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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안의 프랑스 미술, 혁명을 담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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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안의 프랑스 미술, 혁명을 담은 전시

[박물관의 '주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

ㅇ 기간 및 장소: 2017.12.19.(화).~2018.4.15.(일).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ㅇ 전시품: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니콜라이 구리예프 백작의 초상> 등 프랑스 회화, 조각, 소묘 89건

"마치 (...) 세계로 통하는 창문을 조금 열어젖히듯, 무엇인가를 끝까지 설명하지 않고 일부러 조금 남겨 놓는다. (...) 지식으로 어떤 문제들을 밝혀야 한다. (...) 교사는 관찰하는 것과 보는 것을 가르친 학생들에게서 예상치 못한 영리하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들었다." (수로믈린스키의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 중에서)

왜 100년 전 러시아인가?

러시아는 한 때 우리의 우방이었다가 적대국이기도 했다. 냉전 시대에 우리는 미국과 비교되는 소련을 교과서로 배웠다. 미소 간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반공주의의 편이 되어 러시아와 적대해야 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살 길이었다. <예르미타시박물관전>은 러시아 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미술을 전한다. 전시는 프랑스 예술을 가로지르는 고전주의-로코코-낭만주의-인상주의 작품을 아우른다.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예술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러시아에 온 프랑스 미술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의 문화를 러시아 '식탁'에서 맛볼 수 있다. 러시아가 유럽의 예술 작품을 수집한 이유는 분명하다. 더 나은 예술을 위해서다. 그 미술품은 러시아의 음악과 문학, 사람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펼쳐갔다. 러시아가 프랑스의 예술적 가치를 본받으려 했다면, 우리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정치 메이지 유신을 어떻게든 따르려 했다. 우리와 비교된다.

김승익 학예사는 이 전시가 관람객이 러시아를 다시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근대 계몽주의와 혁명의 과정에 예술이 끼친 영향을 탐색해 보라는 소리로 들린다. 러시아와 우리의 관계를 다시 만드는데 예술을 탐색하며 본질에 다가서고자 한다. 이젠 유럽의 러시아와 아시아의 러시아를 이으면서 우리 안에서 우리다움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겨울 궁전'처럼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러시아 사람들도 와서 경기를 함께 했다. 냉전이 아닌 공존과 평화의 기운이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하다.

계몽의 사유를 수집한 제정 러시아

17세기 러시아와 프랑스는 정치·군사적 동맹을 맺는다. 프랑스에 러시아 대사관이 들어서고, 공식적인 관계는 이때 시작되었다. 18세기 표트르 1세는 러시아 전제 군주정을 계획하던 시절 프랑스를 모델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더 강력한 변혁을 원한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강력한 권력 사용 방법을 차용한다. 본격적인 프랑스 학습은 프랑스어를 배운 그의 다음 세대 계승자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황제(1741-1761 재임)에서 시작된다. 이때 프랑스 문화가 선정되고 유입된다. 프랑스 모방이 러시아 문화를 드높이게 된 것이다.

"러시아 문화는 프랑스 문화로부터, 더 넓게는 유럽 문화로부터 가장 뛰어난 내용을 차용하고, 흡수하고, 취했지만, 이것은 더 높은 수준에서의 또 다른 창작 과정이었다." (박종소)

▲ 예르미타시박물관 겨울궁전 내부.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러시아의 프랑스 '따라 배우기' 1세대의 이런 노력은 잠시 주춤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문화 중 계몽주의 사상이 러시아에 유입되는 것을 염려한다. 머뭇거린다.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 고민한다. 지배 이념으로 계몽주의 이념을 사용한다. 독일에서 자란 이 여제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만이 아니라 루소와 디드로 등을 탐구했고, 거기서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인식한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을 꿈꾸며 계몽주의 이념으로 통치의 방향을 설정한다. 프랑스 혁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러시아 상류층은 계몽의 질서에 빠져들었지만, 신 질서는 쉽게 자리 잡지 못했다. 아직 러시아는 계몽의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주의, 자유사상, 평등 이념과 맥을 같이 한다. "인권의 평등원칙"이 계몽의 핵심이다. 계몽주의가 두려웠던 예카테리나 2세는 권좌를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것을 나무랄 순 없다. 그게 정상이다.

