특히 노동시간을 녹여서 측정 불가능하도록 만들면 근로기준법 적용을 피할 수 있지 않은가. 자본가들은 '피 맛을 본 상어'처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노동시간 녹이기에 나설 것이다.
법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할 수도 없다. 법 규정 하나 바뀌면 그거 피하려고 자본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단을 동원한다. 그래서 우리 근로기준법이 이런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조항이 하나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노동시간 계산이 어려울 경우 근로기준법 58조를 활용할 수 있다.
노동시간 계산이 어렵다고 해서 근로기준법 적용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해법과 풀이가 있다는 얘기다. 계산이 어려우면 소정근로시간, 그러니까 현행 근로기준법상 1일 8시간, 주 40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본다는 것이다. 만일 업무수행에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경우 실제 소요시간을 노동시간으로 계산해주면 된다는 것.
택시 노동자에게 악용되는 근로기준법 58조
그런데 자본가들이 또 어떤 놈들인가. 이런 조항이 있으면 이걸 피해가던지 악용하던지 어떻게든 무력화시키려 한다. 58조 1항의 취지는 1일 8시간,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하라는 것인데 절대로 그렇게 해주기 싫은 거다. 그러니 58조 2항의 '근로자대표와 서면 합의를 한 경우'라는 조항을 악용하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택시 업종이다. 놀랍지 않은가? 우버를 비롯해 모빌리티라고 쓰고 유사 택시라 읽는 분야에서 노동시간을 녹일 수 있었던 것도, 택시 분야에서 노동시간과 관련한 분쟁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승객을 태운 시간만 노동시간으로 보는 게 맞지 않냐?", "아니다. 대기시간도 노동시간에 포함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 근로기준법 58조 2항이 악용된다. 사용자들은 기존 노동조합을 겁박하거나 사용자 주도 어용노조를 활용해 소정근로시간을 하루 5~6시간, 심지어 3시간으로 합의를 해버리는 거다. 그렇게 되면 노동시간에 따라 산정된 임금액이 턱없이 낮아지게 되니까 말이다.
어용노조를 활용하는 건 그나마 양반이다. 두 해 전에 탄력근로제 논란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우리 근로기준법에서 가장 모호한 개념이 '근로자대표' 아니던가.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는 사용자가 말 잘 듣는 충성파 한명에게 "네가 근로자대표 해라"고 임명한 뒤 서면합의서 한 장 쓰면 끝이다.
완전월급제 시행 무력화에 맞서
이렇게 되니 민주노조운동이 앞장서 기나긴 투쟁 끝에 쟁취한 완전월급제가 무력화될 위기에 처해 버렸다. 완전월급제를 시행하면 뭐하나. 친 사용자노조나 '듣보잡' 근로자대표를 동원해 노동시간을 확 줄여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니 말이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과 택시 노동자들은 다시 머리띠를 동여매고 투쟁에 돌입했다. 소정근로시간을 노사 대표가 자율적으로 합의할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은 동의할 수 있지만, 악용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합의할 수 있는 소정근로시간의 최저한도를 정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법률에 주 40시간 이상으로 명시하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택시 노동자들은 전국적 총파업은 물론이고 세계 최장시간 고공농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2019년에 마침내 '택시운송사업 발전에 관한 법률(택시발전법)'을 개정하는데 성공했다. 아래 개정법률 공포 내용처럼 법 제11조의2 조항을 신설해 근로자대표와 합의하더라도 소정근로시간을 1주 40시간 이상이 되도록 정해야 한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부칙으로 반칙한 문재인 정부
처절한 저항 끝에 완전월급제를 시행하게 되자 자본가들은 그것을 무력화하려고 근로기준법 58조 2항을 악용하고 나섰다. 다시 끈질긴 저항을 통해 택시발전법 개정을 통해 자본가들의 제도 악용 소지를 없애긴 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개정법률 시행 시점을 꼬아버린 탓이다.
서울시의 경우 올해 1월부터 개정 법률이 시행되었지만 서울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언제 시행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부칙에 분명히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날"이라 되어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시행령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가 안을 만들어 국무회의에 올리고 망치 세 번만 두드리면 되는 일을 2년 넘도록 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 되려고 국회의원직도 던지는 이들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법에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데 그걸 안하고 있는 거다. 2019년 개정 법률은 문재인 대통령,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현미 국토부장관이 서명·공포한 것이다. 그 사이 김현미 장관은 부동산 투기 관련 사안으로 바뀌었고, 이낙연 총리는 집권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로 최근 국회의원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지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의원직쯤 간단히 던질 수도 있는 양반들이 자기들이 만들어 통과시킨 법률의 뒤처리 하나를 2년 넘게 방치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기에 시행령 만드는 일이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 일을 방치하는 동안 지방의 택시업주들은 여전히 근로기준법 58조를 악용해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삭감하고 있다.
결국 6월 6일 현충일 사이렌이 울리던 오전 10시, 명재형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동원택시분회장이 세종시 국토교통부 앞에 망루를 세우고 '국토교통부와 대통령은 즉각 택시발전법 제11-2조 시행하라!'며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택시를 타고 도로 위를 달려야 할 노동자들이 하늘로 올라가 농성을 벌이는 일이 도대체 몇 번째인가.
택시 노동자 어깨에 실린 무거운 짐
사실 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만의 요구가 아니다. 완전월급제를 향한 그들의 투쟁은, 노동시간을 녹이고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서 노동법 적용을 회피하거나 악용하려 했던 자본가들의 시도에 맞서 노동시간을 정상화하고 노동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한 역사였다.
택시 노동자들의 오늘은 플랫폼 노동자의 내일이다. 택시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되어야 프리랜서처럼 둔갑된 플랫폼 종사자의 노동자성도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노동시간을 녹이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 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플랫폼 노동의 갈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9월 14일이면 명재형 분회장이 하늘로 올라간 지 100일이 된다. "약속을 지켜라", "법을 지켜라" 사실 이런 게 투쟁의 요구가 되면 안 된다고 들었던 촛불 아닌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지긋지긋했던 그 경험을 다시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정부 아닌가 말이다. 정말 징글징글하다. 제발 약속 좀 지켜라. 하늘에 있는 노동자가 다시 땅을 밟도록.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