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한국 공장만 정상 가동되고 있다." 지난 두 차례의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중국 공장도 가동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상 가동은 아니다. 그런데 완전 봉쇄가 진행되고 있는 국가들의 자동차 공장 중 극소수가 매우 바쁘게 가동되고 있다는 놀라운 얘기를 보탤 필요가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자동차가 아니라는 점이다.
* '코로나 19와 자동차 산업'에 대한 지난 두 편의 <인사이드 경제> 바로가기
① 방역은 한국이 세계의 모범? 노동은 이탈리아를 배워야
② 코로나19 위기에도 한국 자동차 판매량이 증가한 이유는?
일찌감치 마스크 생산 시작한 GM
3월 18~19일부터 미국의 '빅 3'를 비롯한 대부분의 자동차공장들이 휴업에 들어갔다. 이 글이 나가는 순간까지도 공장들은 멈춰서 있으며, 빨라야 5월 4일부터나 재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4월 초부터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 GM의 공장이 하나 있다. 미시건주 워렌(Warren)에 위치한, 과거 GM의 변속기를 만들던 공장이다.
이 공장은 3월 중순부터 가동 중단된 게 아니라 작년에 폐쇄된 공장이다. 2018년 말부터 GM은 북미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했고, 작년에만 미국과 캐나다에서 4개의 공장을 폐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워렌의 변속기 공장이었다. GM은 폐쇄된 이 공장을 활용해 의료인용 마스크 생산을 4월 초부터 시작했다.
자동차 변속기를 생산하던 공장이 수술용 마스크 생산을? 그렇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 감염이 시작되자 곧바로 마스크 대란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미국의 경우 초기에 한국의 마스크 대란을 비웃으며 "환자가 아니면 굳이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확산세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트럼프 행정부는 GM과 포드 등 완성차 업체에 마스크 생산을 주문했다.
자동차 제조업의 기초 : Make or Buy!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종합 제조업'으로서의 자동차산업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동차 제조업' 하면 그저 콘베이어벨트에서 단순조립 업무를 떠올린다. 오히려 자동차 디자인과 연구·개발 파트에서 더 혁신적이고 생산적인 업무가 이뤄질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프레스, 각종 용접과 금형 기술, 무엇보다 작업자의 손 끝 감각에 의존하는 숙련된 제조 기술이 필수적이다. 개인이 이런 기술을 모두 습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동차 공장 안에는 이런 기술 한두 개씩 갖고 있는 노동자들이 셀 수 없이 존재한다.
또 한 가지 특성을 짚어야 한다. 제조업 종사자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인데,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구매할 것인지(Make or Buy)"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사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다면 밖에서 생산한 것을 구매해서 들여온다.
2만 개의 부품을 조립하는 자동차 제조업 특성상 당연히 수많은 부품사와 납품계약 등 연계를 맺을 수밖에 없고, 이런 것을 공급 연쇄사슬(Supply Chain)이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자동차 제조업 생태계를 구성한다. 완성차업체 내에서는 '구매' 파트가 이런 업무를 담당한다. 자, 그럼 GM이 마스크 생산에 이르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쳤는지 살펴보자.
위의 공정들은 <인사이드 경제>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GM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의료인용 마스크 제작 과정을 공정별로 세분화해서 동영상으로 제작해 공개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단순 요약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궁금한 분들은 직접 사이트에 접속해 보시길.
* GM의 마스크 제작 과정 동영상이 담긴 웹페이지 : https://www.gm.com/our-stories/commitment/face-masks-covid-production.html
내친 김에 인공호흡기까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휴업이 시작된 지 1~2주 만에 GM은 월 150만 개의 마스크를 만들 수 있는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로부터 1개월 뒤인 4월 초부터는 더 야심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코로나19 중증 환자들에게 필요한 인공호흡기, 미국에 가장 부족한 이 기계의 생산에 착수하게 된다.
인공호흡기의 경우 자칫 불량제품이 만들어지면 중증환자의 사망을 초래할 수 있는, 정말 정밀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는 기계이다. GM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호흡기 생산에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벤텍(Ventec)과 협업을 진행하게 된다.
아니, 그냥 벤텍이 생산량을 늘리면 되는데 이걸 왜 굳이 GM이 만드는 걸까? 어차피 GM 마크를 달고 출시되는 게 아니라 벤텍 브랜드로 나가는, 사실상의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생산인데 말이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 출현하기 전에는 미국에서 인공호흡기 대량생산의 필요성이 높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수천 개도 아니고 수만 개, 아니 수십만 개의 인공호흡기가 당장 필요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벤텍이 갖춘 제조능력과 생산설비로는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인 것이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GM과 같은 메이커가 갖춘 구매, 물류, 제조 전문지식과 숙련공이 필요했다.
4월 초부터 1000명의 노동자를 뽑아 인디애나에 위치한 GM의 부품 생산공장에서 인공호흡기 생산이 시작된다. 4월 17일에 드디어 GM이 생산한 첫 인공호흡기들이 시카고 소재 병원들의 응급센터로 이송되었다. 당연히 GM이 갖춘 구매 및 물류시스템이 활용되었다.
