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중이던 지난 4일, 원로 사회학자 이이효재 선생이 돌아가셨다. 이이효재 선생은 대한민국의 1세대 사회학자일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의 거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1924년생이라 향년 96세다. 삶의 행적만 찬란하고 풍성한 게 아니라 한 세기를 거의 채운 그 시간의 무게 역시 압도적이다. 그래서 누구든 선생의 부고 앞에서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역사라는 차원을 실감하며 새삼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20여 일 전에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밝기로 우리를 비추던 별 하나가 떨어졌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이효재 선생과 동갑이다. 20세기 이탈리아 좌파정치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오늘날은 무엇보다 위대한 언론인으로 기억되는 로사나 로산다(Rossana Rossanda)가 그 사람이다.
9월 25일에 로마에서 거행된 로산다의 추도식에는 이탈리아에 유독 큰 상처를 입힌 코로나19 탓에 많은 이들이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7만 명 넘는 이들이 온라인 중계 사이트에 접속해 추모의 마음을 나누었다. 백 년도 훨씬 넘게 좌파의 아성이던 토스카나에서 극우파가 주지사 선거에 거의 승리할 뻔할 정도로(로산다가 사망한 다음날, 결선투표에서 중도좌파 민주당 후보가 승리했다) 이념 지형이 오른쪽으로 잔뜩 기운 요즘 이탈리아에서 이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 숫자다.
그만큼 현대 이탈리아 사회에서 로사나 로산다라는 이름은 한 개인을 넘어 역사를 상징한다. 영광의 순간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상처를 남긴 역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 잃은 남은 자들이 손에 쥔 유일한 지도인 역사. 그리고 이 역사는 이탈리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얼마간 빛을 던져주는 이야기보따리이기도 하다.
10대 소녀 빨치산에서 68세대의 믿음직한 선배로
한반도의 비슷한 세대와 마찬가지로 로산다 세대는 세계사의 가장 거대한 혼란 속에서 성년을 맞이했다. 이탈리아는 본래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지만, 1943년 연합군이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내전에 휩싸였다. 겁먹은 파시스트 고위층이 무솔리니를 축출하고 항복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독일군이 개입해 무솔리니를 구출하고는 북부 이탈리아에 그를 수반으로 한 괴뢰정부를 세웠다. 졸지에 사실상 독일군 점령지가 된 북부 각지에서는 민중의 무장 항쟁이 시작됐다. 공산당, 사회당, 행동당 같은 좌파뿐만 아니라 기독교민주당, 자유당까지 투쟁에 함께 했다.
슬픈 역사와 함께 한국어에 편입된 단어 '빨치산'이 이때 북부 이탈리아 젊은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험 같은 것이 되었다. 이 세대에 속한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초기작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이현경 옮김, 민음사, 2014)에서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바로 이런 젊은이들 가운데에 막 대학에 입학한 19세의 로사나 로산다도 있었다. 로산다는 '미란다'라는 조직명으로 밀라노 시내에서 지하 저항 세력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정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10대 소녀 빨치산 '미란다'가 택한 정치조직은 공산당이었다. 그 또래의 다른 많은 이들도 비슷했다. 반파시즘 투쟁을 가장 치열하게 펼친 조직은 공산당과 행동당이었고, 그 중에서도 공산당에게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후광이 따랐다. 빨치산에 가담했다가 해방 이후 쭉 좌파 정당들 편에 선 이 세대 덕분에 이탈리아는 이후 반백년 동안 자본주의 세계에서 급진좌파 세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됐다. 로산다 역시 공산당 밀라노 지부에서 상근자로 일하며 이런 시대 분위기를 이끌었다.
