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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기본소득, 정명(正名)이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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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재난기본소득, 정명(正名)이 아닌 이유

[복지국가 SOCIETY] 복지국가의 사회수당은 기본소득제도가 아니다

재난기본소득은 잘못된 용어다. 어떤 실질이나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는 명칭이 정확해야 한다. 가령 고양이에게 호랑이라는 명칭을 붙인다면, 이는 누가 봐도 틀린 것이다. 진실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명(正名), '바른 이름'이 중요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널리 회자된 '재난기본소득'은 정명이 아니다. 실질이 명칭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재난기본소득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게다가 더 나쁜 것은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용어가 어떤 정치적 의도로 공격적으로 확산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명(正名)이 아닌 것이 버젓이 통용되는 상황을 용납해선 안 된다. 특히, 그것이 포용적 복지국가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잘못된 용어'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

코로나19 사태가 대구 신천지 교도들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자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재난기본소득이란 말이 등장했다. 정부가 재정 지출을 통해 가계에 현금을 지원하자는 주장인데, 여기에 재난기본소득이란 명칭이 붙었다. 일부 기본소득제도 주창자들이 이런 엉터리 용어를 만들고 유포했다. 이후 다수의 언론과 평론가들이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한 정부와 지자체의 긴급 현금 지원에 대해 재난기본소득이라고 언급하기 시작했고, 이 용어는 인구에 널리 회자될 만큼 급속하게 확산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재난지원금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된 4월 말까지도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엉터리 용어가 여전히 적지 않게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잘못된 용어가 왜 갑자기 확산됐을까. 그것은 정명(正名)이 아닌 이 용어가 정치적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공세적으로 제기됐고, 이것이 무차별적으로 언론과 사회관계망을 통해 언급되고 인용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3월부터 각급 지자체들이 지급하기로 한 선별적 재난지원금조차도 재난기본소득으로 홍보됐다. 사자를 호랑이라고 명명하고 홍보한 것이니,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재난지원금은 기본소득제도와 아무 관련이 없다.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잘못된 용어의 확산에는 기본소득제도 옹호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잘못이 가장 크다. 실제로 이 지사는 수차례에 걸쳐 공개적·공세적으로 '재난기본소득'을 요구했다. 3월 19일, 이 지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또 3월 21일, 황교안 대표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제1야당의 당론으로 정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엔 '홍남기 경제부총리님께 드리는 고언'을 통해 홍 부총리가 재난기본소득의 지급을 신속하게 문재인 대통령에게 건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코로나19 사태라는 국가적 재난을 맞아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공세적으로 요구했던 재난기본소득은 연일 각종 방송과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SNS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후 그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인과 논객들이 이 왜곡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물론, 예외가 없진 않았다.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재난 긴급생활비' 등의 올바른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이는 정명(正名)이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언론과 평론가들은 이런 정명(正名)조차도 재난기본소득이라고 바꿔 부르거나 이를 재난기본소득의 일종이라고 해석하곤 했다.

