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중대한 그의 사명이 없다면 당장에 이 문을 두드리고 이 공장 안이 벌컥 뒤집히도록 떠들어 이 사실을 여공들 앞에 폭로하고 싶었다."
<인간 문제>의 여주인공 선비는 자신을 상습 성폭행하던 시골의 지주에게서 탈출하여 인천의 방직공장에 취직하였다. 선비의 주인은 '딸 같아서', '공부 시켜주겠다'는 빌미로 안마부터 시작해 상습 성폭행을 가한다. 선비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아들을 낳아 첩실의 지위를 가질까 잠깐 고민도 한다. 그러나 주인집 모녀의 학대와 남자의 성적 착취로부터 결국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가부장제 봉건사회에서 인간 대접 받지 못하는 하녀 노릇을 탈출한 선비는 자본주의 도시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빈민이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공장 감독들 역시 여성 노동자를 희롱하거나, 밤마다 숙직실로 불러 성적으로 착취한다. 더욱 조직적으로, 더욱 거대하게. 고향을 떠나며 일차적으로 봉건사회라는 무대를 벗어나고, 더불어 주인의 성적 착취에서 탈출한 경험을 통해 성장한 선비는 이 방직공장에서 그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는 여성 노동자 간의 연대로 저항할 방법을 모색한다. 폭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한 뒤, 결국 자신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최후에 선택하는 수단이다. 선비는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에 '아직' 폭로하지 않는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강경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는 문제는 21세기 여성들에게도 펄펄 살아있는 주제다. 선비가 홀로 폭로하지 않고 조직 활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던 시도는, 결국 선비의 죽음으로 좌절되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선비들이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성폭력 폭로가 터져 나왔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날 수 없다. 이 글에서 일상적 성폭력에 대한 모든 원인을 파헤칠 수는 없다. 주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돈을 교환하는 젠더 권력에 한정한다.
1. 개인의 용기와 저항에 기댈 수 없다
내가 성희롱이 법정에 설 수 있는 문제라는 구체적 개념을 확실히 인식한 시기는 대학교 4학년 때인 1999년이다. 당시 서울대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성희롱 개념이 많이 논의됐다. 일상에서도 성희롱 개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저 돈 얘기만 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성희롱에 벌금을 물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빈정 상한 듯, 오히려 여자들 앞에서 '이거 걸리면 얼마냐' 따위의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성희롱이 명백히 죄라는 인식을 적어도 형식적으로 공유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꽤 중요한 문제였음을 고려하면 변화는 일어났다. 1994년 제정된 성폭력 특별법도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수많은 발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꾸준히 만들어낸 균열이 더는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조를 흔들고 있는 게 지금이다. 여성들이 일으키는 역사의 파도가 꾸준히 있었고, 지금 이 순간은 파도가 조금 더 높이 치솟는 중이다.
그러나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하는 언어를 모르던 시절에도 '집적대기' 앞에서 내게 일어나는 선명한 불쾌감은 있었다. 왜 짜증나게 비비적대지? 왜 남의 옷을 들춰? 날 뭘로 보는 거지? 이런 '화'가 치솟으며 곧장 그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그럼, 이렇게 불쾌감을 표현했을 때 과연 괜찮기만 할까. 가해자들이 반성하고 물러났을까.
가해자는 조용히 퇴각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여성과 소수자의 감정이 틀렸다고 꾸준히 가르친다. 감정적이라고, 피해의식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정당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게끔 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자들의 감정을 무시하기 위해서다. 그 감정 속에 실은 많은 진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내 옷을 들췄던 미술학원 선생에게 그 자리에서 곧장 따지던 날, 나는 따로 불려가서 혼났다. 어디 감히 선생을 '그런' 사람으로 보느냐! 나는 그를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내가 예민했다는 표현을 한 후에야 안전하게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겪은 최초의 '진압당한 저항'이다.
내 20대의 좌충우돌 속에는 이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인지하기, 대응하기, 그러나 내가 과연 잘 대처했는가 복기하기,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걸 그랬나 후회하기, 내가 거길 왜 가고 그 사람을 왜 만났을까 자책하기에 이르는 숱한 순간들이 뒤범벅되어 있다. 문제제기 했을 때 혹시 내가 세련되게 대응하지 못한 건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다. '문제 일으키는 사람'이 되니까.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해 주겠어', 십수 년 전 전화기에서 울리던 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미친 년'이라는 낙인은 덤이다. 꼭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이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좁쌀만큼이라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가진 그 약간의 우월한 지위를 뻥튀기해서 대폭 활용한다. 단편적 사건에서 벌어진 개인의 저항 정도를 검증하며 개개인의 각개전투를 독려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이는 지극히 가해자 중심의 사고다.
