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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변신, 혹은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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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변신, 혹은 재발견

[박물관의 '주름'] 대림미술관<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전

-대림미술관<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전-

ㅇ 기간 및 장소: 2017.12.7.~2018.5.27
ㅇ 전시품: 별빛, 바람, 햇빛, 시가 함께하는 페이퍼 아트

"세계는 누군가에게 나타난 무엇이다. 세계란 언제나 그것을 대면(對面)하고 있는 특정한 인식 주체의 조건들에 드러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이정우(<세계의 모든 얼굴>(한길사 펴냄) 중에서)

"네 잘못이 아니야"로 시작된 세계

우리 사회는 최근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 "여자가 그래서야..."하는 통념을 깨고 "남자가 그래서야..."하는 발언이 세상의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 하나 큰 특징은 당사자만을 주목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는 미투가 이전의 유사발언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미투운동의 맥락은 세계를 새로운 장으로 끌어들였다.

▲ 타히티 퍼슨(Tahiti Pehrson)의 작품. ⓒ사진제공=대림미술관

미술은 다양한 재료로 새로운 세계를 여는 행위다. 신석기 시대 여성의 몸이 생산을 기원하는 신성이었다면, 오늘날 여성의 몸은 다양한 맥락에서 언급된다.

전시를 보는 사람은 전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자 한다. 대림미술관은 경복궁 서쪽 담장 밖이다. 궁궐이 빤히 보이는 그 길 곁에 종이가 선물이 되는 전시가 열렸다. 제목은 '너를 위한 선물'이다. 선물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선물 개념 안에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다. 선물은 서로를 보는 행복이다. 이 전시에서 'present'는 명사로 선물일 수도 있고, 형용사로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중의적인 의미로 'present'를 쓴 것이 아닐까 싶다.

▲ 토라푸 아키텍츠(Torafu architects)의 작품. ⓒ사진제공=대림미술관

종이의 용도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종이컵은 편리함의 대명사로, 휴지는 위생을 담당한다. 흰 종이는 '사유의 공간'이 된다. 우리는 종이는 씀으로써 종이를 지배한다. 그러나 종이가 되는 행위는 종이를 존중받는 예술이 되게끔 한다. '너를 위한 선물'전은 지친, 혹은 슬픈 너를 위한 전시인 듯하다.

기획자는 이 전시에서 종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예술가에게 종이는 소재가 될 수 있다. 학자에게는 생각의 바구니다. 이 전시는 종이가 얼마나 우리 가까이에 있는지, 어떤 일을 가능케 하는지를 보여준다. 일종의 '종이의 설득'이다. 종이가 쓰이는 다양한 방식의 은유를 본다. 전시는 종이와 사람의 관계를 묻고 있다.

종이의 탄생

전시 공간은 종이의 변신을 보여준다. 일상의 종이가 새로운 창조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종이가 색을 입고 공간을 입힌다. 꽃이 되거나 커튼이 되기도 한다. 종이들은 접히거나 늘어지거나 뚫려서 빛과 바람을 소통시킨다. 종이는 과거 몸이었던 그 나무의 향기도 담아냈다. 펄프의 은은한 향기는 과거 나무가 그랬듯이 나무의 숨결로 이야기했다. 나무가 자람을 멈추고 종이가 되고자 했을 때의 헌신하는 모습이 전시에 비친다.

종이는 귀하지 않다. 종이가 귀하지 않은 이유는 종이처럼 흔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종이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종이는 그저 종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종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종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생각을 어떻게 전했을까.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종이가 몸을 바꿔 우리에게 말한다. 종이는 보이지는 않지만 보여야 한다고.

