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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칭의 대상이 된 '녀',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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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칭의 대상이 된 '녀', 왜 그럴까

[격월간 민들레] 억압받는 존재들의 언어

"우리는 앞으로도 7·4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 10·4 선언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북남관계에서의 대전환, 대변혁을 이룩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

지난 5월 31일 자 북한 <노동신문> 논설이다. 이 글에서 낯선 표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입에 붙은 '남북관계'가 아니라 '북남관계'라고 한다. 익숙한 언어는 지배체제의 가치관을 담고 있다. 부모, 남매, 남녀처럼 남성을 지칭하는 언어가 먼저 쓰이는 어순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산다. 반면 욕설에 해당하는 '연놈'은 어째서 여성을 먼저 앞세웠을까.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속담을 비롯한 관용적인 표현, 심지어는 역사적 사실도 쉽게 받아들이기보다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 <언어와 여성의 지위(Language Woman's Place)> 표지. ⓒgoogle.com
<언어와 여성의 지위(Language Woman's Place)>(국내 미 출간) 저자인 정치사회 언어학자 로빈 라코프(Robin Lakoff)는 강의 시간에 '크리스토프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라는 문장을 써놓고 학생들의 반응을 본다고 한다. 이 문장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장을 쉽게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에도 '입장'이 있다. '발견'은 유럽에서 온 콜럼버스의 시각이지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시각은 아니다. 우리는 대체로 권력자의 시각과 그들의 언어를 통해 편향된 '사실'을 습득한다.

여성에 관한 말 : '녀'라는 멸칭

처음 불어를 배울 때 여성형과 남성형 명사, 이에 따라 수식하는 형용사의 변화와 관사의 성별이 흥미롭고도 낯설었다. 언어를 통해 세상 만물에 대한 이해가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중성까지 있는 게 아닌가. 인도유럽어족의 특징이다.

같은 어족이라 하여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기준이 통일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불어에서는 '광장(la place)'이 여성 명사이지만, 독일어에서는 남성 명사다. 이는 자연의 성과는 무관하지만, 우연히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이미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독일어에서 외래어가 여성형임을 지적했듯이 성별에 대한 관념이 개입되어 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 대륙은 아메리고의 여성형이다. 정복해야 할 '신대륙'은 여성으로 은유된다.

언어에 젠더 개념이 처음부터 없는 한국어의 경우,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않을까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구별하기보다 아예 여성을 배제하는 언어에 익숙하다.

소설가 최인호가 마지막으로 남긴 책 <나의 딸의 딸>(최다혜 그림, 여백 펴냄) 제목은 '나의 외손녀'가 아니라 '나의 딸의 딸'이다. 그는 '외外'를 붙이기가 싫었다고 한다. 나도 '외'를 비롯하여 엄마의 원가족에게 붙이는 '외'를 사용하는 일이 어색하다. 친가와 외가라니, 노골적으로 모계를 배제하는 가부장적인 언어다. 또한 적극적으로 새 말을 만들어서 관념을 주입시키는 경우도 있다. 계집 '녀女'를 마구 집어넣는 것이다. 애초에 성별 구별이 없는 언어에서 성별을 강조할 때는 '열외'의 존재로 만들거나 비하의 의도를 담곤 한다. 여성 배우가 "여배우 아닌 배우로 불리고 싶다"(엄지원)라고 하거나 여성 작가들이 '여류'라 불리지 않기를 희망하는 까닭이다. 아무리 지적을 해도 언론에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녀'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라. 언론과 남성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녀'가 양산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국립국어원은 아예 차별적 언어를 제도화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일조한다.

"10년간 선정된 신어 총 3663개 중에서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는 총 288개로 이 중 '~녀(걸)'는 196개, '~남'은 92개로 여성을 지칭하는 신어가 2배 이상 많았다. (중략)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는 청글녀(청순하고 글래머인 여자), 잇몸녀(웃을 때 잇몸이 과도하게 드러나는 여자), 스크림녀(공포영화 범인이 쓰고 나온 괴기스러운 가면처럼 흉하게 생긴 여자)와 같이 외모와 관련된 단어가 많았다. 남성과 관련된 단어는 츤데레남(겉으로는 퉁명스럽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자),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의 줄임말. 유머가 있고 지적인 매력이 있는 남자) 등 긍정적인 뜻이 상대적으로 많았다."(2015년 10월 7일 자 <경향신문> ''낮져밤이', '개공감' 신조어 등록한 국립국어원, 소수자는 나몰라라')

비유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대상에게 늘 '녀'를 붙인다. 검찰이나 정부 기관의 관료를 비판할 때 '권력의 시녀'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검찰 권력의 도덕성은 시녀 정도를 넘어 창녀 수준으로 치달리고 있다."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 공권력의 도덕성을 비판하기 위해 '시녀'와 '창녀'를 끌어왔다. 게다가 '창녀'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대상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익숙하지만, 여기서 성매수 남성의 도덕성은 거론되지 않는다.

