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언론은 이 보고서가 '국가 핵심 기술'이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를 공개하느냐 마느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수식어가 빠져 있다. 즉 '사업주가 제공한 작업 환경에서 재해를 당한 노동자가 재해의 업무연관성을 확인할 유일한 근거'의 공개 여부인 것이다.
사업주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과 피해 보상
노동자와 사업주가 체결하는 근로 계약에는 '안전한 근로 환경에서의 노동력 제공'이라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바로 사업주가 부담해야 할 안전 배려 의무이다. 사업주는 작업장을 안전하게 유지해야 하지만, 노동자들은 때로 불가피하게 사망·사고·질병에 노출될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해줄 장치가 바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의 보상이다.
그런데 질병이나 사고가 업무 환경에서 비롯된 것(업무연관성)임을 입증할 책임은 바로 노동자에게 있다. 문제는 입증에 필요한 근거(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 등)를 근로계약의 상대방이자 작업 환경을 관리・통제하고 제공한 사업주(이번 사례의 경우는 삼성전자)가 가지고 있는 경우다. 최근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와 관련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삼성은 영업 기밀이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한다.
영업 기밀은 생명의 가치에 우선하는가?
노동자의 생명은 영업 기밀보다 덜 중요한가. 그래서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영업 기밀이라는 신성함(?) 앞에 속수무책으로 운명인 듯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업무관련성을 규명할 유일한 근거인 작업 환경 보고서를 공개할 수 없다며 버티기만 할 일이 아니다.
설령,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가 공개하기 어려운 핵심 기술이라고 판단되더라도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삶의 극단으로 내몰린 노동자가 최후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는 대책이 무엇인지 함께 제시해야 한다. 사고를 발생시킨 1차적 책임은 삼성전자였고(물론 삼성은 인정하지 않지만), 꽃다운 나이에 억울함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암 환자가 되어 남은 삶이라도 잘 마감하기 위해 보상을 받으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무조건 영업 기밀이니 안 된다는 것이고, 언론은 이를 대안 없이 두둔만하고 있다.
삼성전자 화성 사업장의 경우 2013년 고용노동부 특별 감독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 무려 2004건이나 적발되었을 정도로 사업 특성상 위해 물질 노출 위험이 높은 사업장이다. 그러나 삼성은 노동자들의 죽음이라는 막다른 상황에서도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대안 제시도 없이 유일한 단서마저 공개 거부로 맞서 왔다. 그러면서 산재가 아니라는 자신들의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를 가름해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한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도 절대 공개할 수 없다며 행정소송과 정보공개 집행정지가처분(법원), 행정심판과 정보공개 집행정지(행정심판위원회), 작업 환경 보고서 내용이 국가 핵심 기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판정(산업통상자원부) 신청으로 막아서고 있다.
어쩌라는 것인가. 문제의 근거도, 문제의 원인도 삼성인 내가 알아서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싸움의 내용은 인간(노동자)의 생명을 담보로 한 거대 기업의 자기 방어, 방어의 대상은 바로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이다.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가 영업 기밀로 묶이는 한, 앞으로도 직업병으로 인한 질병과 사망에 대한 원인은 규명할 수 없다. 사람의 생명들이 담보되어 삼성반도체가 돌아가고 있는 분명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희생자들, 우리는 얼마나 고민하고 있나?