1770년대 푸가초프의 봉기로 갈로포비아(Galofobia, 프랑스와 프랑스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번지기 시작하자,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 적대 정책을 실시한다. 두려움의 결과였다. 당시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 정치가 붕괴되고, 나아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는 걸 목격한 예카테리나 2세는 큰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 결과는 1793년 2월 15일, 프랑스인 추방으로 표현된다. 프랑스적 계몽주의는 이런 사정 때문에 한동안 러시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다. 이후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 통치 시기가 되자 프랑스 애호주의가 다시 일어난다. 1850년대 말부터 1910년대까지 프랑스 지식은 러시아 지식인의 문화적 소양이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 문화는 귀족들의 갈망 끝에 러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꿈꾼 혁명의 노래들

러시아 문화와 프랑스 문화가 결합할 때 혁명은 두 나라를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러시아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서로를 비추며 혁명의 역사적 기억에 양자가 동참하게끔 한다. 마치 이들을 엮은 것처럼 '인터내셔널가(歌)'는 소비에트의 국가(國歌)가 된다. 러시아의 참된 사회주의 요람은 프랑스였고, 10월 혁명의 씨앗을 보존한 곳도 프랑스였다는 사실은 오늘 이 전시가 우리 땅에 새로운 의미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국가(國歌)를 낳으며 그들의 자존심이 되었다. 이 둘을 보자. 그들이 외친 불완전한 혁명의 시대를.

▲ 예르미타시박물관 겨울궁전 내부.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인터내셔널가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에 불길처럼 힘차게 타오른다
대지의 저주 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어떠한 높으신 양반 고귀한 이념도
허공에 매인 십자가도 우릴 구원 못하네
우리 것을 되찾는 것은 강철 같은 우리 손...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가 중 일부)


프랑스 혁명가

무장하라 시민동지여
행군하라 행군하라
...대열을 갖추라

신성한 조국애여,
자유 사랑하는 자유여.
너희의 지지자와 함께 싸워라.
우리의 깃발 아래, 승리가
너희의 씩씩한 노래에 맞춰 돌진하리라
... 너희의 승리와 영광을 보도록 (프랑스 혁명가 '라 마르세예즈', 1792 중 일부)

10월 혁명은 실패했고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이들을 사형대에 세우며 그 맥을 겨우 이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 박애는 이들 계몽 '동지' 덕분일 것이다. 자유가 거저 주어지지 않았음을, 이 자유가 지금 이 순간도 위협받고 있음을, 그것을 지켜내기가 여전히 벼랑 끝 상황임을 알지라도 자유의 맛을 본 어떤 이는 결코 물러서지 못하고 자유를 향해 갈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미완의 혁명은 '새로운 말'을 하라고 노동자들을 부추긴다.

▲ 샤를루이 클레리스 <콜로세움>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2월에 시작된 평창 올림픽에서 남북은 한반도가 하나임을 알렸다. 3월에 패럴림픽이 열리는 날, 한반도기는 등장하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권리였다. 일본은 독도 땅을 삭제한 한반도기를 원했지만, 북은 그런 한반도기를 들 수 없다고 했다. 남도 그렇다고 응대했다. 일본은 '그 시절'을 그리는지 모르나, 분명 독도는, 독도는 한반도 동해에 있다. 우리는 확인했다. 우리는 울렁이는 분노를 삼키며 '우리'가 되어가고 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1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스승이 된 프랑스 미술

전시는 6부로 구성되었다. 도입부는 러시아에 찬란한 프랑스 미술이 있는 이유를 밝힌다. 제1부는 17세기의 대표 작가 푸생과 로랑의 작품을 고전주의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제2부는 18세기 로코코 시대 전시로, 조각과 드로잉을 곁들였다. 계몽주의 시대가 열렸다. 제3부는 낭만주의 시대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죽은 말이 있는 풍경>이 등장한다. 제4부는 인상주의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새로운 길을 탐색한 루소도 볼 수 있다. 에필로그는 '어떻게'를 설명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계몽의 질서를 엄격하게 펼친 겨울 궁전에 들어가는 양 아치 복도가 이어지고 창문 밖 풍경이 조화와 정복의 아름다움을 담았다. 전시실 입구 러시아의 겨울 풍경은 생경함으로 가득하다. 건물의 이색적인 색감과 조밀한 기둥들은 새로운 질서를 조각한 듯 내게 다가왔다. 차이코프스키와 무소르그스키도 잔잔한 연주로 등장한다. 예술이 혼을 흔든다.