기본소득제도의 실질을 구성하는 핵심 내용

최근 수개월 동안 우리 사회에서 정명(正名)이 아닌 '재난기본소득'이란 말이 정치적 목적 하에 버젓이 확산됐다. 심지어 각종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긴 기간에 걸쳐 빈번하게 언급됐다. 우리는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긴 기간 동안 진행된 데 따른 후과가 심각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재난기본소득'이란 '잘못된 말'이 우리 사회에서 인구에 널리 회자되면서 국민의 귀에 익숙해지게 된 '기본소득'제도가 장차 포용적 복지국가로 가는 여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재난기본소득'이란 '잘못된 용어'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 귀에 익숙해진 '기본소득'이란 말은 그저 '기본적으로 복지를 잘해 준다'는 식의 좋은 말로 간주될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진실은 그런 게 아니다. '재난기본소득'에서 사용된 '기본소득'이란 말은 서민들의 생계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득을 국가가 지원한다는 식의 '일반명사'가 아니다. 기본소득은 특정한 실질에 상응하는 고유명사(고유한 명칭)인데, 이는 복지국가제도에 버금가는 거대 담론이다. 즉, 기본소득제도는 특정한 국가의 체계 또는 제도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고유한 명칭인 기본소득제도는 어떤 실질을 포함하고 있을까. 기본소득제도의 실질을 구성하는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편성이다. 자산조사 없이 소득이 있든 없든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한다. 둘째, 무조건성이다. 근로 등의 조건이나 심사 없이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한다. 셋째, 개별성이다.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각 개인에게 현금을 지급한다. 넷째, 정기성이다. 매달 지속적으로 현금을 지급한다. 다섯째, 충분성이다.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충분한 현금을 지급한다. 이런 특성들을 모두 갖출 때라야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허락된다. 기본소득제도 주창자들이 제시한 조건에 의하면, 여기서 하나라도 빠질 경우 기본소득이 아니다.

이재명 지사의 10만 원이 '재난기본소득'이 아닌 이유

경기도를 제외한 대다수의 각급 지방자치단체들은 소득하위 50% 또는 그 이하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선별적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지자체들의 이런 재난지원금에 대해 아직도 '재난기본소득'이란 '잘못된 용어'가 쓰이는 경우들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부에서는 의도적으로 이 왜곡된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겠으나 기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한 달 넘게 전국적으로 널리 통용되던 말이라서 어떤 의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언급됐을 개연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각급 지자체들이 지급했던 선별적 재난지원금은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다. 기본소득의 첫 번째 기준인 보편성의 원칙부터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기도의 재난기본소득은 정명(正名)일까? 결론적으로 이것도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다. 지난 3월 24일, 이재명 지사는 "코로나19 경제위기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도입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하면서 경기도민 모두에게 10만 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기본소득제도인지 따져보자. 경기도가 도민 모두에게 지급한 10만 원은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의 원칙에 부합한다. 하지만, 정기성과 충분성의 원칙에는 어긋난다. 재난 대응을 위한 일시적 현금 지급은 매달 지속적으로 지급된다는 정기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또, 기초생계가 가능할 정도의 충분한 금액(월 70만 원 이상)이 지급돼야 한다는 충분성의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지사의 재난기본소득은 정명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지사의 재난기본소득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재난지원금을 선택했다. 재난기본소득은 정명(正名)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금 지원이 기본소득제도의 실험적 도입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애쓴 청와대와 정부의 노력이 엿보인다. 4월 26일 현재 여당과 정부가 합의한 방안에 따르면, 재난지원금은 모든 국민에게 4인 가구 기준으로 100만 원이 지급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본소득제도의 원칙에 부합할까. 현금을 모두에게 지급하므로 보편성은 인정된다. 하지만, 가구 단위의 지급이므로 개별성의 원칙에 어긋난다. 무조건성은 충족하지만, 충분성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정기성도 없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기본소득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이를 재난지원금이라고 명명했다. 정명이다.

기본소득제도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

지금까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정명(正名)으로서의 기본소득제도가 실시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제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가 하나 있다. 스위스의 국민투표가 그것인데, 제대로 참고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정명(正名)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제도의 원형에 해당하는 모델이 시민운동단체에 의해 제기됐고, 이것이 스위스의 참여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2016년 6월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당시의 기본소득 도입 방안은 매달 18세 이상 모든 성인에게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 원), 어린이·청소년에게 650스위스프랑(약 78만 원)의 기본소득을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국민투표 결과, 유권자의 76.7%가 반대해 부결됐다.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 사례에서 우리는 '충분성의 원칙'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국가마다 다르겠지만, 해당 사회에서 구성원 1인이 정상적인 생계를 기본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이 얼마인지, 이것을 합의하고 매달 지급할 때라야 기본소득의 충분성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에서는 대개 120만 원 내외가 될 것으로 언급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소한 70~80만 원 이상은 돼야 할 것이다. 국민 1인당 연간 800만 원으로만 계산해도 매년 400조 원 이상의 재정이 소요된다. 올해 중앙정부의 재정 규모가 512조 원임을 상기해볼 때, 막대한 기본소득제도 도입 재원을 추가로 마련하는 건 불가능하다.

