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3일,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감시의 눈'을 상징하는 조형물에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는 이런 글을 썼다. 그 모습을 세월호 유가족,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2017년 대선 후보, 안전한 나라를 위한 약속식'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행사였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은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뇌종양에 걸려 투병 중인 한혜경 씨를 만났다. 문 대통령은 휠체어를 탄 한혜경 씨 눈높이에 맞춰 자세를 낮춘 뒤, 그의 손을 맞잡았다. "삼성과 반올림 간의 대화 자체가 잘 안 되고 있는데, 정권이 교체되면 꼭 대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이 서명했던 '10대 우선 과제'에는 '화학 물질 알 권리 보장', '중대 재해 기업 처벌법 제정', '안전 규제 완화 중단 및 적폐 청산' 등이 들어 있었다. (☞관련 기사 : 文 "세월호·반올림 챙기겠다"…安 "세월호·가습기 비극 안 돼")
삼성전자 '보고서 비공개' 지시한 백운규 산자부 장관
그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은 아직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926일째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라'며 농성 중이다. 반올림은 삼성전자뿐 아니라 산업부와도 싸워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위원회는 지난 17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대한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가 '국가 핵심 기술'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해당 보고서는 '영업 기밀이 아니고 단순히 작업 환경이 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내용이므로 공개해야 한다'는 고용노동부와 정반대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지난 12일 알 권리와 영업 기밀을 "균형적인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균형적 시각'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삼성전자 편을 들었다. 백운규 장관은 "고용노동부는 노동자의 안전과 국민의 알 권리 등을 고민할 것이고 산업부는 국가의 기밀 사항을 고민해야 하는 부처"라며 "산업 기술이 외국이나 경쟁 업체에 유출될 가능성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백운규 장관의 말은 '가이드라인'이 됐고, 산업부는 그 말을 실행했다. 백운규 장관은 '기업의 영업 기밀'을 지킨 장관으로 보수 언론의 칭송을 받았다.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는 사업주가 작업장 내 유해물질 190종에 대해 노동자의 노출 정도를 '자체 측정'한 결과다. 사업주는 이 보고서를 6개월마다 지방고용노동관서에 제출해야 한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인 이 보고서는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미약하지만 거의 유일한 근거다. 직업병의 입증 책임을 사업주가 아닌 병든 노동자에게 돌리면서, 노동자에게 이런 정보마저 차단하는 것은 산재를 입증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2017년 고등법원은 '삼성전자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는 영업 기밀이 아니고, 산재 노동자와 인근 지역 주민의 안전권을 위해 필요한 정보이므로 공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삼성의 주장과는 달리, 고등법원은 해당 보고서에 단순히 라인명과 공정명이 기재됐을 뿐, 실제 작업과 직결되는 공정 간 배열, 각 공정에서 쓰는 화학 물질의 종류나 성분 등은 적혀 있지 않아 영업 기밀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미국에서는 1970년대에 노동자의 제1권리가 작업 환경 측정 결과와 건강검진 결과에 대한 접근권"이라며 "미국에서는 당사자인 노동자라면 누구나 원본 그대로 보고서를 볼 수 있도록 하고, 밖으로 가져갈 경우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 경우는 대체 정보를 마련하고 지급할 수 있는데, 한국에는 이런 규정조차 없어서 문제"라고 말했다. 영업 기밀을 제외하더라도 노동자의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뒷짐 진 청와대 "노동부-산업부 이견에 청와대 입장 따로 없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이 있는 수원지법 행정3부는 19일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를 공개하려는 고용노동부의 결정에 반발해 삼성전자가 제기한 집행 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희귀병에 걸린 노동자나 유가족들은 보고서 하나를 열람하려고 소송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고용노동부가 산업부의 눈치를 보는 동안 청와대는 뒷짐만 지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20일 기자들과 만나 보고서 공개를 둘러싼 두 부처의 이견에 대해 "저희들이 입장을 따로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라며 "상황 공유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각 부처는 부처의 입장에서 자신의 판단이 있을 것이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법적 절차에 따라서 최종 판단을 기다릴 때까지는" 청와대가 나서지 않을 뜻을 밝혔다.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에게 '화학물질 알 권리를 보장하겠다'던 문 대통령의 약속이 무색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서울 강서구 LG사이언스파크 개소식에 참석해 구본준 LG 부회장을 만났다. 문 대통령은 직접 로봇 방명록도 작성하며 신산업 전시장을 둘러본다. 문 대통령은 강서구 마곡지구를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 치켜세우며 "신기술, 신제품을 가로막는 규제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안전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실리콘밸리는 미국에서 첨단 전자산업이 태동한 곳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공장에서 쓰던 화학 물질에 의한 환경오염 피해가 최초로 알려졌을 때가 1980년대다. 실리콘밸리의 컴퓨터 전문 기업인 IBM 공장에서 일하던 미국 노동자들이 암에 걸렸다고 보고되기 시작했고, '최첨단의 친환경적인 산업'인 줄 알았던 반도체 산업은 후발 주자인 한국으로 넘어왔다. 직업병과 함께.
문 대통령이 이날 만난 구본준 LG 부회장은 LG디스플레이, LG반도체 대표이사를 지냈다. 반올림에 따르면 2018년 4월 9일 기준으로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LCD(텔레비전, 컴퓨터 등의 액정 표시 장치)를 만들다가 희귀병에 걸려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는 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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