전시 벽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우리를 바라본다. 어떤 영혼을 찾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곳은 반미치광이들의 도시입니다. (...) 페테르부르크만큼 인간의 영혼에 음울하고 날카롭고 기이한 영향을 주는 곳을 찾기는 힘들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소설 <죄와 벌>(1866) 중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말)

오늘날,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당도한 듯 러시아를 맞이한 한국은 서로의 깊은 정을 내비친다. 100년 전 러시아는 우리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 설움의 땅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무너진 한반도, 그 땅을 다시 이 전시에서 만난다. 옛 러시아 공사관이 손톱같이 남아 정동에 서 있는 여기, 전시장은 고색창연하다. 오래된 궁전답다. 그 안을 누비는 나는 황제가 된다. 그림보다 액자의 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 세월의 무게감은 깊이를 더해준다. 러시아가 프랑스를 존중했음이 명백하다. 그들의 품격은 액자에 고스란히 남아돈다.

▲ 니콜라 푸생의 <십자가에서 내림>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러시아가 본 프랑스 정신

러시아가 초대한 프랑스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운 것은 강력한 과거를 훼손하면서 등장한다. <십자가에서 내림>은 인간과 신, 과거와 현재, 빛과 어둠 속에서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뚫고 떠올랐다. 니콜라이 푸생은 각각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선명하게 그들을 배치했다. 색채는 여인들을 감싼다. 일렁이는 감정이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과 눈빛이 흔들리는 여인, 거대한 기둥 위에 우뚝 서 있다.

17세기 르냉 형제들은 풍속화를 그렸다. <술집의 농부들>에서 그들은 농부들의 식사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단단한 근육이 맨발과 거친 주먹 쥔 손에서 꿈틀댄다. 자연에 가장 가까운 자세로 사람들을 살려낸 농부의 기품이 오롯하다. 땅에서 빚어낸 술, 그들의 장한 사랑이 목을 축이게끔 한다. <번개치는 풍경>은 가스파르 뒤게의 풍경화다. 작품에는 자연을 보는 시선이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표현되었다. 작품 속 번개는 인간을 한 순간에 괴멸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듯하다. 자연과 하나 된 동양의 자연관과 대비된다. 고전주의 미술의 주제가 신과 인간, 자연으로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죽음과 늘 함께 한다. 우리 모두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말하지만, 그럴 순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그런 점에서 살아 있고, 죽어가고 있다. 삶은 죽음 속에서 더 빛나거나 의미를 생성한다. 작품 속 다양한 건장함은 곧 사라질 생명을 은유한다. 살얼음판을 만드는 겨울의 바람이 곧 사라질 것임을 우리는 안다. 자연은 그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꿈꾸게끔 한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의미로 씨실과 날실이 되어 시대를 직조한다.

로코코의 빛깔, 계몽주의

18세기 로코코 시대 미술은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과 그 결을 같이한다. 프랑수아 부세의 <다리 건너기>는 자연을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그는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장식적인 로코코 시대의 빛깔을 실험했다. 청록색 톤의 색조는 빛바랜 레몬과 만나 붉은 산호와 겨룬다. 이탈리아의 풍경이 멀리 얼핏 보인다. 잔잔한 기운이 감도는 길목에 서서 개울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게끔 한다.

샤를 앙드레 반 루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는 부세와 대비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렸다.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에티오피아 왕의 딸인 안드로메다를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 괴물로부터 구하는 장면이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싸움을 전제한다. 물리쳐야 할 정의의 명분은 악이 된다. 페르세우스의 무기는 날개 달린 투구와 샌들, 칼, 메두사의 머리를 단 방패였다. 페르세우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메두사의 머리에서 자라는 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뱀에 눈길만 주어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돌로 변하게 했다는 힘이 나약한 우리를 어딘가에 기대고 싶게 한다. <다리 건너기>가 '저기'로 가는 변형을 시도했다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는 어디서 왔는가를 보여준다.

