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한 해를 보낸 2020년이 끝나고 21년 신축년의 새날이 밝았다. 여전히 기세가 가실 줄 모르는 코로나19는 인류사회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그래서 중세의 흑사병, 20세기 초반의 스페인 독감에 이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대 전염병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 유럽을 중세에서 근세로 이끈 것처럼, 코로나19 또한 새로운 문명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인가? 지난해 지식사회에는 코로나19가 가져올 인류사회의 미래 모습을 두고 다양한 담론이 오고 갔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에서 '날이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松柏)의 푸름을 안다'고 적은 것처럼, 코로나19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지구촌 국가들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포장과 분칠 속에 그간 감춰져 있던 모순들이 코로나19를 통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것은 인류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닥친 코로나19는 개발된 백신을 통해 치료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류는 기후변화와 이로 인해 발생할 예측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인류는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지난해 지구촌의 가장 큰 화두는 코로나19와 기후변화였다. 코로나19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문제였다면, 기후변화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복잡성과 심각성을 경고받아 왔다. 코로나19 또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순환과 공생을 고려하지 않는 근대문명으로 인해 지구촌과 인류의 위기는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다. 금세기 안에 획기적인 생태적 전환을 이뤄내야 하지만, 인류의 지성과 지혜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문제 해결 여부는 지구촌 시민의 생태적 각성과 이를 실천해나갈 수 있는 민주주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봐야 한다. 당장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자,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실태가 그대로 드러났다. 중국은 전체주의 사회답게 강력한 국가의 통제로 인구 1천만 명의 우한시를 전면 폐쇄하고, 다른 도시들과 연결을 차단했다. 소수의 시민이 저항의 목소리를 냈지만,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 압도당했다. 반면에 자유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 국가는 기본권 통제에 대한 시민의 반발로 전염병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로 유럽에서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했고, 공동체를 고려하지 않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허술한 부분을 확인했다. 유럽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미국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2천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35만 명의 사망자를 낸 미국을 두고, 초강대국의 퇴락을 말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반면에 홍콩, 싱가포르, 대만, 한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질서 있는 대응과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한국과 대만의 전염병 대응은 세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중국식의 전체주의 통제와 미국·유럽식의 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무질서를 피하면서 비교적 질서 있는 능동적인 대처를 보였다. 한국 사회는 투명하고 공개적인 정부의 대응과 시민의 협력적 참여, 의료진의 헌신적 방역 활동 아래 개인과 공동체가 상생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코로나19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명암
하지만 한편으로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의 불평등·양극화와 부실한 사회안전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한 유럽 복지국가는 기존의 보편적 복지 시스템으로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응해 나갔지만, 우리 사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으로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재난지원금에 대한 명칭부터 시작해 대상자, 지급방식, 지원금액 등 어느 것 하나 정해진 것 없이 우왕좌왕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1차부터 3차까지 재난지원금이 지급되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취약한지 우리는 새삼 확인했다.
코로나19 경제위기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혹독하고, 강자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재난 자본주의'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경제활동인구 4명 중의 1명은 영세한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코로나19 불황에 속수무책이다. 시민의 위기의식과 정부의 제한조치로 자영업자들은 영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높은 임대료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고, 그들 중의 99%는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비정규직과 영세한 사업자가 가장 먼저, 가장 혹독하게 맞고 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우리 사회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부동산 문제다. 주택이나 상가 할 것 없이, 부동산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가혹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폭등하는 부동산에 시민은 박탈감을 맛봐야 했고, 자영업자들은 영업할 수 없어도 임대료는 꼬박꼬박 내야 하는 부동산 공화국의 비극을 경험하고 있다. 이미 심각한 양극화를 부동산은 더욱 심하게 벌려 놓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3년 반 동안 많은 부동산 정책을 쏟아냈지만, 시장을 통제하지 못하고 휘둘렸다. 정권 초기부터 부동산 불로소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하고 일관된 정책을 마련하지 못한 탓이 컸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전 국민 고용보험
코로나19 위기에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며, 그것의 원인을 분석하고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하고 급한 것이 바로 '전 국민 고용안전망'이다. 각종 산업재해로 사회적 타살을 당하고, 사회안전망 부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동자가 많다. 한국은 산업재해로 인한 사상자와 자살자 수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지난 20여 년간 부동의 1위를 기록해왔다. 각종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이의 숫자는 연간 2천 명이고, 부상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며, 실업과 폐업을 당했을 때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는 2명 중 1명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로 인한 우리나라의 사망자는 917명이었다. 코로나19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우리 국민은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감내해 왔지만, 다른 한편의 구조적 비극에는 수십 년간 무시와 방치로 일관해왔다. 야누스와 같은 국가의 모습이다. 한 해 동안 죽고 다치는 숫자로 따지자면 비교할 수도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는 2020명, 상해를 입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10만9242명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상해자는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그동안 재해로 사망한 이를 합산하면 한국전쟁에서 죽은 이들과 비슷할 것이라는 통계도 나온다. 국가는 왜 이렇게 야누스적인가? 코로나19에는 단호하면서 기업에서 일어나는 재해에는 왜 그렇게 관대한가? 50년 전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묻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해 온 질문에 이제는 답해야 할 때가 됐다.
