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가 기후위기 경고음에 늦게나마 반응을 보이기 시작해 다행이다 싶지만, 배신감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로 기후위기라는 이슈를 활용한다고 느낄 때다. 근래 들어 핵산업계는 다시 분주해졌다. 오래된 실패작에 '혁신형'이란 이름을 붙여서 소형모듈원자로(SMR)라는, 크기만 작아진 핵발전소 개발을 다시 꺼내들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전 지구적 과제를 수행한다는 미션을 들이대며 말이다.
화석연료 대신 탄소배출 없는 핵발전으로 기후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명분이 그럴싸하게 들린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온실가스 뿐일까? 죽음의 방사성물질 누출사고가 내재 된 핵발전은? 핵산업계는 세상의 악은 탄소배출 하나뿐이라는 듯 화석연료 대 핵발전의 구도를 만들고, 인류의 미래와 안전을 위해 우리는 석탄발전이 아닌 핵발전을 택해야 하는 듯이 말한다. 기후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방사능의 위험을 선택하자는 말로 들린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핵사고는 하루속히 잊혀져야 할 과거일 뿐, 여전히 그들에게 핵발전은 안전한 것이다.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를 일본 정부가 제멋대로 바다에 버리겠다고 나서고 전 국민이 이에 분노하며 반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미 기후위기로 인해 핵발전 또한 무사하지 않다는 사실도 그들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록적인 폭염, 빈번하고 위력적인 태풍과 폭우를 동반한 기후위기의 이상기후들은 핵발전을 중단시키고 있다. 작년 태풍으로 인해 부산과 경주에서 핵발전소 8기가 정지되었다. 미국 플로리다주와 아이오와주의 핵발전소들도 호우와 폭풍으로 불시 정지되었다. 폭염으로 프랑스의 핵발전소가 중단되는 일은 다반사이다. 핵발전은 기후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발전이 아니다. 후쿠시마 핵사고는 지진과 해일로 발전소가 침수되면서 외부 전원이 끊겨 핵연료가 녹아내리고 수소폭발로 이어진 사고라는 점을 상기하는 순간들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파국을 막기 위해 세계는 재생에너지로 전환 중이다. 태양광과 풍력과 같은 재생에너지는 햇빛과 바람이라는 자연조건에 따른 변동이 크다. 그래서 실시간 출력 조절이 가능한 발전원과 조합을 이루어야 한다. 핵발전은 빠르게 가동하고 중단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경직성 전원이라서 재생에너지와 함께 갈 수 있는 전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핵발전을 가동하기 위해 온실가스는 물론 대기오염물질과 방사성물질을 배출하지 않은 깨끗하고 안전한 재생에너지를 버려야 할까? 포기되어야 하는 것은 핵발전이지 재생에너지가 아니다.
지난 4월 '혁신형 SMR 국회포럼'이 발족한데 이어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청와대와의 회동에서 소형모듈원자로 분야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조했다. 곧이어 한미정상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은 해외 원전시장 내 협력을 약속했다. 그러나 소형모듈원자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웨스팅하우스를 비롯한 여러 기업이 막대한 투자비를 투입해 연구 개발했으나,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타당성 입증에 실패를 거듭해 온 프로젝트이다. 핵산업계는 소형모듈원자로(SMR)는 외부 전원이 끊겨도 핵연료가 녹아내리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검증되지 않는 주장을 한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소형모듈원자로 또한 핵발전과 동일한 경직성 전원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소형원자로 사업으로 스마트원전을 위해 수천억 원을 투자했던 전례가 있다. 국내 해수담수화용 원전으로 추진되었으나 예비타당성조사 부적합으로 공식 폐기 바 있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당시 수출용 원전으로 재추진되었던 사업을 이번에 또 다시 설계를 변경해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소형이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소형이기 때문에 여러 기로 분산되고, 분산된 수만큼 위험의 경우 수가 증가하는 원자로이다. 핵발전과 동일한 위험을 가진 작은 핵발전소 여러 기를 수출하겠다는 것은 위험을 수출하는 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비윤리적 구상이다. 후쿠시마 핵사고와 경주 지진 이후 안전문제로 핵발전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기로 결정한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와 다름없는 위험기술, 위험 원자로를 수출하겠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 가능한가. 현재 우리에게는 위험을 전가할 권리도 없고 기후위기나 방사능 위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안전이다. 전 세계는 기후와 핵의 위기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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