▲ 프랑수아 부세의 <다리 건너기>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로코코 시대의 동반자 계몽주의는 어떻게 합리적인 이성과 부르주아 공론장인 여론을 만들어냈을까. 18세기 후반 계몽주의 사상은 살롱에서 전파된다. 종교화에서 벗어나 황태자와 총리 등을 감화한 사상은 초상화에 스며든다. 초상화가 주문자를 만족시키는데 열중했다면, 장 바티스트 마리 피에르의 <부엌의 노인>(1745년)은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로 시선이 옮겨갔음을 입증한다. 작품 속 인물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일 것이다.

낭만주의의 서곡, 혁명

샤를루이 클레리소의 <콜로세움>(1760년)은 종이에 과슈(구아슈)와 잉크로 그린 그림이다. 여행이 시작되었고, 그림의 재료도 바뀌었다. 로마의 옛 성전들은 러시아인에게는 유럽을 배우는 새로운 이해였을 것이다.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동경은 프랑스의 혁명 과정을 뒤따라, 러시아인들이 개인을 중시하게끔 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미적 기준으로 낭만주의가 나타난다. 살아있는 것, 위대한 영웅을 드러내는 것에 이 시대의 미술은 멈칫한다. 대신에 우리의 삶과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런 그림을 새로운 가치로 끌어올린다.

▲ 귀스타브 쿠르베 <죽은 말이 있는 풍경>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니콜라이 구리예프 백작의 초상>(1821년)의 검은색과 붉은 색 망토는 마치 혁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낭만주의의 숨겨진 열정들은 소설을 그림에 초대한다. 월터 스콧(1771-1832)의 소설 <골동품의 수집가>의 한 장면을 화가가 해석한다. 폭풍우를 만나 세상을 작별한 젊은 어부 스티븐 머클버킷의 장례식을 화폭에 담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 속 주인공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문학과 회화가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어부가 생전에 잠을 청했던 그 나무 침대 위에 관이 있었고, 그 관속에 시신이 놓여 있었다. 근처에는 부친이 서 있었다." (전시도록, 2018: 57)

낭만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화상>(에밀 장오라스 베르네, 1835년)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화가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낭만주의 덕분이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화가의 일상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이는 삶의 주체로서 자신이 허락되는 시기였다. 낭만주의가 도래했음을 알린 것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시장>(장레옹 제롬, 1884년)의 고발로 이어진다. 이 그림은 <아테네 법관들 앞에 선 프리네>를 이은 것이라 한다. 제롬은 프리네의 '설득의 공식'을 작품에 적용한다. 작품 속 노예는 발가벗겨진 채로 간신히 이마를 가리고 서 있고, 그 곁에는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여자 노예도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들추어내는 이런 방식은 주제를 다루는 색다른 도전이었다.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역설을 읽을 수 있다.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니콜라이 구리예프 백작의 초상>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안나 오블렌스카야의 초상>(1887년)의 주인공은 당시 러시아의 국가평의회 의원이자 상원공작인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오볼렌스키의 아내라고 한다. 19세기 말에 러시아는 프랑스 미술을 안착시키면서 그들의 현재를 담고자 했다. '안나'의 초상에는 당당한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의 숨결이 느껴진다. 붉은 원피스와 연분홍빛 한 송이 장미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백만 송이 장미'의 리듬을 떠올리게 한다. '안나'는 묵직하고 그윽하게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은 흔들리지 않고 존재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입 매무새는 단정하다 못해 엄격하다.

<목표를 향해>(알프레드 부세, 19세기)는 세 명의 운동선수가 경쟁하며 달리는 모습이다. 청동으로 주조한 이 작품은 19세기에 스포츠가 주제가 된 첫 작품이라 한다. 19세기 말의 사회적 변동을 역동적인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남성다움은 앞으로 향해 뛰는 동력으로 포착된다. 그들의 긴장이 20세기를 격동의 전쟁으로 몰아 간 것은 아닐까.