▲짐앤주(Zim&Zou)의 작품. ⓒ사진제공=대림미술관


종이학을 접었듯이

1세기에 탄생한 종이는 문명의 시작을 알렸다. 종이는 기록을 담당했다. 세월이 흘러 20세기, 종이는 예술의 소재가 된다. 내가 만난 탐난 종이는 교과서다. 역사부도 교과서다. 컬러를 담은 그 교과서는 충분히 날 유혹하고 남았다. 그 전의 종이들은, 특히 1945년 일본을 내쫓고 난 자리에서 만난 종이는 거칠다. 미군정기 종이는 그나마 괜찮았으나 다시 전쟁을 맞은 시대의 종이는 거북이 등껍질 같았다. 북한자료관에서 만난 고난행군기의 종이는 옥수수 껍질이 글자와 나란하다. 이럴수가. 종이도 나라의 형편을 담는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전시는 모두 일곱 분야로 나뉜다. 종이의 물성을 살려낸 작품을 시작으로 구멍을 뚫는 작업으로 이동한다. 그 다음에는 동서양의 흐름을 따르는 빛과 색의 향연을 관람한다. 종이로 다시 일상을 살펴본 뒤 유명 브랜드의 스튜디오를 재현하고, 마지막으로 동화의 세계로 들어가 갈대숲의 추억을 되새기며 전시는 마무리된다. 작가의 작품을 따라가 다시 보면 그들이 만든 의미들은 이렇다.

종이만을 접고 꼬아 층을 만든 리차드 스위니(Richard Sweeney)는 종이의 자유를 연상케 했다. 종이에 바람을 초대한 타히티 퍼슨(Tahiti Pehrson)의 작품은 대나무 바구니들처럼 새로운 각도를 만들어냈다. 아틀리에 오이(Atelier Oï)는 일본의 펄프로 꽃을 피운다. 봄꽃이 피어나는 향연이 된다. 짐앤주(Zim&Zou)의 종이는 새의 깃털로 거듭난다. 그 깃털들은 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았다. 완다 바르셀로나(Wanda Barcelona) 역시 종이로 나무숲을 만든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 우리를 묻었다. 마음 스튜디오(Maum Studio)는 작품을 통해 다시 우리의 손을 잡고 갈대밭을 거닌다.

전시된 종이는 종이의 한계를 넘어섰다. 종이가 고작 종이컵이나 휴지로 머무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종이는 너른 몸을 내밀어 누구든 새로운 생각이 되도록 했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었지만 그동안 돌보지 않았던 종이의 새로운 모습을 본 관객이 반성케 했다. '종이가 있었구나. 그 종이가 우리 곁을 지켜주었구나'하는 깨달음을 주었다.

전시는 동서를 연결했다. 과거로부터 온 우리의 종이를 초대했다. 오늘의 우리를 종이로 연대케 했다. 거기에는 그들의 손길이 어떻게 '우리'를 만들어가는 지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아닌, 혹은 우리가 되기 어려운 그 너머를 그려내고자 했다. 우리의 환경, 우리의 과거, 우리의 미래를 담아내고자 했다.

전시가 우리에게 의미를 줄때는 그것이 나의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야 한다. 어떤 이는 갈대밭을 연상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그것은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이 현재의 속 깊은 관계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위로가 되는 향기로, 위로가 되는 음악소리로도 들렸다. 전시는 이렇게 깊은 그러나 부드러운 안전지대가 되고 있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었어. 우리가 함께 노력할게. 더 나은 세상은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아. 우리가 노력하면 될 수 있어. 끝까지 함께 할게. 너와 나는 다르지 않으니까." 그런 목소리가 잔잔하게 마음을 일으켰다.

미술관은

전시큐레이터 한정희 실장은 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을까. 큐레이터는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걸까. 큐레이터가 보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미술관은 정신을 담는 보루다. 정신을 살려내는 곳이 미술관이다. 미술관은 화려함보다는 깨달음, 관계를 맺는 장소다. 미술관이 살아있는 이유는 큐레이터가 혼을 일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관의 사회적 책임은 미술의 혼을 나누는데 있을 것이다.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불러와 우리 앞에 당도하게 하는 것, 그것이 미술관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림미술관의 정신은 무엇일까. 새롭게 이 세계를 대면케 하는 것이 아닐까. 주변에서 중심으로 끊임없는 해체를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미술관은 그래서 더 낮은 곳에서 더 많은 대중을 손잡아야 하는 것이지 싶다. 대림미술관은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데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화려함에 대중이 끌린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면 대림미술관이 대중의 마음을 읽고 있지 않을까?