GM 사례는 빙산의 일각
3월 말부터 5월 3일까지 완전 봉쇄를 선언할 정도로, 인도에서도 코로나19 확산세가 엄청나다. 그러자 쌍용차의 모기업인 마힌드라도 인공호흡기 생산을 시작했다. GM이 만드는 벤텍 브랜드의 인공호흡기와는 모양새가 약간 다른데, 병원에서 흔히 '앰부 백(Ambu Bag)'이라 부르는 기계에 해당한다.
보통 이렇게 생긴 인공호흡기는 공기 주머니를 의사나 간호사가 직접 누르며 공기를 주입해주는 수동식인데, 마힌드라가 제작하는 인공호흡기는 자동으로 공기 주머니를 채우고 빼주는 기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디 미국과 인도뿐이겠는가.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롤스로이스, 포드, 혼다 등 자국 내에서 자동차 생산을 하는 업체에 인공호흡기 등 의료장비 제작을 호소한 바 있다. 이러한 장비들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이를테면 디자인, 조달, 조립, 검사, 선적 관련 업무를 종합적으로 갖춘 곳이 자동차 업체뿐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대의 전기차업체인 BYD(비야디)는 아예 세계 최대 규모의 의료용 마스크 공장을 새로 짓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GM만이 아니라 포드와 테슬라도 인공호흡기 생산을 준비하거나 이미 생산을 시작한 상태이다.
이윤과 인류의 필요, 뭣이 중헌디?
자동차산업 자본가들이 특별히 착하거나 봉사정신이 남달라서 저런 일들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독자들은 없을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인공호흡기 제작을 호소했을 때 GM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 트럼프가 한국전쟁 때 발동했던 '국방물자생산법'으로 압박한 이후에야 GM은 인공호흡기 생산 준비에 착수했다.
CBS의 <60 Minutes>에는 인디애나 공장에서 인공호흡기 생산을 돕고 있는 한 노동자가 "여동생이 코로나19 중증환자로 인공호흡기가 너무 필요한 상태인데 내 손으로 만들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는 인터뷰도 등장한다. 애초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생산을 거절했던 GM이 저런 인터뷰를 섭외했다는 점이 참으로 가증스럽긴 하지만.
만일 이윤과 수지타산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면, 자동차 업체들이 마스크와 인공호흡기를 생산하는 것은 완전히 넌센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류의 필요를 외면할 경우 자동차를 팔아먹을 수조차 없다는 위기의식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나서게 만든 것이다.
사실 그런 종류의 기계장치와 제품은 몇 가지 더 있다. 대구에서 코로나19 지역 집단감염이 시작된 직후, 권영진 대구시장이 가장 먼저 했던 조치들 중 하나가 대구 지역의 모든 구급차를 '징발'한 것이었다. 실제로 사용한 표현이 '징발'이다. 마스크 '배급'과 구급차 '징발', 시장경제가 가장 혐오하는 이들 단어가 코로나19에 맞서 싸우는데 필수적인 용어가 된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를 낳고 있는 뉴욕, 이곳의 쿠오모 주지사 역시 미국 전역에 구급차 조달을 호소했다. 3월말에 미국 각지에서 300대의 구급차가 뉴욕을 향해 출발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중증환자를 실어나르기 위해서는 음압장비를 갖춘 구급차(음압 구급차)가 필수적인데 이런 구급차는 찾는 것 자체가 어렵다.
포스트 코로나, 인류 필요를 위한 생산
3월 초에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추경예산안에도 환자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음압 구급차 146대, 일반 구급차 13대 확충에 각각 292억원과 9억원을 편성한 바 있다. 그나마 방역에 성공했다는 한국이 이 정도라면 코로나19가 파죽지세처럼 확산되고 있는 지역에는 더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스크와 인공호흡기도 제작하는데 구급차 생산이라면 자동차 업체가 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 아닌가? 게다가 1회성으로 필요한 자동차들이 아니라, 아마도 앞으로 수십년 동안 인류가 감염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필요한 자동차들이다.
'배급'과 '징발'이라는 단어가 코로나19 확산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면, 국가와 경제주체들이 주도하는 '인류의 필요를 위한 생산' 역시 마찬가지다. 필요하다면 국유화 조치를 해서라도 말이다. 이탈리아 정부가 알이탈리아 항공사를 국유화하고, 스페인이 병원들을 일시 국유화하는 등 '국유화'라는 단어 역시 코로나19 저지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조치 아니던가.
마힌드라의 투자 철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쌍용차의 경우,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레임 타입 차량에 강점을 가진 업체로, 구급차가 달리기 어려운 도로조건이나 오프로드를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는 차량을 제작할 역량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경제조건이 어려워 코로나19 확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전세계의 많은 국가도 음압 및 일반 구급차 공급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GM을 비롯한 몇몇 업체의 인공호흡기 대량 생산이 시작되자, 장사꾼 체질인 트럼프마저 인도네시아, 에콰도르 등의 나라로 인공호흡기를 공급하겠다고 나서지 않던가. 이윤이 아니라 인류의 필요에 따른 생산과 공급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중요한 가치로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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