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에 우리에게 과거와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 낱말 가운데에는 '생태'가 있다. 올해 초에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할 때부터 자연과학자들은 이것이 기후 급변 같은 생태계 위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박쥐를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건너온 것은 중국인들의 기괴한 음식 문화 탓이 아니라 과도한 도시화로 숲이 줄어들고 야생동물이 인간과의 접촉을 강요당한 결과다. 또한 새로운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것은 기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태계 위기가 선포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지난 세기 말부터 산업 자본주의와 자연 환경의 모순과 충돌이 지적됐고, 이를 가장 중요한 정치 쟁점으로 제기하려는 생태주의 흐름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골수 생태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인류는 이를 그리 급박한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결국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넘어서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리라는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늘 이는 다음 세대쯤에 닥칠 재앙이라 여기곤 했다. 생태주의가 대두한 지도 거의 두 세대 가까이 지났는데 지구 자본주의의 팽창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2020년은 이런 시대가 끝나고 미지의 새 시대가 시작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코로나19는 지구 위 거의 모든 곳에서 일상을 중단시켰다. 생태계 위기가 처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절박한 위협으로 다가왔고, 그간 우리 삶을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기준과 가치, 목표들조차 이 위협 앞에 갑작스레 힘을 잃고 말았다.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지구 곳곳을 덮친 이상 기후도 일상에 위기의 그림자를 드리우기는 했지만, 코로나19는 이 점에서 특히 유별나다. 코로나19 대유행을 통해 지구 생태계 위기는 처음으로 온 인류에게 '나의 문제'로 엄습했다.
백신은 어쨌든 개발될 것이다. 어쩌면 치료약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1, 2년만 버티면 끝나고 말 사태는 아니다. 사스와 메르스가 코로나19로 돌아왔듯이, 기후 급변 같은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칠 것이다. 게다가 기후 급변은 반전의 기회를 벌써 저만치 따돌리며 더욱 가속화하는 중이다. 이런 까닭에, 2020년에 시작된 전 지구적인 일상의 위기감은 아마도 앞으로 계속 인류를 짓누르는 기본 정서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생태비상시대'에 진입하고 만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
생태비상시대는 인류사에서 처음 맞는 시대이고, 따라서 당연히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전에 없던 국면이다. 이 낯선 시대에는, 300여 년 전 북반구의 한 구석진 곳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 최초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것인가, 끝낼 것인가"가 더는 미룰 수 없는 문제, 당장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로 제기될 것이다.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번영과 함께 항상 더 많은 파괴와 더 심각한 재앙을 수반하는 자본주의의 운명을 판결할 영광이 노동계급에게 있다고 내다봤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무덤 파는 이"라는 잊지 못할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계급에게는 자본주의를 끝낼 이유만큼이나 이 마지막 작별을 뒤로 마냥 미룰 이유 또한 있었다. 자본주의는 몇 차례 회복 불가능한 위기에 몰리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일자리,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마련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놀라운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이 능력은 보통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불렸다. 일정한 성장 목표를 달성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가들의 축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일자리 확대와 소득 개선을 통해 노동계급의 불만을 무마할 수도 있었다. 상황이 좋을 때에는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동시 성장을 통해 이러한 국면을 이어갈 수 있었고, 상황이 좋지 않은 때에도 몇몇 대규모 경제권(과거에는 미국, 최근까지는 중국)의 성장을 통해 어찌어찌 비슷한 국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면이 계속되는 한, 노동계급 입장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자본주의 안에서 어떻게든 타협하는 것이었다. 물론 혁명가들은 이것이 일시적인 타협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고, 실은 자본과 노동의 직접적인 관계 바깥으로 위기 요인을 전가함으로써 지탱되는 불안정한 게임임을 폭로했다.
역사상 계급타협의 최전성기였던 20세기 중반에도 그랬다. 이 무렵 혁명가들은 제3세계 혹은 오늘날의 표현에 따르면 남반구 인민들의 수탈 덕분에 이런 게임이 지속될 수 있으며, 남반구 인민의 각성과 반격으로 판이 엎어질 때가 다가왔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 경고는 기대만큼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위기감은 여전히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의 핵심적인 사회 관계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산업 자본주의의 팽창이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경고 역시 한 동안은 마찬가지였다. 옛 혁명가들이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것만 같은 생태 전환론자들은 지구 행성의 한계 탓에 항구적인 양적 성장을 통한 타협이 더는 계속될 수 없다는 불길한 예언을 반복했다. 지구 자본주의 전체의 평균 성장률을 유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끊임없이 밖으로, 혹은 훗날로 미루는 이 거대한 연극이 더 이상 상연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점점 실감나게 다가오는 기후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는 오랫동안 묵살됐다. 혹은 후손들을 위한 경고라거나 새로운 '녹색' 자본주의를 깨워 일으키는 외침이라는 식으로 흐리멍덩하게 변주됐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게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대세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갑자기 전혀 다른 시대 안에 놓였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확산과 함께 세계인들은 더는 위기가 안정된 자본주의 사회 관계 바깥에서 '관리'될 수 없음을, 이를 더 이상 장담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있다. 어느덧 마스크를 쓰는 게 더 익숙해진 육체의 감각, 알게 모르게 온갖 경제 지표의 무게를 능가해버린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 거리두기를 둘러싼 논란의 장이 돼버린 공장과 학교는 위기가 다름 아닌 우리 신체 안으로까지 진입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국면이 장기화한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는 민중 집단들 사이에서 다른 시대에는 보기 힘들었을 감각과 상식, 각성이 대두하거나 확산될 수 있다. 지구 자본주의가 낳은 모순이 신체 안으로까지 난입한 상황에서 지난 몇 세대 동안 이어온 불안했던 타협을 고집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칼 폴라니의 표현에 따르면, 어떤 '체념'에 도달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안겨주는 번영은 이제 과거의 기억일 뿐이라는 체념.