이러한 가운데 노동자가 아닌 근로복지공단이 유해 물질 노출로 인한 산업재해 입증의 책임을 지는 방안을 고용노동부가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박영만 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은 지난 4월 9일 <매일노동뉴스>와의 통화에서 "최근 삼성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 공개를 둘러싼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며 "산재 입증 책임을 근로복지공단에 두고 공단이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는 유해 물질에 노출됐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데, 정부가 이런 입증 책임을 공단에 지우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공단에 산재 신청 단계에서 "삼성 공장 A 공정에서 일했다"고 밝히면, 공단이 지방노동관서가 가지고 있는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등을 참고해 산재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의 공개 여부를 놓고 불필요하게 다툴 필요가 없는 데다, 영업 비밀 논란까지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이 유해물질 노출에 대한 산업재해 입증 책임을 지는 방안은 근본적 접근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신청에 대해 심사하는 국가보험의 운영 기관이다. 하지만 공단은 그동안 부실한 역학조사로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남발했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 더구나 소송 당사자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입증 근거)도 확보하지 못한 채 행정기관이 이를 대신 입증한다는 것도 논리상 맞지 않다. 산재 신청이 불승인될 경우 노동자는 피고인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입증 논쟁을 벌여야 하는데, 정보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배제된 노동자가 과연 무엇을 근거로 다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필자는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도 '공론화위원회' 방식으로 풀어가자고 제안한다. 국가와 국민 전체에 경제적인 영향을 미칠 큰 사안이었던 원전 재가동과 추가 건설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명과 안전을 위해할 가능성 앞에 모든 위험 요인과 긍정 요인을 드러내놓고 온 국민이 깊이 고민했던 경험이 있다. 각종 암으로 노동자들 사망이 이어지고 있는 삼성반도체의 위해 물질에 대한 고민도 다르지 않다. 국가 핵심 기술 논란과 생명의 가치 사이에서 지난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관점은 하나, 사람의 생명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산재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로 유럽연합(EU) 평균의 5배에 달한다. 정부는 이런 산업재해를 획기적으로 감축하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되는 일터의 조성을 위해 '산업재해 사망사고 감소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올해 신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를 집중적으로 추진해 2022년까지 산업안전을 포함한 3대 분야의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감축 목표는 '2022년까지 산업재해 사고 사망 만인율(노동자 1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 절반 수준이다. 그런데 이는 독일 등 주요 선진국보다 2~3배 높은 현재의 수준을 OECD 국가(통계를 공개하는)들 평균보다 낮은 수준까지 낮추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은 과거 정부에서 절반 감축에 걸린 통상 10여년의 기간보다 2배 이상 단축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높은 사고 사망율을 5년 내에 절반으로 뚝 떨어뜨릴 여지가 있다는 희망적인 전망 앞에서 우리는 현재의 작업장 환경 관리가 얼마나 부실한 수준인가를 먼저 절감해야 한다. 높은 사망 사고의 저변에는 원청 기업들의 하도급 회사에 책임 떠넘기기. 작업 환경 방치 등 안전장치에 드는 비용을 아끼며 작업자의 생명을 담보로 성장해 온 후진적인 구조가 깔려 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정부도 노동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꿔야 한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고용부가 작업자의 안전을 고민하는 것과 달리 산업부는 국가 핵심 기술의 기밀 사항이 유출되는 것을 굉장히 고민해야 하는 부처"라며 "산업 기술이 외국의 경쟁 업체에 유출될 가능성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생산 공정 내용까지 공개되는 것에 대한 삼성이나 SK 등의 걱정을 고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한국경제, 2018.04.12, 사설 '백운규의 반도체 기술 공개 제동, 산업부 존재 이유 보여줬다'). 이후 산업통상자원부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에 국가 핵심 기술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판정했다.
반면 법원은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 공개를 통해 해당 작업장의 공정 및 어느 지점에서 유해 화학 물질 등의 유해 인자가 검출돼 어느 정도의 위험성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은 망인을 비롯해 해당 작업장의 전·현직 노동자들의 안전 및 보건권의 보장, 나아가 해당 작업장이 위치하고 있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명·신체 건강 등의 가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도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고용노동부, 그리고 법원의 판결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변할 수 없는 본질은 하나다.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근무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다.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산업부의 존재 이유'를 거론하며 부처 간 업무 영역을 들먹이는 것은 무책임하다. 어떤 조건에서도 망설임 없이 작업자의 생명과 안전, 사람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민하는 그런 사회는 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존재하는 것이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김진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노무법인 벽성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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