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두 전시를 다룹니다. 정재규 전은 이미 종료되었고, 구보타 히로지 전은 현재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정재규 전 2018. 2.2.-3.4. 가나아트센터
구보타 히로지 전 2018. 3. 10-4. 22. 학고재
-정재규 전-
창조성은 우리 자신의 전망과 행위 속에서 존재한다. -제임스 M. 제스퍼-
날실과 시실 사이에 머물다
정재규는 사진을 해체하고 그 틈에 새로운 간격을 만들었다. 갈라선 그 자리, 평면이 아닌 직조가 세운 맥락은 생경했다. 조합된 지면은 다양한 존재면의 맥락으로 귀결되었다. 기계가 만든 세상으로 합류하는 현대사회의 재현을 볼 수 있었다. 프랙탈(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자기 유사성 개념을 기하학적으로 푼 구조) 구조가 반영되어 있는 그의 작품은 세계가 달라졌음을 은유한다.
그가 만든 직조 이미지는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를 다듬어 냈다. 그의 해체된 사진들은 사물의 이상적인 모습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듯했다. 사진은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달리 말해 사진은 시간의 두께를 간직한다.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빛과 어둠은 다른 배열로 거듭날 수 있다. 정재규는 그런 실험으로 작품을 구축했다. 그의 예술 언어는 포착된 세계를 통찰한 것이다.
정재규의 작품은 점을 면으로 가르고 빛을 선으로 갈라놓았다. 당연한 것으로 보인 정지화면은 다른 물체들 속에서 직조되어,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당연함이 당연한 것이 될 수 없는 새로운 질서로 회복됐다.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곳으로 확장된 이미지들은 이질성 속에서 대비된 개념으로 인식된다.
대척점(對蹠點)에서 서로를 보다
"서구의 철학이 실재의 탐구, 즉 참된 것, 진짜의 탐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다채로운 존재론을 낳았으며, 이 존재론들에 입각해 세계와 인간을 보는 눈이 형성되었다." (이정우, 2007: 63)
실재를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면, 진리는 실재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리를 찾기란 어렵다. 우리는 그 진리를 원리를 통해 볼 수 있다지만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보인다는 걸 잘 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보이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근대사회에서 사유는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관계하는가를 묻는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관계 속에서 존재가 형성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정재규의 재현된 사진의 이미지는 탈속되어 다원화되고 상보적인 관계가 된다. 이질적인 차이들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그곳을 점유하고 지배한다.
정재규의 해체는 다양한 '지금 여기'의 관점을 종합했다. 그의 작품은 물질성을 솎아내고 그 자리에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았다. 조밀함을 해체하고 그 위에 대비가 감돌게 했다. 단단한 구조는 잘 보이지 않고 대신 형태를 유추하는 실루엣이 드러난다. 단층이 아니라 중층으로 연결된 음영의 실체는 재현을 잃고 그 자체의 표면으로 지탱한다. 그 스스로의 힘을 담지했다. 정재규는 수직과 수평의 면을 가로질러 각각의 면을 메타적으로 보이게 했다. 여러 면들이 공존하게 하여 일정한 의미 체계를 형성했다. 독점이 아니라, 공유와 협력이 가능한 의미들을 입체화하고 있다. 결코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다양하다. 보는 지점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의미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 있다.
해체되고 함축된
정재규의 이미지들은 비현실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고정된 의미 패러다임은 잠재적으로 해체되어 전체 속으로 압축된다. 재조직된 작품의 화면은 탈 맥락화 되지 않았다. 그의 형상은 새로운 파동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의 사진 재해석은 낯선 감각으로 일축된다. 모빌이 되거나 불국사와 불상을 흩어놓는 식이다. 원형을 잘라내어 낱낱이 하나가 되도록 했다. 독립된 개개 영역은 각각의 의미로 환원된다. 집합 이미지는 이미 상실되어 새로운 결합을 요구한다.
누구나 개입하고 빠지는, 잠시 머물렀다 이동하는 노마드적 움직임은 이미 시작된 듯하다. 각각의 수직과 수평 구조들이 조직해낸 면(面)은 보는 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개체'가 보다 선명하고 다양하다. 새로운 이미지로 종합하고 재구성해낸 정재규의 작업에는 인식 주체가 굳건하게 포진된다. 객관성과 주관성으로 나눠 세상을 보지 않고, 차원의 세계를 응시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이 축조한 시공간은 동시적이다. 각각의 지점에서 각각의 평면에 머물면서 작품은 그 세계를 초월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된 세계를 재현한 것이다. 모든 의미를 갈라놓고 모든 의미망 속에 균형을 포함시킨다. 서로를 간섭하면서 순간의 질서를 획득하려는 행위는 사진의 틀을 벗어난 문제제기로 읽힌다. 수평과 수직의 두 맥락은 우리 시대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그려낸다.
-구보타 히로지 전-
구보타 히로지의 세계
매그넘(Magnum)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구보타 히로지의 50년 작품 활동을 학고재가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회고전으로, 109점이 전시된다. 전시 주제는 모두 여섯이다. 시간 흐름을 따라 초기작업, 세계여행, 컬러의 세계로 조직됐다. 그 다음은 장소다. 한국&북한, 중국, 미국&일본이다. 이 전시는 쉽게 카메라를 들이대어 일상을 채집하는 우리에게 기록과 관찰, 해석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다.
