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정부가 '한국판 뉴딜'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국민보고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사뭇 결의에 찬 어조로 5년에 걸쳐 160조 원을 투입해 19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계획의 세 기둥은 안정망 강화와 디지털 뉴딜 그리고 그린 뉴딜이다.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과 녹색당이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그린 뉴딜이 포함된 것이다.
얼핏 보면, 그간 기후 위기 대응 운동에서 녹색 뉴딜의 주요 내용으로 이야기된 것들이 망라된 듯하다. 공공 건물을 친환경-에너지 효율 건물로 리모델링하겠다고 하며, 도심 녹지를 조성해 숲을 늘리겠다고 한다. 신재생에너지 산업 지원 계획도 담고 있고, 전기차-수소차 보급 확대 사업도 있다. 이런 그린 뉴딜 사업에 2025년까지 42조 7천억 원을 투자해 일자리 66만여 개를 창출하겠다고 한다.
많은 주요 국가들에서 아직도 논의만 되는 녹색 뉴딜이 대한민국에서는 벌써 날개를 단 것인가? 코로나19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려는 '촛불 정부'의 결단에 박수를 쳐야 할 때인가?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린 뉴딜'이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계획은 '그린'도 아니고 '뉴딜'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보기에 이 계획은 재벌에게 '그린 라이트'를 켜주었다는 의미에서만 '그린' 뉴딜이라 할만하다.
과한 평가인가? 아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린'도 아니고 '뉴딜'도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은 정부의 그린 뉴딜 방안이 녹색 뉴딜의 내용들을 망라한 듯 보이면서도 정작 이 모두를 뒷받침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빼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효적이고 구체적인 탄소 배출 감축 계획이다. 정부안은 연도별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저탄소, 친환경'이라는 말이 반복되며, '탄소 중립'을 지향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달성한다는 국제 사회의 합의에 맞춰 2025년까지 대한민국의 탄소 배출량을 어느 정도까지 감축하겠다는 목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달성해야 할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가 없는 계획은 늘 그렇듯 관료의 책상 위에서 쉽게 사장되거나 축소, 왜곡될 수 있다. 탄소 배출 감축 의지가 없는 '그린 뉴딜', 이것을 과연 '그린' 뉴딜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그린 '뉴딜'이란 포장에 어울리지 않는 예산 규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50조 원에 육박하는 국비를 투자하겠다니까 엄청난 규모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5년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연간 예산으로는 10조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작 이 정도 예산으로 과연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한 사회의 골간을 새로 놓는다는 엄청난 과업을 제대로 시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기후 급변은 인류가 맞이한 초유의 위기이며, 각국은 이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시 상태에 준하는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 재정 규모가 450조 원이 넘는 나라에서 10조 원은 '전시'가 아니라 '일상'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결코 많은 액수라 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정부 계획이 연도별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제시하지 않은 이유가 더욱 뚜렷해진다. 현 정부는 탄소 배출 감축이 '급박한' 과제라 여기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한국 정부도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고 보여주는 게 중요할 따름이며, 따라서 예산도 딱 그만큼만 책정되면 된다.
이것이 '한국판' 그린 뉴딜이다. <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책세상, 2019)을 나와 공저하고 최근 <숲의 즐거움>(에이도스, 2020)을 낸 환경철학 연구자 우석영은 이를 '추격형' 그린 뉴딜이라 이름 붙였다. 이보다 더 정확한 규정도 없을 것이다. 현 정부는 인류 문명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대응의 국제적 양상에 근접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 뉴딜'을 발표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추격형' 그린 뉴딜이기에, 과거 '추격형' 발전 과정에서 키웠던 그 주체들에게 다시 한 번 모든 기회와 자원을 몰아주겠다고 천명한다. 이번에도 국민의 모든 역량을 아낌없이 이들에게 쏟아 부어 사회 전체의 미래를 이들의 축적 전망에 예속시키겠다고 한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재벌 대기업들이다.
새 경제 주체 육성 없이는 새 경제 없다
녹색 뉴딜이란 본래 생태적 전환을 하겠다는 것이다. 공공의 역할을 강조하며 일자리 창출 효과를 부각하는 프로그램으로 생태 전환을 구체화한 것이 녹색 뉴딜이다. 그렇다. 여기에서 핵심은 '전환'이다. 단지 기존 경제의 붕괴를 막겠다거나 성장률을 제고하겠다는 게 아니다. 지구 생태계 위기를 낳은 현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 새 경제 체제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새 경제 체제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당연히 화폐를 비롯한 자원 전체의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 또한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제도들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기존 사회과학이 흔히 간과하는 또 다른 요소도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경제 주체들의 등장과 성숙이다. 이미 존재하거나 성장해 있는 경제 주체들은 기존 관성대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경제 체제가 전과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려면, 새로운 경제 주체들이 있어야만 한다. 이들이 일정한 정도로 성장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어떤 경제 계획이든 기존 체제의 전환을 목표로 삼는다면, 반드시 새로운 경제 주체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며 세력화하는 내용을 포함해야만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도 이런 실천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시장 규모를 늘리고 활성화한다는 목표에 맞게 이 과업을 담당할 주체들을 키워냈다. 관치 실행에서 유례없는 능력을 발휘한 경제적 국가기구를 발전시켰고, 재벌 대기업들을 육성했으며, 저축과 부동산 자산 형성에 일로매진하는 중산층 가정을 탄생시켰다.