실업과 폐업 문제도 마찬가지다. 시장자유주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가난은 나랏님도 구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그간 우리 사회는 먹고사는 문제를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 넘겨왔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달랐다. 가난은 구조적 문제로 인한 결과였고, 지금은 더 구조화되었다. 급속한 과학발달로 미래는 예측하기 더욱 힘들어졌고, 변화에 민첩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시민은 구조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세계는 점점 더 예측하기 힘들어지며, 실패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사회문제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생태계의 변화다. 기존의 고용보험은 전통적 자본-노동관계를 전제로 출발했지만, 사회의 패러다임이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 만큼 사회보험에도 새로운 시선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지난 성장 시대에는 낮은 임금이 문제였지, 실업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저성장 시대로 진입했고, 플랫폼 경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전통적인 자본-노동관계를 벗어난 다양한 고용과 노동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정부는 빠른 사회변화에 시민이 적응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경제활동을 하는 국민 모두 고용보험의 대상자가 되도록 전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또한 개개인 역량 강화에 지원해 이들이 변화된 시장과 사회에 재진입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 개인의 잠재된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 그게 바로 보편적 복지국가다. 코로나 위기를 통해 복지국가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는 신축년은 우리의 보편주의 역동적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네 잎 클로버의 '행운론'과 세 잎 클로버의 '행복론'
급속하게 진행된 지난 300년의 자본주의 발달은 인류의 생존조차 의심스럽게 만드는 위기를 만들어냈다. 이익은 철저히 사유화·개인화하고, 손해는 사회화하는 시장 만능주의 경제의 병폐가 이 모든 위기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기후 위기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전 지구적 재난은 다양한 방식으로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다. 당장 지금의 코로나19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갈등과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지난 300년간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담론이 되면서 사람들의 내면도 시장화되어 갔다. 대표적으로 '행운'을 뜻하는 찾기 힘든 네 잎 클로버와 '행복'을 뜻하는 무수히 널린 세 잎 클로버의 상징이 그렇다. 사람들 대부분은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일상의 행복을 뜻하는 세 잎 클로버를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된 자본주의 역사도 행운을 잡고자 하는 투기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복지국가는 적어도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삶은 국가나 사회가 보장하고자 하는 무수히 널린 세 잎 클로버의 행복 철학에 가깝다. '왜 북유럽만이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었을까'를 탐구하다 보면, '얀테의 법칙'이라는 평범한 다수의 생각을 강조하는 북유럽 특유의 정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가 코로나19의 답답함을 호소하며 일상의 회복을 간절히 소원한다. 지난 300년의 시장 만능주의 경제가 만든 문제와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깊이 성찰하고 기존의 행동을 돌이키지 않으면 구조화된 불행으로부터 탈출하기 어렵다. 그 탈출 행동의 첫째는 '나의 행운'을 잡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행복'을 만들겠다는 사유로의 근본적인 대전환이다. 얀테의 법칙에서 보는 것처럼, 나 혼자만 네 잎 클로버를 얻겠다는 우리 내면의 헛똑똑이를 걷어내고 무수히 널린 세 잎 클로버를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도 새해를 맞이해 우리의 삶이 실질적으로 전개되는 풀뿌리 지역 단위부터 행운이 아닌 행복을 만들기 위해 소박한 '행복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뜻있는 시민이 누리집을 둘러보고(www.welfarestate21.net) 함께 행복을 만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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