저항을 기준으로 두면 곤란한 이유가 또 있다. 가해자가 "연애감정 있었다"(배우 오달수)라고 말하는 모습은 꽤 익숙하다. 성폭력 피해자가 혹여 자신의 상황을 주변에 이야기했을 때도 크게 도움을 받지 못한다. 꼭 피해자를 비난하는 전형적인 사례 때문만이 아니다. '니가 인기가 많아서 그래'라는 말로 폭력을 연애감정으로 곱게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애써 이해하려고 한다. 굳이 피해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드물다. 자신을 무력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자신을 둘러싼 폭력을 인기로 전환해 사고하는 게 오히려 스스로를 보호하는 심리적 방책이 된다. 이 마음을 가해자는 잘 활용한다. 성폭력을 둘러싼 문제가 어려운 이유다.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폭력의 복잡성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희롱과 유혹 사이, 폭력과 관계 사이에서 혼란의 시간을 겪는다.
김어준처럼 '공작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관계와 폭력이 그저 단순히 "섹스, 좋은 소재"가 된다. 많은 남성들이 관계, 매매, 폭력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를 구별하려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를 고려해야 한다. 곧 타인을 인격적 대상으로 본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타협하고 존중하는 관계에서는 무수한 감정노동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피곤하기에 굳이 관계, 매매, 폭력을 구별하려 들지 않는다. 이를 뒤섞어 놓을 때 피해자의 감정을 가해자들이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
2. 권력관계 – 이게 어디 감히
저항,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게 어디 감히'라는 생각으로 권력을 통해 피해자 찍어 누르기를 시전한다. 성폭력은 대부분 권력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모호해진다. '이것은 갑을관계의 문제'라며 쉽고 단정적으로 성폭력의 원인을 파악하는 시선을 경계한다. 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한 검사의 긴 글에는 분명히 '안아달라고 행패를 부리던' 남성 후배도 언급되어 있지만, 대중은 희한하게도 이런 사례를 싹 지운다.
성폭력이 단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문제만이 아니듯이, 직위에 의한 권력관계에서만 발생하는 폭력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권력이 사회에서 성별화 되었다는 점이다. 왜 특정 성별이 권력을 압도적으로 쥐고 있는가.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활용한 역사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우리 사회가 몸에 부여한 위계질서가 있다. 생물학적 여성의 몸이 '남자가 아닌 몸'이라면 트랜스젠더의 몸은 '잘못된 몸'이다. 인종에 따른 몸의 서열, 대중이 장애를 가진 몸을 대하는 방식을 떠올려도 무방하다. 갑자기 이러한 역사를 깃털처럼 가볍게 날려버리고 '모든 인간의 문제'라는 두루뭉술한 언어로 차별의식을 보편적 감정인양 포장하는 태도는 기만적이다. 식당의 주방에서 가장 낮은 위치인 설거지 담당이 여성 셰프를 성희롱하고, 학교에서 남학생이 교사를 성희롱하고, 환자가 간호사를 성희롱, 성추행하고, 후배 남성이 선배 여성을 성추행 하는 등 갑-을 관계와 무관한 사이에서도 성폭력은 발생한다. 왜일까. '니가 아무리 잘나도 결국은 남자의 성적 대상인 암컷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말테야'라는 의지 표명이다. 이 의지가 가장 정확하게 드러난 영화가 김기덕의 <나쁜 남자>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자신의 죄와 무관한 성별로 조롱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권력을 가져서 성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도 성폭력을 행사한다. '권력의 문제'라는 개념을 편협하게 해석하면 단순히 지위고하에 의해서만 성폭력이 발생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권력과 성폭력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단순한 모양으로 만드는 이유는, 성폭력을 일부 권력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폭력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다. 배우 오달수의 친구처럼, 가난하고 못생긴 남자가 무슨 힘이 있어 성폭력을 저지르겠느냐고 옹호하는 사람이 바로 이 권력의 개념을 왜곡하는 이다.