▲마음 스튜디오(Maum Studio)의 작품. ⓒ사진제공=대림미술관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는

미술관은 관람객이 전시장 입장권을 구매할 때 뽑기를 하게 했다. 나도 그 중 하나를 뽑았다. 코딱지 같이 작은 종이스티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마지막에 제출했다. 돌아온 상품은 이랬다.

"접으면 접히긴 하더라."

이 말들은 추첨을 통해 선택된 것이다. 현재를 사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말들이다. 마음까지는 빼앗기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응원이 들어있었다. 이를 만든 이가 누구일까. 선물이 되고자 했던 전시기획자의 용기였다. 나 역시 그 말을 잡아든 순간, 마음속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꾸 떠오르는 생각을 접고자 하면 접히더라"로 응대했다. 힘을 주는 전시다. 지치고 도망치고 싶은 젊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전시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접을 건 접고 살린 건 살려야 한다. 모두를 접을 수 없고 모두를 내줄 순 없다. 지킬 것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 응원은 전시장 바닥에도 시로 남아 있었다.

"꽃에 흔들이는 여린 줄기가 아닌 단단한 밑동으로 꽃을 보듬어 주는 나는,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오밤 이정현 <달을 닮은 너에게> '꽃을 피우는 나무'중 발췌-

전시를 보는 교육에서

전시는 보는 경험이다. 보는 경험 뒤에 듣는 경험이 뒤따라야 한다. 전시를 본다함은 전시를 생각한다는 말과 같다. 교육은 전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시가 교육에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하는 까닭은 전시가 흘러가지 않고 마음속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전시가 열리고 교육이 그 곳에 간다. 질문이 생각을 끌어낸다. 그 질문들을 탐색한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한 것일까 상상하며 작품 제목 유추해보기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기
-섬세하게 커팅된 종이와 그 사이를 투과하는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전시장에 설치된 시와 함께 감상해보기
-무엇이 보이나요? 작품을 보니 무엇이 떠오르나요?
-제목과 어울리게 작품이 잘 표현되었나요?

교육에서 발문은 사고의 시작이다. 질문을 받은 학생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 경험이 현재 경험과 연결되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작품 감상은 생각을 머물게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작품 속에서 찾아야 하지만, 작가의 세계 속에서만 그 답을 찾아서는 안 된다. 감상자(학습자)의 내면에서 그 답을 찾도록 해야 한다. 그 작품이 너에겐 어떤 의미인가를 묻고 찾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리차드 스위니(Richard Sweeney)의 작품. ⓒ사진제공=대림미술관

발문에서 보이는 독특한 접근은 작품 제목 유추에서 시작한다. 제목은 사고의 총합, 의미의 총합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의 연결점이다. 제목은 의미의 구성체로 사고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작품과 제목, 표현과 생각의 변화를 위 질문은 담아낸다. 학생들은 보는 행위를 통해 작품에 들어간다.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을 볼 것인지, 무엇을 보이게 할 것인지는 교육에서 중요하다. 교사들은 작품을 보는 과정에서 '무엇'에 주목했다. 무엇을 표현했고 무엇을 주목했는지에 따라 학습자들의 반응은 다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보는 위치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정된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여 보는 것이다.

▲완다 바르셀로나(Wanda Barcelona)의 작품. ⓒ사진제공=대림미술관

교사는 어디에

교사는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 발문은 교사의 시각을 반영한다. 흔히 감상교육에서 발견되는 발문은 표현된 것,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이 빗나간다. 보이지 않는 것에는 무엇이 포함될까. '보이지 않는 것'은 표현되었으나 표현 그 이면의 시작점과 과정, 작가의 마음을 읽어야 비로소 보인다. 교사는 학습자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 단계를 벗어나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세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세계를 읽으면 작품의 위치를 보게 된다. 작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이 외치는 함성을 들을 수 있다.