생태 전환이란 이런 방식으로 구축된 한국 경제를 다시 한 번 철저히 재편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그렇다면 녹색 뉴딜 같은 생태 전환 프로그램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수준을 뛰어넘는 강력한 목적의식에 따라, 이 계획을 통해 등장하고 두 세대 넘게 한국 경제를 지배해온 경제 주체들과는 다른 주체들이 자라나게 만들어야만 한다. 국가 주도 발전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경제적 국가기구도, 재벌 대기업도, 추격 의식에 휩싸인 가계도 아닌 경제 주체들 말이다.
이런 새 경제 주체의 후보로 어떤 집단이나 조직을 들 수 있을까? 동네 수준에서 촘촘하게, 자연을 조금이라도 덜 파괴하는 방식으로 재생가능에너지 생산 기반을 구축하는 협동조합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일자리 수급 현황을 파악하고 일자리 창출 계획을 세우는 데 개입할 능력을 갖춘 노동운동, 주민운동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이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공적 자금 투자를 투명하게 관리하면서도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공공 금융기관도 필요할 것이며, 탄소 제로 달성에 매진하는 새로운 국가기구도 수립돼야 할 것이다.
이런 주체들은 단지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어쩌면 인류는 이미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제한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기후 대재앙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돼버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생태 전환은 이제 더 추진해봐야 소용없게 됐는가?
그렇지 않다. 기후 위기를 조절하는 데 이미 실패했더라도 기후 대재앙 속에서 생존 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여전히 생태 전환은 필수 과제다. 변덕스러워진 지구 생태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제사회 체제는 최대한 유연해지고 회복 탄력성을 갖춰야 한다. 농업은 사멸하고 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으며 산업 생산조차 소수 대기업에 의존하는, 극도로 경직된 체제는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다른 경제 주체들의 등장과 성숙을 통해 생명체의 복잡성과 유연성에 보다 가까워진 체제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기후 위기가 어떻게 전개되든 새로운 경제 주체들의 육성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계획에는 바로 이런 주체들이 없다. 새로운 경제 주체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런 주체들을 발굴하겠다는 전망이나 의지조차 없다. 문제는 단순히 이들이 부재하다는 점만이 아니다. 이들이 없기에 그 자리를 전혀 다른 주체들, 이들과는 정반대되는 주체들이 차지한다. 대한민국의 낡은 경제 체제를 지탱하는 기둥들이 미래에까지 국민들이 의존하고 복종해야 할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디지털 뉴딜을 부픈 마음으로 기다리는 삼성 재벌, 그린 뉴딜의 결론은 수소차 지원일 뿐이라 선언하는 현대-기아차 재벌이 그들이다.
구 질서뿐만 아니라 변화의 담론까지 독점하는 지배 체제
백보를 양보해, 전기차-수소차로 전환하려면 기존 자동차 생산업체의 협력이 관건적이라고 치자. 전환 과정에서 기성 경제 주체들 역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수긍할만한 명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성 경제 주체들은 새 경제 체제에 맞게 전에 없던 관행과 규율을 받아들여야 하고, 새로운 위상과 역할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정부의 그린 뉴딜 계획은 이런 진실에 눈 감고 있다. 국고로 전기차-수소차 인프라를 구축해주고 국민들을 이들 시장의 소비자로 동원하겠다고 하면서도 그 수혜 대상인 현대-기아차 재벌에게 새로운 민주적-생태적 경제 체제에 부합하도록 변신을 요구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재벌 독재 체제를 끝낼 새 지배 구조를 제시하지도 않고, 이들의 지배력을 제어할 공공부문 구축이나 계획 기구 신설, 산업별 노사 협약 체제 도입에 대한 고민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린 뉴딜'이다.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의 새로운 결탁이 최첨단의 '좌파적' 용어를 뒤집어쓰고 미래를 약속한다. 낡은 지배 체제에 균열을 낼 수단으로 변화의 담론을 찾아 헤매던 이들은 바로 그 구 체제가 변화의 담론까지 제 것으로 독차지하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군림하고야 말겠다고 선언하는 광경과 마주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지배 체제는 구 질서뿐만 아니라 그 질서에 맞서는 무기로 등장한 변화의 담론까지 흡수하고 독점하며 수명을 이어간다. 일자리와 부동산, 학벌 등에서 온갖 기득권을 움켜쥔 계층-세대-집단이 '민주주의'를 독점하며, 여성들이 여전히 폭력과 모순에 노출돼 있는데도 정부-여당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 그리고 이제는 석탄 화력발전소 신설에 미련을 보이고 그린벨트 해제에 집착하며 재벌 주도 경제 외에는 다른 무엇을 상상하지 못하는 정권이 '그린 뉴딜'을 선포한다.
말이 넘쳐나고 말이 오염된 사회다. 억눌리고 분노한 이들은 이제 말조차 빼앗기고 있다. 무서운 것은 더 이상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대중이 그것 말고 다른 수단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말의 성찬에 스스로 취한 자들은 이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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