당 활동 초기부터 로산다는 잡지 지면을 통한 문필 활동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50년대에 한때 200만 당원을 보유하며 곳곳에 민중의 집을 건설하고 당원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발행 부수로 일간 <루니타>('단결')를 내던 공산당은 이탈리아 문화계에서는 여당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문화 투쟁의 중요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주간지 <리나쉬타>('재생')였는데, 로산다는 이 잡지의 편집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명성으로 당의 문화 담당 책임자가 됐다가 1963년에는 하원의원에까지 당선된다.
로산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이 시절을 보노라면, 참으로 서글픈 감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에서 로산다가 속했던 세대의 동년배들이 한반도에서는 어떤 삶을 살았던가? 이탈리아에서는 반파시스트 내전이 좌우 내전으로 이어지지 않게 어쨌든 막았고, 이후 반세기 가량 이어진 제1공화국에서는 “이탈리아는 노동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1항처럼 좌파가 적어도 제1야당으로서 민주공화국의 한 축이 됐다. 그러나 우리는 내전을 피하지 못했고, 냉전의 양 진영이 이 땅에서 맞붙었으며, '미란다'처럼 이상과 그 실천에 투신했던 한 세대가 파괴되고 말았다. 회한과 우울 없이는 마주할 수 없는 역사의 갈림길이다.
이렇듯 냉전 시기에 두 반도의 운명은 극명히 대비됐다. 하지만 영광의 시절이 마냥 지속될 수만은 없었다. 좌파의 양적 성장이 내부 모순에 대한 영구 처방이 될 수도 없었다. 1960년대에 학생운동이 폭발하고 노동운동이 급진화하자 이탈리아 공산당 안에는 조르조 아멘돌라를 중심으로 한 우파와 피에트로 잉그라오를 중심으로 한 좌파가 등장해 격렬히 논쟁했다. 로산다는 잉그라오 좌파의 이론가였고, 학생운동에 연대를 표한 몇 안 되는 공산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급진적 사회운동들보다도 공산당에 더 심각한 충격을 준 것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었다. 이때 이탈리아 공산당 안에서 소련의 행태를 준열히 비판하고 나선 이들은 잉그라오 좌파의 차세대 지도자들인 루치오 마그리와 루치아나 카스텔리나 그리고 로사나 로산다 같은 이들이었다. 당 집행부는 처음에 이들의 비판을 묵인하는 듯 보였지만, 로산다 등이 <일 마니페스토>('선언')라는 독자 저널을 발행하고 나서자 더는 가만있지 않았다. <일 마니페스토> 그룹은 출당 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한 시기의 종말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뜻밖에도, 새로운 시기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1971년 <일 마니페스토>는 일간지로 변신해 60년대에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경험한 수많은 이들, 즉 이탈리아의 68세대와 만났다. 로사나 로산다는 이 신문의 편집을 맡아 68세대가 가장 신임하는 언론인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평생의 동지인 마그리나 카스텔리나가 좌파 정당 활동에 계속 개입하는 와중에도 로산다만은 <일 마니페스토>를 무대로 좌파 문화 전반의 방향을 모색하고 개척하는 데 집중했다.
이 시기에 <일 마니페스토>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는 중국 사회주의 체제와 제3세계 해방운동이었다. 이 무렵 한국 사회에서도 리영희, 박현채 등을 통해 비슷한 관심이 젊은 세대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또한 <일 마니페스토> 지면은 신좌파 여성 활동가들이 새로운 페미니즘 사상과 운동을 태동시키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역시 같은 시기에 한국 사회에서는 이이효재와 그 제자들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중적인 여성운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로산다가 후반생을 바친 신문 <일 마니페스토>는 좌파의 다음 세대를 위한 자기 혁신 운동의 핵심 기관이었고, 20세기 말의 이 혁신 시도는 1980년대부터 남한에서 부활한 좌파 문화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공산당 신문 <루니타>가 폐간된 지금도 일간 <일 마니페스토>는 계속 발간 중이다.
로산다가 남긴 물음 –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시대에 변화의 주체는?