교사의 감상은 학습자의 시선도, 예술가의 시선도, 큐레이터의 시선도 포함해야 한다. 교사의 감상이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고 보면, 교사는 학습자의 무엇을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 세계는 아직도 발전을 좋은 것이라고 보지만, 발전의 반대, 후퇴와 실패는 좋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실패하면서 욕심을 비우고, 좌절하면서 그 마디만큼 큰다고 보면 발전은 양적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놓치는 것은 '왜'에 대한 질문인데,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문화가 이미 우리를 사로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갈 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 정한다. 이를테면 '애들은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이다. 현실에서 떨어져라, 배워야 할 것은 학교에 다 있다, 청소년은 학생의 본분을 다해라는 식이다. 학교는 과연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을 모두 잘 가르치고 있나?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에서 빠진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빠져버렸는가를 교사들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교육프로그램 '해피칠드런'의 교육과정. ⓒ사진제공=대림미술관

인간은 가능성을 꿈꾸는 존재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발견해 나가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미술관 학습의 의의는 인간에게 각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묻고 답하는 시간이 되게끔 하는 데 있다. 발문이 존재를 발화시키는 것이면 좋겠다.

미술관은 다른 곳과 달리 영감의 장소여야 한다. 미술관은 다른 곳과 달리 어떤 생각이든, 어떤 사고든 가능케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미술관은 새로운 탈주의 장소다. 뭐든 가능하다는 말을 상상하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상상과 탈주의 경계는 분명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무턱대고 상상해서는 주체를 잃어버린다. 상상을 제한하고 깊이 들어가는 탐구가 되어야 한다. 미술관에서의 질문은 작품을 존재와 마주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작품이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우리 세계를 어떻게 불러내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작품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옮겨놓은 장치다. 멀리, 그리고 깊이, 변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큰 흐름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재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 우리를 만드는가,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에 맞닿게 하는 것, 그것이 미술관이 해야 할 발문일 것이다. 표현에 한정 있는 질문은 그들을 흔들어 놓기 어렵다. 그들을 흔드는 큰 질문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교육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탐구하는 것이다. 교육이 미술관에서 행해질 때 질문의 폭과 깊이, 높이는 존재의 무게에 달려있다.

종이의 유희, 그 다음

종이가 접히고 꺾여 우리의 마음을 표현할 때 우리는 뿌듯하다. 종이가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때 우리는 만족한다. 그러나 그 만족 뒤에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미술관은 상징을 통해 이야기한다. 종이의 유희는 상징의 세계다. 관객을 다음으로 이끄는 교육은 상징 속에 푹 빠뜨리는 작업이다. 후설은 이렇게 우리 세계를 말한다.

"후설의 '지향성(intentionality)'개념을 따르면 모든 인식주체는 고립적이고 자기완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무엇과의 필연적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 생활 세계는 너와 나의 삶이 상호주관적으로 연결되는 질서이기도 하다. 개인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모든 사회제도가 마련된다. (...)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다른 개인과 언어, 그리고 기타 상징을 통해 서로의 의사를 나눈다. 나의 주위 세계에 대한 어떤 지식은 나의 사적 의견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내게 주어진 지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기원을 갖는다." (하상복.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읽기> 중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의 공론장이 지각변동만큼 흔들린다. 어떤 공론장이 될 것인가는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고 어떻게 그것에 관계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미술관은 그런 공론장에 감정을 나누고 그 결을 더 공감하게 하는 장소다. 전시를 이루는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시대를 읽는 공감자다. 이 전시에서 큐레이터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만들었다. 분명하게도 나는 그런 지친 사람 중의 하나였고, 이 전시에서 용기와 희망, 새로운 상징을 읽고 새 기운을 얻었다. 위로가 되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달콤한 지지와 관계가 필요할 때 처방약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전은 마음을 위안하고 휩쓸리지 않는 '나'를 세웠다.

잘 접히고 잘 꺾이고 잘 젖어드는 종이와 같은 우리 영혼에 기운을 불어 넣은 전시였다. 예술이 되는 삶이 거기에 있다고, 우리 모두는 예술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중이라고 전시는 읊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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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숙

교육학박사. 성공회대 연구교수. 박물관의 전문직인 정학예사. 박물관교육의 새로운 교육콘텐츠를 개발하는 기관 <새롭게보는박물관학교> 대표. 박물관은 일반대중들에게 아직은 낯선 곳이다. 박물관에서 성찰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안내하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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