색의 향연, 인상주의

마지막 4부에서 인상주의는 클로드 모네의 <자베르니의 건초더미>에서 시작된다. 1883년 지베르니 시골에 정착한 모네는 도시의 환상을 깨고 농민과 농촌의 숨결에 가담한다. 지베르니의 손때가 묻은 건초더미의 변화를 색의 향연에 담는다. 시시각각으로 포착되는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붓질을 따라 실린다. 이런 숨결은 <푸른 주전자와 레몬>(앙리 마티스, 1896-1897)에서 두드러진다. 마티스는 사물을 '빛에 의지하는 존재'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낯선 이들'은 여전히 어디선가 새로운 탈출을 시도한다.

▲ 클로드 모네의 <자베르니의 건초더미>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방브 수문 좌측의 방어시설 경관>(앙리 루소, 1909)은 어눌해 보였다. 파리 미술관 단골이 된 그는 스스로 대상을 읽어내는 새로운 관점을 갈고 닦았다. 루소는 비로소 자신을 찾았고 그 안에서 간결한 무게중심을 유지해 나갔다. 수문에서 루소는 물품세를 징수했다고 하니, 그가 머물렀던 그곳은 명소로 우리 앞에 남아 또 다른 루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전시의 모든 것은 <겨울궁전>(베르나르 뷔페, 1992)에서 함축된다. 쭉쭉 뻗은 대나무 숲을 형상화한 것처럼 궁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강을 지켜보고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듯 강물 앞에서 건물은 자신을 비추며 우리를 바라본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 동안 우리가 이룩했던 것에 관해 말하기보다, 서로를 듣고 가슴에 품는다. 아량이 물안개처럼 번진다. 그렇게, 예르미타시 전시는 '평화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하다.

▲앙리 루소<방브 수문 좌측의 방어시설 경관> ©The State Hermitage Museum, Saint-Petersburg, 2017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김승익 학예사의 반가운 시도들

전시 기획은 새로운 이야기로 관람을 안내하는 것이다. 김승익 학예사는 예르미타시박물관의 '깊은 우정'을 담고자 했다. 에필로그에서는 러시아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한다. 작품이 어떻게 전시되었고, 누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보여준다. 내막을 보여주는 친절함이 돋보인다. 시와 소설, 음악이 관람을 풍부하게 이끈다. 러시아를 이해하는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전시장은 고요했고, 나는 혼잡하지 않은 감상을 즐길 수 있었다. 새로운 시도를 한 것도 볼 수 있었다. 작품 곁에 질문이 있다. 무슨 질문인가 보았더니, 어린이를 위한 감상 질문이다. 질문은 예를 들어 <십자가에서 내림>에서 이렇게 던진다.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해 보세요.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나라면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현해 보세요."

이런 질문이 어른과 아이의 감상에서 한 자락을 차지하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결과, 낯설어서 그런지 그런 질문에 답하려는 어른과 아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 시도한 것이라 그럴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여전히 뮤지엄 리터러시(museum literacy)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박물관의 민주주의

박물관은 지역 커뮤니티에 봉사해야 한다. 박물관 윤리강령 제6항은 "박물관은 그들이 봉사하는 지역 사회뿐만 아니라, 박물관의 소장품이 유래한 지역 사회와도 긴밀히 협력하여 활동한다"고 했다. 이는 지역 사회에 대한 존중의 책임을 말한다. 이 전시는 처음으로 소위 체험학습 업체인 소규모 관람 단체를 막았다. 그 이유는 전시실에서 설명하는 소리, 즉 소음이 발생해 다른 관람자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전시 공간은 시민이 공적으로 공유하는 공공재다. 이 공간에서는 관람자들 스스로 조정하고 배려하는 관람 질서와 태도가 중요하다. 국가는 전시 공간에서 관람자들 스스로 자율적으로 조율하는 관람을 원치 않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관람 단체 금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소위 사교육업체로 분류되는 소규모 단체 관람객들은 박물관에서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듯하다. 이들을 대하는 박물관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수렴된다.