혹자는 400조 원 중의 절반인 200조 원은 증세를 통해 마련하고, 나머지는 기존의 정부 재정 등을 구조조정해서 충당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나는 이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서 증세와 사회보험료 인상 조치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을 가까운 연도 내에 OECD 평균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조치를 통해 어렵게 확보한 추가 재원을 현금으로 매달 국민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충분히 나눠주자는 주장(기본소득제도)에는 반대한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나라의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런 허황된 주장을 펴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장차 증세 등을 통해 마련될 재원은 모두 보육·교육·의료·요양·공공주거·직업훈련·평생교육·일자리 등의 보편적·적극적 복지국가 정책에 투입돼야 한다.

또,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기존 정부 재정의 구조조정을 거론한다. 물론, 일부는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불요불급한 재정은 효과적으로 재편하는 게 옳다. 하지만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할 정도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건 기존의 틀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결국, 기존의 복지국가 제도를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통·폐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이것은 기본소득제도 정통 주창자들의 논리에 잘 부합한다. 즉, 보육·교육·의료·요양 등 사회서비스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보편적 복지국가를 기본소득 중심의 새로운 국가 체제가 대체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재인 케어와 노인장기요양 등 사회서비스가 축소 또는 일부 민영화될 개연성이 크다.

기본소득제도의 정통 주창자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공히 효과와 효율성을 이유로 기존의 복지국가제도를 대체하는 기본소득제도를 요구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존의 복지국가제도가 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일자리의 부족에 따른 실업과 비정규직 등으로 인해 고용·복지 안전망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의 광범위한 등장을 언급한다. 실제로 이런 진단은 옳다. 그럼에도 나는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제도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기존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지난 50여 년에 걸쳐 생산력과 생산관계 등의 변화에 적절하게 제도적 대응을 하며 발전해왔고, 장차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제도 발전을 잘 이어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복지국가의 사회수당은 기본소득제도가 아니다!

기존의 복지국가제도를 기본소득제도로 대체하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기본소득제도 정통 주창자들의 견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니 미래를 어찌 예단할 수 있겠는가.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신분제 왕정국가가 무너지고 민주주의 공화국이 도래했듯이 언젠가는 기존의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흔적만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엔 기본소득제도나 그 비슷한 제도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한두 세대 이내의 가까운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사회서비스 중심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 여전히 크고, 어떤 선진 복지국가들도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소득제도의 정직한 정통 주창자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선 복지국가제도의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사회수당을 기본소득제도라고 우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복지국가제도의 사회수당 프로그램의 하나인 아동수당에 대해 '아동 기본소득'이라고 불렀고, 청년수당이나 농민수당 같은 추가적 사회수당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각각을 '청년 기본소득'과 '농민 기본소득'이라고 명명했다. '재난기본소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정명(正名)이 아니므로 옳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것이다. 정통 주창자들에 의하면, 기본소득제도는 기존 복지국가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것을 대체하려는 새로운 국가 제도 또는 체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복지국가제도의 사회수당 프로그램을 기본소득제도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든 옳지도 정당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보편적 복지국가의 핵심 내용은 보편적 복지가 경제 및 일자리와 유기적으로 연계·통합돼 있다는 것이다. 먼저, 복지국가제도의 가장 중요한 기둥인 보편적 복지는 크게 소득 보장과 사회서비스 보장으로 구분된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방법은 사회보험과 사회수당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사회보험은 근로를 통해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강제로 가입하고 매달 보험료를 내는 것인데, 이는 각종 사회적 위험에 제도적으로 대비하려는 장치이다. 산업재해로 소득이 단절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산재보험에 가입하게 하고, 실업의 경우엔 고용보험, 질병의 경우엔 질병보험, 그리고 노령(은퇴)에는 노령연금(국민연금)이 작동한다. 이것이 복지국가의 4대 사회보험이다.