본래 다르면서 다르지 않은 세계는 다큐로 진실을 대변한다. 전시는 미국과 아시아는 물론, 일본의 안과 밖을 두루 소개했다. 그가 포착한 사진에는 자연보다 인물이 더 많다.
그가 주목한 사람들은 '살아있다.' 그들은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주체로 인식된다. 그가 담은 색과 시간 자체가 정체성이라 할 만하다. 그의 세계를 따라가면 그가 전하려는 존재를 조금이나마 탐색할 수 있다. 구보타 히로지의 작품에는 역동의 에너지가 가득해 보인다. 스스로 지키고 견디는 아시아인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주목했다.
"아비투스(habitus)는 명시적인 의식의 표면 바로 아래에 존재한다. 일상적 관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유된 아비투스가 필요하다. 아비투스는 감성이나 직관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자발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자발성이 아비투스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많은 것과 구별시켜준다." (제임스 M. 제스퍼, 2016: 473)
구보타 히로지가 기록한 세계는 아시아다. 아시아와 관계된 사건과 사회 통념, 인간성의 회복에 관여했다. 그가 본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지만, 작품의 내막은 사실에 대한 지각을 담았다. 그에게 작품은 현실이 텍스트가 되고 텍스트가 차이를 만든 무엇이다. 그가 기록하고 수집한 현상은 기존 체계와는 달리 대상을 배치한다. 오래되고 익숙한 경험들은 사건 속에서 새로운 층위를 점유한다. 시간과 공간을 이미지의 좌표로 제시한다. 공간이 선택되고 새로운 시간적 질서 속에서 새로운 현실이 구성된다. 재생산이 생산의 법칙에 따라 연결된다.
결국 그가 선보이려 했던 것은 사람들의 행위다. 그가 건져 올린 자연은 공중의 자연이었다.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미래의 청자를 만들 과거를 수집하고 마주하게 한 것이다.
결국 그가 선보이려 했던 것은 사람들의 행위다. 그가 건져 올린 자연은 공중의 자연이었다.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미래의 청자를 만들 과거를 수집하고 마주하게 한 것이다.
어디를 행로로 정할 것인가
그의 작품 속 아시아는 고정된 과거를 연결하는 세상이 아니다. 현재를 새롭게 해석하는 아시아다. 그가 보여주려 한 것은 탈 중심화를 자처한 대륙에서 반사되는 새로움이었다. 그는 세상과 아시아가 균형을 이루는 세계를 꿈꾸었다.
"매 순간 변하지 않는 의식은 없다. 기억을 갖지 않는 의식이란 없기 때문이다. (...) 만약 현재에 살아남은 과거라는 것이 없다면, 오직 의식의 순간성이 있을 뿐, 의식의 지속성을 의미하는 의식(duration)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신정현, 2018: 267)
그는 도시를 탐험하면서 역동성을 채집했다. 기준은 인간의 자유와 인간성 회복이었다. 그의 관찰 기록물은 그 사회의 가치를 성실하게 담았다. 이를테면 집단 정체성의 탐험이라 할 만하다. 미국과 일본을 교차시키면서 둘의 공통된 시선을 찾고자 했고, 북한과 한국을 경합하면서 그 사회를 통찰하고자 했다.
구보타의 사진에는 여성과 일상,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본 길고 짧은 '호흡'이 담겨 있다. 어떤 영혼이 그 시대를 주도하는가에 그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들이 지켜내려고 하는 그 사회를 담기위한 그의 노력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기란 어려웠다.
구보타는 아시아의 오래된 전통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는 듯했다. 근대와 현대의 새로운 질서가 아시아를 어떻게 작동시켰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인가. 이미 아시아에서 흘러온 커다란 서사들은 현대 사회 깊숙이 숨어들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구보타는 숨겨진 이야기를 소환하려는가. 전시에서 익숙함과 색다름 사이에 잠시 자리한 한반도의 처지를 본다. 미국과 일본은 어떤 이유에서든 더 가깝다. 반면 북한과 한국은 이해관계를 따지며 맞선다. 미국과 북한은 맹렬함으로 팽팽하다. 북한과 중국은 가깝고 친절한 우정의 관계다. 고립될지 모르는 한국은 동남아시아 여러 친구들에게 미국의 우정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우리의 현실을 구보타 히로지의 필름에서 의식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격차를 감지한다. 우리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묻는 사진은 백두산이다. 백두산은 여느 백두산과 닮았으면서도 매우 달랐다. 백록담에 비친 산봉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큰 거울이 되어 '우리 세계'를 드러냈다.
산과 물의 혼합이 보여주듯 백두산과 백록담, 한라산과 동해는 우리의 영혼 깊이 각인된 집단정체성이다. 무의식의 확고한 주인인 우리가 그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는 주문이 되었다.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는 구보타의 작품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야 할 책임을 묻는다. 예술은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훌륭한 역할자다.
꼬이고 비틀린 감정을 풀어내는 집단적 해원이 필요해 보인다. '봄이 온다' 공연은 38선을 넘나드는 새로운 관계의 촉매였다. 구보타의 사진에 압축된 그림자들은 시대의 사고방식을 전환할 때가 왔다고 예언하는 듯했다. 사진에서 아시아를 관통하는 '마음의 틀'이 엿보인다. 남한과 북한은 그간 좁은 문틈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 질감에 서로 놀라 정신이 깨어났을까. 켜켜이 쌓인 간단치 않은 오해들은 백두와 한라, 동해에 흩뿌려야 할 것이다. 시민적 양심을 일으켜 세워 서로를 향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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