스트린드베리의 희곡 <미스 줄리>는 계급과 성의 통념적 권력관계를 뒤흔드는 시도를 한 작품이다. 백작의 딸인 줄리는 하인인 장에게 "내 발에 키스해"라고 명령하며 굴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가진 후, 줄리를 대하는 장의 태도는 달라진다. 둘 사이에 젠더 권력이 끼어들면서 관계는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권력의 중심이 이동한다. 이 작품은 상당 기간 공연이 금지되었다. 사회 전복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당시에 평가받았지만, 두 인물의 성이 반대라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귀족 남성과 하녀의 관계는 성과 계급의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지 않는다.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의 관계에도 이 '어려운' 관계가 잘 녹아있다. 두 사람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한편, 사회적 위치로 인해 이 마음에 스스로 제동을 걸면서 서로를 향해 거친 공격을 쏟아내는 여관에서의 대화는 젠더와 계급의 복잡한 문제를 잘 압축하고 있다.
"넌 일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단 말이야! 거 꿈 하나 거창하지. 아무리 돼지 멱따는 소리 질러봐야 이곳엔 구종별배도 없고, 으음, 있다면 왜놈의 경찰이 있겠구먼. 흥, 그 새뼈가지 몸뚱이로 어쩔 텐가? 난 지금이라도 널 희롱할 수 있어. 버릴 수도 있고, 흙발로 짓밟을 수도 있고, 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다 그 말이야. 날 부처님 사촌쯤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큰 잘못이지......"
길상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전인 서희를 희롱할 수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남성이다. 물론 길상은 서희를 희롱하지도, 죽이지도 않지만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사람임을 드러내어 계급적 울분을 위안한다. 이에 서희는 호통을 치며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서희와 길상은 수많은 사회적 맥락 속에 위태롭게 서있는 주체이기에 이들 사이에 갈등이 형성된다. 이 둘의 관계는 사랑과 권력 투쟁이 실은 꽤 닮은 모습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대상화가 된 존재와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유과 정복으로 이해한 관계에서는 갈등을 용납할 수 없다. 갈등은 상대의 의지가 내게 반영될 때 일어난다. 비서에게 "네 의견을 달지 말라, 네 생각을 달지 말라, 날 비추는 거울이다, 그림자처럼 살아라"고 말했다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배란 피지배자의 의지를 박탈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한국 영화에서 남성 인물은 여성 인물과 갈등을 별로 일으키지 않는다. 여성은 보호받는 대상인 딸로 등장하거나 폭력의 희생양으로 나온다. 여성의 몸을 사이에 둔 '그들만의'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한국 영화에서 여성들이 주로 시체로 등장하는 이유다. '관계'의 실종이다.
이 실종된 관계에서 많은 여성의 일상이 비상이다. 현재 성폭력 고발 운동은 남성의 사생활이라는 괄호 속에 있던 여성의 일상이 그 괄호를 부수고 정치화되는 순간이다. 여성들의 이 고발 행진은 여성을 교환하고 착취하면서 성공을 쌓아가는 남성연대의 고리를 끊는 과정이다. 얼마나 유명한 가해자가 등장하는지, 어느 정도 수위로 폭력을 행사했는지로 시선이 몰리기를 원치 않는다. JTBC <뉴스룸>이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경계하는 이유다. 미투 운동이 피해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이제 누가 또 걸리나' 흥미진진한 관람거리로 소비되어선 안 된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 피해자가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내야만 겨우 들릴 정도로 여전히 제도적 장치가 허술하다.
3. 꽃뱀과 암퇘지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 눈에는 점점 여성들이 꽃뱀으로 변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메두사의 머리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뱀들의 머리카락으로 가득한 괴물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사탄과 이브의 합작에 넘어갔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순진한 아담들의 곡성이 울려 퍼진다.
사탄 같은 뱀과 '맛있게 생긴' 돼지 사이를 오가는 여성들. 남성의 복수는 산업이 된다. 몰래카메라나 리벤지 포르노라 불리는 불법촬영 영상, 음란 사이트라 불리는 성폭력 조장 사이트 등으로 수익을 내는 이들이 있으며, 일상에서는 회식이라는 명목으로 단체로 성 구매를 하는 평범한 남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여자는 정말 '암퇘지'일 뿐이다. 삼겹살을 구워 먹고, 2차로 여자를 '먹으며' 연대를 다진다.