첫째, 지금은 예약제로 운영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문하는 소규모 단체는 명부에 이름을 적어야 했다. 이름을 적고 나면, 지정 번호의 스티커를 교사에게 제공한다. 교사는 가슴에 그 번호를 붙이고 전시실에 입장하게 된다. 이런 정책은 방문 단체에게 일종의 검열로 비쳐지기도 했다. 이때 교사는 이름으로 불리기보다는 번호로 불리게 된다.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번호로 부르는 곳은 수용소라는 생각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둘째, 이들 단체들은 소위 사교육 단체로 폄하된다. 박물관은 평생 교육 기관이다. 박물관에서의 교육은 국가가 시행하지만, 정규 의무 교육의 체계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를 사교육이라 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교육 행태는 평생 교육이라 부르는 게 맞다. 평생 교육을 받는 소규모 단체 학생 대부분이 초등학생이다. 이들은 학습권을 실천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들에게 국가는 학습권 실현을 위해 공공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

박물관의 공적 초대

이들을 통제하기보다 이들에게 어떤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지 고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태도다. 이들 단체들은 국가가 박물관에서 시행하는 정책 설명을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박물관도 목격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들 단체의 교사들을 초대해 필요한 지식과 전시 기획 의도 등을 안내한다. 이 박물관의 학예사는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학예사도 단체의 교사들에게서 배웠어요"라고 말했다. 박물관은 담론의 장소라고 한다. 박물관에서 활발한 소통이 일어나는 것은 적절하고 필요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그런 토대가 되는 곳이면 좋겠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박물관이 혼잡해 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어쩌면 즐거운 비명이다. 박물관 전시 공간이 혼잡해 진다고 방문객을 통제하고 줄이기보다는, 전시장의 전시물을 줄여 넉넉한 관람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어떨까. 박물관은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유물의 보존과 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의 최종 목적은 관람자의 교육을 향해 있어야 한다.

박물관을 어린이 학습자를 동반해 찾는 단체들은 왜 생겨난 것일까. 여러 맥락이 있을 테지만, 박물관과 학교 교육이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탓이다. 체험 학습 단체는 사적 이익을 취하기도 하겠지만, 크게 보면 그들은 박물관-학교 공교육이 메우지 못한 그 격차(Gap)를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체험 학습 단체들을 문화 교육의 파트너로 생각하면 좋겠다. 사설 단체 난립이 계속 문제가 된다면, 박물관이 교육적 수요를 직접 감당하면 된다. 즉 모집은 박물관에서 하고 몇몇 단체에게 교육을 위탁하면 될 것이다.

국립박물관의 통제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협력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어떤 기관이건 간에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이해 관계자 간 상호 존중과 대화, 협력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선진 국가의 책임이고, 시민의 책임이다. 민주주의는 시간이 걸리고 시끄러운 것이라 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 본격 민주주의가 현장에서 살아나야 한다. 이 깨달음이 너무 늦게 현장에 도달했다. 헌법 가치를 문화 교육 기관인 박물관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은 차세대에게 민주주의가 뭔지를 촛불이 아니라, 대화로 격조 있게 가르치는 방법이다.

교육적 시도, 전시감상 가이드

이 전시에 딸린 워크북은 3000원에 현장에서 판매되었다. 이 전시 감상 가이드에 새로운 시도가 도입되었다. 게임을 활용한 전시 감상이다. 이 가이드북에 어른들이 설명해 줄 학습지도안이 없어 아쉽다. 하지만 작품 설명이 맨 마지막 페이지에 소략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 워크북의 용도는 작품과 대화하는 방법을 알리는 것이다. 소위 '감상법'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알 수 있다. 질문은 전체 4부의 전시를 감상하기 전에 하는 활동과 작품을 감상하면서 하는 활동, 작품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재구성 활동으로 조직되어 있다.