그러나 폴라니의 말대로, 체념은 또한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거대한 전환>, 홍기빈 옮김, 길, 2009. 604쪽). 우리에게 익숙했던 일상이 이미 붕괴했다는 체념과 함께,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의 눈 먼 질주를 경고한 이들이 그토록 대중 자신에 의해 착수되길 열망했던 새 사회의 건설이 어쩌면 드디어 일정에 오를지 모른다. 느닷없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하게 된 세상에서 새로운 무게로 다가오는 낱말들, '민주', '사회', '생태' 등등이 중심이 되는 사회 말이다.
정말로 그런 각성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이 결국은 고전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각본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실현될 운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될지 모르겠다. 어쩐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연상시키는 발터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우리 시대의 가장 날카로운 예언으로 입증될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발터 벤야민 선집5: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356쪽)
유토피아의 열정이 소진된 시대에 닥친 대변화의 요청
그러나 자주 그렇듯이, 갑자기 닥친 이 역사적 순간은 비극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비극이란 더할 나위 없는 덕성을 구비한 주인공에게 모든 가능성이 닫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희귀한 가능성이 열리는데도 주인공이라 할 만한 등장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류의 처지는 후자에 가깝다.
우리 시대는, 적어도 코로나19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우리가 살아온 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이 유토피아의 열정이 소진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자본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금기였고, 한때 그런 꿈을 꾼 많은 이들(가령 68세대 일부)이 지구 자본주의의 최대 승리를 여는 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한국만 해도 최근 역사에서 바로 이런 꿈과 가장 밀접히 연관됐던 세대가 민주주의를 가장 그럴싸한 외관을 지닌 현상유지 방책 정도로 왜소화시키는 주역이 돼 있는 형편이다.
그 정도로 우리는 전혀 준비돼 있지 않다. 그런데도 조상들이 미루고 또 미뤄온 선택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하는 근본적 시대가 갑자기 열려 버렸다. 새 에너지 체제에 대해 감도 잡지 못하는 대중에게 '녹색 뉴딜'이라는 암호가 던져졌다. 작업장의 노동자 생존권조차 미래 과제인 나라에서 '기본소득'이 주류 정치 쟁점으로 툭 튀어 나왔다. 대학 서열 체제와 입시 경쟁이 굳건한 상식인 사회에 모든 강의를 온라인으로 하고 입시 준비생들이 시험 보기조차 힘든 상황이 예고 없이 닥쳤다. 넘치는 것은 위기/기회이고, 없는 것은 다만 새 사회를 향한 대담한 열망과 의지다.
나는 현 상황에 대한 이 답답한 진단을 벤야민이 남긴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며 끝맺을 수밖에 없겠다. 인용하기에는 좀 길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꼭 전해져야 할 절박한 메시지다.
"계급투쟁을 사람들은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계급투쟁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지가 결정될 힘겨루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 결말에 따라 승리자는 잘되고 패배자는 좋지 않게 되는 어떤 씨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들을 낭만적으로 호도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계급이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내적 모순들로 인해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 몰락하느냐 아니면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의해 몰락하느냐이다. 3천여 년 발전해온 문화가 존속하느냐 아니면 종말을 고하느냐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역사는 끝없이 힘을 겨루며 싸우는 두 사람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악(惡)무한이라는 것을 모른다. 진정한 정치가는 오로지 일정표에 따라서만 계산하는 사람이다. 부르주아계급의 퇴치가 경제와 기술의 발전에서 대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어느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인플레이션과 가스전이 그 신호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가가 언제 개입하고, 위험을 감지하며, 어떤 템포를 취하느냐는 것은 기사(騎士)적인 사안이 아니라 기술적인 사안이다. ("화재경보기", <발터 벤야민 선집1: 일방통행로 외>, 김영옥 외 옮김, 길, 2007. 124쪽)
이미 파시즘에 결정적 패배를 당해 나치 정권의 마수를 피해 다니기에 바빴던 벤야민은 그럼에도 여전히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길 기대했고, 이 기대의 대상은 오직 정치일 뿐이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결국 비극의 반전이란 정치로 시작할 수밖에는 없는 법이다. 마침내 현상유지의 톱니바퀴이길 거부한 자들의 정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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