그런데 사회보험은 근로를 통해 소득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작동한다. 그러므로 원천적으로 근로가 어려운 사회적 약자인 아동·장애인·노인 등을 위해서는 별도의 소득 보장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사회수당이다. 사회수당은 국가가 국민이 낸 세금을 재원으로 국가재정에서 매달 직접적으로 현금(수당)을 지급하는 보편주의 원칙의 프로그램인데, 여기에는 아동수당, 장애인수당, 노인수당이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대학생들을 위한 학생(청년)수당이 실시되고 있으며, 농민 등 특정 인구를 대상으로 사회수당을 도입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아동수당, 장애인수당(연금), 노인수당(기초연금)이 '사실상의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제도화돼 있다.

이번에는 복지국가의 사회서비스인데, 보육·교육·의료·요양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는 경제학적 가치재로 정부가 이들 사회서비스의 제공을 사실상 책임지는 것이 여기에 투입된 재원의 크기에 비해 산출되는 편익이 훨씬 더 큰 경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편주의 복지국가에서는 사회서비스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이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육성하고, 모든 국민에게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사회서비스는 사람의 능력을 키울 기회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일자리에 대한 접근 형평성을 높여준다. 결국, 사회서비스는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교육뿐만 아니라 직업훈련과 평생교육으로 이어지면서 일자리와 경제성장으로 연계된다. 물고기(현금)를 주는 소극적 복지보다 물고기를 잡을 능력(교육과 직업훈련 등 사회서비스)을 키워주는 보편주의 원칙의 적극적 복지가 압도적으로 중요하고, 우선순위가 높다는 것이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의 논리이자 실제의 모습이다.

지금은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에 매진할 때다!

보편적 복지국가의 원형에 해당하는 스웨덴 모델에 의하면, 복지국가는 성장 엔진을 탑재한 복지·분배·투자 중심의 국가 발전 전략이다. 복지국가 전략은 제도적으로 사회구성원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높여 장차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비하는 데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식이다. 이를 위해 복지국가는 사람에 대한 보편적·적극적 투자를 감행한다. 더 많은 국가 재정이 요구된다. 그래서 경제성장과 증세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의 11%를 공공사회복지(즉, 사람에 대한 투자)에 지출한다. OECD 국가들의 평균은 22%이고, 복지 선진국들은 거의 30% 수준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 경제가 어떻게 얼마나 성장할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인구구조가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돼 있다. 이런 조건에서 잠재성장률은 낮아지고 복지 지출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보편적 복지국가에 제대로 도달하기도 전에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러면 큰일이다. 이대로 시간이 가게 되면, 몹시 나쁜 시나리오로 흐를 개연성이 크다. 한국형 성장 엔진을 탑재한 역동적 복지국가 건설의 길을 과감하게 재촉해야 한다. 우리에겐 예정된 인구구조의 위기 등으로 인해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국민 모두에게 능력 배양의 기회를 공정하게 보장하는 보편적·적극적 복지는 사람에 투자하는 사회서비스 중심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다. 이것이 지난 50여 년에 걸친 다양한 유형의 복지국가 발전 경험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소중한 교훈이다. 영·미식 모델이 아닌 북유럽 모델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바로 사회서비스 중심, 일자리 중심의 경제와 복지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들 선진 복지국가들은 기본소득제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당장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현금 포퓰리즘 논란을 불러올 개연성이 큰 기본소득 이슈가 복지의 외피를 쓴 채 정명(正名)이 아닌 방식으로 번져나가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고 우려할 만한 일이다. 지금은 복지국가 건설에 매진할 때다.

(이 글은 필자가 <국제신문>에 쓴 칼럼 '재난기본소득, 정명(正名) 아니다!'를 수정하고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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