여성을 몸으로 환원해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순간, 더는 사람을 의지와 감정이 있는 주체로 보지 않게 된다. 그저 "맛있게"(만화가 박재동) 생긴 대상이다. 오직 생식기로만 존재하는 살덩이로 만들기 위해 여자를 '보지야'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시인 고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지'와의 차별성에 두었기에 자신의 성기를 내세워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한다.
"보지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 사용하는 것을 이해해 주세요. 어쨌든 그것을 갖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아담이 이브에게 가한 저주가 내려진 것 같아요. 여하튼, 이 구멍을 갖고 태어나면, 그것이 자부심의 원천이 아니라 누군가와 결혼하거나 창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거예요."
역시 '노벨상 후보'로 언급되는 응구기 와 시옹오의 <피의 꽃잎들>은 여성 인물 완자를 통해 '보지'가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실을 잘 압축하고 있다. Girls can do anything,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이 단순한 한마디에 왜 광분하는 이들이 있을까. 정물화의 대상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는 대상화된 여성이 입으로 떠들고 팔다리가 달려서 돌아다니며 뭐든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랍겠는가. 여자는 의지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과 거절을 할 수 없는 여성으로 길러져야 한다. 이렇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정의한 성별이분법 속에서 권력은 남성 중심으로 배열된다. 이 태도가 극단으로 가면 바로 이별을 요구하는 여자, 사귀자는 청을 거절하는 여자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성매수와 성폭력이 이렇게 '거절할 수 없는' 상대를 제압하는 권력욕을 바탕으로 벌어진다. 교육부가 2015년 교사용으로 제작한 성교육 자료는 남성의 돈과 여성의 몸이 교환되어야 한다는 공식을 오히려 정당화한다. "남성은 돈, 여성은 몸이라는 공식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다"라고 했다. 문제의 핵심을 빗나갔다. 성차별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공평한 데이트 비용 분배가 아니다. 돈을 지불한 자의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이다. 경제권을 독점하고 이에 대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
여성은 돈을 벌기 위해 항상 성을 교환의 도구로 쓰도록 은근히 강요받는다. 임금노동을 위해 집밖으로 나온 여성이라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노래방에서 탬버린 흔들며 분위기 맞추려는 여성 검사에게 "네 덕분에 도우미 비용 아꼈다"라고 말하는 부장 검사의 행태를 보자. 그 여성이 무슨 일을 하든, 궁극에는 성노동으로 전환시켜 젠더 권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이때 '성노동'은 성역할 노동까지 포함한다. 애교, 회식 자리에서 냅킨을 깔고 수저를 착착 놓기, 반찬 채우기, 술 따르기, 고기 잘 뒤집기 등을 특히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이유도 젠더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성산업은 성을 매개로 여성이 남성의 권력 행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벌어지는 성폭력이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여성들이 수모를 겪는 이유다.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매수자는 여성의 몸을 제 것으로 여긴다. 이처럼 돈만 내면 마음대로 상대를 대할 수 있는 일방적 관계에 익숙해지면, 감정 노동이 필요한 연애에서 오히려 '투자'한 만큼 뽑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한 마디로 가성비가 떨어진다. 같은 돈을 룸살롱이나 성매수에 쓴다면 마음대로 여성을 대할 수 있는데, 연애 관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이 돈만 뺏긴다는 감정을 느낀다.
이 글의 시작을 <인간문제>로 열었듯이 다시 <인간문제>로 닫으려 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남성 인물 '첫째'는 그리워하던 선비가 결국은 제 앞에 시체로 놓인 모습을 본다. 첫째 역시 봉건 사회의 소작농으로 죽도록 노동했으나 지주에게 땅을 빼앗기니 먹고 살기 위해 인천에서 막노동을 한다. 그가 꾸준히 가지는 의문은 '법'의 실체다. 법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법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잡아먹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법의 길을 잘 아는 검사도 성폭력 앞에서는 법 안으로 들어갈 길을 찾지 못했음을 우리는 최근 잘 보았다. 선비의 죽음 앞에서 첫째는 생각한다.
"이 인간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천만 년을 두고 싸워 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나갈 인간이 누굴까?"
누굴까. 선비는 결국 문제를 풀지 못하고 죽었으나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일을 그만두지도 말고, 말의 이어달리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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