가이드북의 형식은 전시 섹션 별로 하나의 작품을 제시한 뒤 질문에 답하는 식이다. 관람자가 스스로 작품을 선택하게 한 다음, 그 작품에 관해서 말하도록 설계되었다. 지시문과 발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
작품명 : 십자가에서 내림
작가 : 니콜라 푸생

(작품의 절반은 빈 채로 제시된다. 모든 질문은 영문으로도 제공된다)
1. 빈 부분에 어떤 장면이 그려져 있을지 상상한 뒤 작품을 확인해 보세요.
2.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해 보세요.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3. 나라면,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현해 보세요.
4. 작품 전체를 살펴보세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

분위기가 비슷한 작품을 하나 골라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 나눠 보세요.
1. 어떤 작품을 골랐나요?
2. 누구의 작품인가요?
3. 이 작품을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4. 작품 속 이야기를 상상해서 적거나 그려보세요.
-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 어떤 장면이 그려져 있나요?
-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모든 질문이 이렇게 제공되지는 않는다. 제3부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 지시문은 "등장 인물이 1명인 작품을 하나 골라보세요"다. 작품의 이름과 작가를 묻고 작품 속 인물의 표정에 대해 질문하고 따라해 보라한다. 그 다음 어떤 물건이 있는지를 관찰하게 하고 인물의 성격을 도형으로 표현하라 한다. 마지막으로 액자의 틀에 같이 온 가족이나 친구를 그려 넣으라 한다. 그 다음 작품명과 작가, 특징을 적도록 했다. 20년 후 작품 속 인물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생각해 보라한다.

마지막에 제시된 게임은 가위바위보로 말을 이동하면서 과제는 "인물이 1명인 그림에서 인물의 특징을 3가지 말하기, 인물이 2명 이상인 그림에서 인물들의 대화 상상해서 말하기, 조각상 몸짓 따라 하기, 풍경화에서 풍경을 3문장으로 설명하기"다. 마지막으로 감상 가이드에 등장한 작품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지면이 제공된다. 맨 뒷장에는 기억에 남는 작품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떠오른 단어, 무엇을 보았는지, 생각한 것과 궁금한 것만이 아니라 작품 감상의 경험을 묻는다. 마지막으로 전시장에서 예르미타시로 가는 항공권에 도장을 찍게 안내한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미술은 사회를 낳고

이 전시는 프랑스 미술을 러시아가 보여주는 방식이다. 미술은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생각이 바뀌고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면 사물을 보던 방식도 달라진다. 각 섹션의 제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로코코 계몽의 시대,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 관계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로코코와 계몽의 관계, 혁명과 낭만주의의 관계가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되면 더 좋겠다.

감상 가이드는 작품은 가까이에 두었으나, 그것의 맥락은 놓쳤다는 생각이다. 왜 시대 구분을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적어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개념은 제공되어야 한다. 왜 그 시대의 특징을 낭만주의라 하고, 왜 그 시대에 그 두 나라가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그 현상을 어떻게 작품에 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전시 감상 가이드가 어린이 편에 선 것은 좋아 보이나, 그들이 알아야 할 당시 러시아와 프랑스 사회는 쏙 빠져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계몽주의가 무엇이고 러시아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아마 핵심 개념들이 감상 가이드에서 사라지게 된 데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교육기본법의 '교육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내 생각이 오해이기를 바란다.

"제6조(교육의 중립성) ①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육의 중립성은 교육이 "정치적, 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이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학습자를 박물관에서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문화와 예술에서 더 잘, 더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이 전시 감상 가이드에서 우리 사회의 슬픈 프레임을 본다. 이것은 언제 사라질까. 교육자들이 이런 한계를 벗어버리려면 어떤 용기가 있어야 하나. 국가가 아직도 교육을 가두어두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이런 현상들은 반복될까. '관찰하는 것과 보는 것'을 잘 가르치는 방법은 학습자로 하여금 철학적인 문제들에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접했던 아이들은 그 질문에 힘입어 사고 확장의 기회를 얻는다. 어린이라 할지라도 작품에 담긴 정신에 자신의 정신을 얹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 과거를 조우(encounter)하게 할 때, 인간은 그 의미로 성숙해 진다. 문화와 예술은 그런 만남을 이야기할 책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와 예술을 전시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좀 더 용감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말을 대변하자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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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숙

교육학박사. 성공회대 연구교수. 박물관의 전문직인 정학예사. 박물관교육의 새로운 교육콘텐츠를 개발하는 기관 <새롭게보는박물관학교> 대표. 박물관은 일반대중들에게 아직은 낯선 곳이다. 박물관에서 성찰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안내하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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