안타깝게도 로산다는 행복하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강성했던 이탈리아의 급진좌파는, 아니 좌파 전체는 1990년대 이후 계속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었다.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거듭나겠다며 좌파민주당으로 변신했다. 로산다와 동지들은 한사코 반대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문제는 이탈리아판 '민주대연합' 노선의 대두였다.
부패한 기독교민주당이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라 불리는 대대적인 정치 비리 수사 이후에 와해되자 이탈리아에서는 우파가 정치 지도에서 거의 사라질 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 결과가 나타났다.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선배인 영국의 마거릿 대처처럼 우파 포퓰리즘과 신자유주의를 기묘하게 뒤섞은 신약을 선보이며 우파를 기적적으로 되살렸다. 아니, 단지 되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선거에서 거듭 승리하며 장기 집권했다.
좌파민주당을 비롯한 나머지 모든 정치 세력은 “베를루스코니만 아니면 된다”는 깃발 아래 총결집했다. 이탈리아판 '반이명박-반박근혜 민주대연합'이다. 이런 대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좌파민주당은 당명에 붙어 있던 '좌파'마저 떼어 버렸다. 단지 당명만 짧아진 게 아니라, 당의 이념까지 창당 당시에 선언한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서 미국식 자유주의로 바꿨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는 급진좌파가 기세를 부리는 나라에서 졸지에 제도 정치 안에 좌파 전체가 사라진 나라로 돌변했다. 한국 진보 세력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 밟은 퇴행 과정을 이탈리아인들은 30여 년으로 늘여 경험한 셈이다.
로산다는 만년을 이런 못 볼 꼴을 보며 보내야 했다. 그러나 짜증나고 탄식이 절로 나오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씩씩했다. 한동안 기피하던 정당 정치에도 다시 개입했다. 지금 이탈리아 정계에서 좌파의 전통을 제대로 이었다고 할 수 있는 조직은 '이탈리아 좌파'(이하 좌파당) 정도인데, 이 당의 지지율(2-3% 대)은 정의당만도 못하다. 하지만 로산다는 이 당을 반격의 최후 보루라 여기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증손주뻘 당원들에게 자극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로산다가 2017년 좌파당 당대회에 보낸 서한이다. 이 서한을 낭독하는 순간, 장내 분위기는 사뭇 숙연했고, 어쩌면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90세 노인이 무슨 선동문을 전달한 것은 아니었다. 서한의 내용 전체는 하나의 커다란 물음이었다. 화두였다.
지구 자본주의는 지금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 로산다의 90 평생에도 이런 일은 처음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겨운 예언이 아니다. 내로라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런 진단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역시 90 평생 처음으로 변화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좌파는 오랫동안 노동계급이 그런 주체라 했지만, 이제는 변화의 주체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의 주체가 불분명하다면, 자본주의가 벽에 부딪히더라도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커다란 위기의 시대에 변화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3년 전 서한 내용을 압축한 것이지만, 이를 로사나 로산다가 우리에게 남긴 유언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엄중한 물음이다. 극우파의 부상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는 이탈리아 좌파처럼 나 역시 지금 당장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못하겠다. 노동계급에 여전히 주목하되, 기후 재앙이라는 초유의 전면적 위기에 걸맞게 노동하는 시민 전체로 시야를 확대해야 한다는 정도만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답해야 할 절실한 물음을 지닌 삶은 어쨌든 살아볼만하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다음 세대는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답은, 역시 늘 그랬듯이, 백지 위에 쓰이지는 않을 것이다. 성취뿐만 아니라 오류와 비극까지 아우르는 인류의 모든 자취들 위에서, 오직 그 위에서 다음 번 한 발자국은 내디뎌질 것이다. 과감하고, 단단하게.
끝까지 꿋꿋했던 이의 모습에서 다른 어떤 메시지를 읽기란 불가능하다. 그녀가 살아냈던 것처럼 우리도 살아나갈 것이다. 뒤늦게나마 동지 로사나 로산다에게 진심을 담아 작별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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