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생명권에 시비 거는 <조선일보>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생산 시설의 작업 현황이 담긴 보고서를 잇달아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조선일보>가 고용노동부를 비판하고 삼성전자 편을 들기 위해 쓴 기사들이다.
그래서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보고서에는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6개월마다 주요 사업장의 작업 환경을 살핀 결과가 담겨 있"으며, 고용노동부는 "산업재해 입증에 필요한 정보를 적극 공개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를 앞세우고 있다"고 한다.
다시 물음이 든다.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에 해를 끼치는 것과 관련된 영업 비밀이라도 절대로 무조건 비밀이어야 하나? 기업의 '영업' 비밀이라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죽음', '질병', '상해'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비밀일 때, 그러한 기업의 영업 비밀은 '비밀로' 인정할 수 없고, 또 인정해서도 안 된다는 게 당연한 상식 아닐까.
삼성전자에서 일했던 노동자들 중에서 암 등 불치병으로 죽거나, 죽어가는 수가 몇 명이던가. 또 앞으로 죽어갈 이는 몇 명일 것인가. 죽지는 않아도 건강을 잃어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생명력과 활동력을 상실하고 비참하게 사는 이는 또 얼마인가. 자유민주주의라면서, 이런 사태에 대한 공신력 있는 객관적 조사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있던가.
산업재해 '아님' 입증은 사용자 책임
개인의 유전자, 혹은 생활 환경이나 습관의 결과로 치부되었던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죽음과 질병이, 개인적 요인이 아니라 일터의 작업 환경과 물질 때문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어 국가가 운영하는 산업재해보험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일과 관련하여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자의 죽음, 질병, 상해의 원인을 입증할 책임은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한 노동자가 아니라, 그 노동자에게 일을 시킨 사용자에게 있다는 국제 사회의 상식이 우리 사회에도 차츰 확산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노동자가 일하다 죽고 병들고 다치는 것을 '기업 살인(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이라 명명하고, 관련 정보의 실질적 공개는 물론, 책임 있는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왔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 공대 김재정 교수는 "특정 반도체 장비를 어떻게 배치하고, 특정 화학약품을 쓴다는 것은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중요한 기밀"이라며, "삼성은 모든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인 만큼 정부가 기업 경쟁력을 해칠 수 있는 일에는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말한 "특정 반도체 장비"와 "특정 화학약품" 때문에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죽고 병에 걸렸으며, 지금도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지 오래다.
산업재해는 '기업 살인'
LG반도체 연구원 출신인 김 교수는 서울대학교 반도체 공동연구소 표면공정 및 환경연구실장이다. 따라서 그는 반도체 생산 공정에 사용되는 "특정 장비"와 "특정 화학약품"의 위험성과 위해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우리 사회는 삼성전자에 고유한 영업비밀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삼성전자가 연루되었다고 의심받는 '기업 살인'의 비밀, 즉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에 부정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특정 반도체 장비"와 "특정 화학약품"이다.
삼성전자가 관리하고 감독하는 "특정 반도체 장비"와 "특정 화학약품"이 인체에 유해한지 여부에 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고용노동부가 감독한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에 담겼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이 보고서의 공개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 보호라는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포천 고무통 살인 사건
2014년 9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 소재한 한 빌라의 고무통 안에서 시신 두 구가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51세의 여성이 10년 전인 2004년 남편에게 다량의 수면제 등을 먹여 살해하고 남편의 내연녀에게도 수면제(로 쓰고 "특정 화학약품"으로 읽자)를 먹여 반항하지 못하게 한 뒤 목 졸라 살해하여 고무통(으로 쓰고 "특정 장비"로 읽자) 안에 시신 두 구를 유기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이 사건을 재판한 의정부지법의 판사는 "피고인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편이 죽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 (10년이 지난) 현재로선 남편의 사인은 피고인이 자백한 내연남 살해에 이용된 약물을 피고인이 잘 다룰 줄 아는 것을 근거로 약물("특정 화학약품"으로 읽자) 중독사가 가장 유력"하다면서 징역 24년을 선고했다.
단 두 명이 죽은, 그리고 10년이나 지난 사건이지만, 국가는 죽음에 연관된 "특정 장비(고무통)"와 "특정 화학약품(수면제 등)"에 관한 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비밀을 밝혀내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삼성전자 사건은 이미 확인된 죽음만 수십 명을 훌쩍 넘는다.
전자제품 생산 공정에는 여러 가지 '화학약품'이 쓰이고, 그중 일부는 의학적으로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된다. '1급 발암물질'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용자가 자신이 감독하는 노동자에게 이를 사용토록 했다면, 이는 고의적인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다.
'영업 비밀' 말고 '죽음의 비밀' 밝혀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특정 반도체 장비"와 "특정 화학약품"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었고, 그 원인을 규명하려 정부가 작업환경을 측정했고, 그 결과를 담은 보고서가 나온 지 오래다.
대한민국 정부가 노동자에 대한 집단적 살상 원인을 조사한, 그 오래된 보고서를 2018년 오늘에 공개하는 것이 어떻게 '영업 비밀' 침해에 해당한다는 것인지,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조선일보>가 인용한 김재정 교수의 말을 다시 빌리면, "특정 반도체 장비를 어떻게 배치하고, 특정 화학약품을 쓴다는 것은 반도체"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사와 건강이 걸린 중대사다. "삼성은 모든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인 만큼 정부가"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사안에는 최대한 적극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국민이 궁금한 것은 삼성전자의 '영업의 비밀'이 아니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죽음의 비밀'이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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