여성이 하는 말 : 수다와 회담 사이

한국어를 하는 프랑스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한국에서 1년 정도 거주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불어를 사용할 때와 한국어를 사용할 때 태도가 달랐다. 평소에는 그냥 또랑또랑 말하다가 한국어로 말할 때면 표정에 미소가 더 담기며 자꾸만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곤 했다. 어느새 그는 조신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모방을 통해 외국어를 배운 그는 한국 여성들의 말투와 몸짓까지 익힌 것이었다.

나는 외국에서 비모국어를 사용할 때 젊은 남성의 말을 가장 알아듣기 힘들다. 듣는 상대방을 고려해서 말하는 습관은 여성들에게 더 보편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표준어 사용 또한 여성들이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은어나 속어를 사용했을 때 얻게 되는 사회적 이미지는 남성들의 경우보다 더 부정적이다. 오히려 남성들은 그들 간의 유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비표준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아직 사회적 위치가 명확하지 않은 젊은 남성들에게 더 자주 나타난다.

이뿐만 아니라 남성들은 훨씬 더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확신을 넘어 때로 가르치려 든다. "~라는 게 있어요"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려 한다. 반면 여성들은 웃음으로 말꼬리를 흐릿하게 만들거나 "~같아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젊은 한국 여성들에게서 아기처럼 말하는 태도를 종종 발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에서 '어리광부리는 말투'를 쓰는 여성을 비웃는다. 텔레비전에서 툭하면 젊은 여성 연예인들에게 애교 부려보라고 하는 사회에서 과연 비웃을 일인가 싶다. 우리 사회는 실제 소녀는 성숙한 성적 매력을 뿜어내고, 성인 여성은 소녀 같은 모습을 재현하도록 만든다. 아기처럼 말하는 습관은 제 목소리를 과감히 내기 어려운 여성들이 습득한 하나의 태도이다. 이렇듯 여성들의 얌전한 화법에 익숙하다 보니, 여성이 단호하고 공격적인 언어와 화법을 구사할 경우 남성에 비해 더 거센 사회적 반발에 직면한다.

또한 여성의 말은 가치 있는 의견이 아니라 무시해도 될 하찮은 수다 정도로 여긴다. 외국 여성들이 출연한 KBS <미녀들의 수다>와 외국 남성들이 출연한 JTBC <비정상 회담>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작명에도 이러한 성별 관념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가 심상정 후보를 향해 "말로는 못 이겨요"라고 했다. 여기서 '말'은 실체가 아닌 허울이라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심상정이 가진 논리와 정확한 언어 사용, 상대의 문제를 파고드는 집요한 능력을 '그냥 말빨'로 만들기 위해서다. '말로는 못 이기지만, '그건 그냥 말일 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말로 꼬투리를 잡을 뿐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 JTBC <비정상회담>과 KBS <미녀들의 수다> 포스터. ⓒ프레시안

외국어처럼 배우는 젠더 감수성

앞서 살펴보았듯 여성이 쓰는 말은 공손하지만, 여성에 관한 말은 상스럽다. 여성은 공손한 발화자여야 하지만, 쉽게 멸칭의 대상이 된다. 언어가 없는 사람과 언어를 주도적으로 생산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가능할까? 대부분 사회적 약자는 2개 국어 이상을 구사한다. 마음속에서 움터 나오지 못한 채 우물거리는 말과 그가 입 밖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말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해시태그(#)가 SNS에 등장했다. 교육 현장에서 페미니스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페미니스트' 교사라고 부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차별이 옳지 않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일단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교사들이 필요하다.

사람과의 관계, 자신이 모르는 소수자 문화, 타자의 세계 등에 대해 알아갈 때 나는 '외국어를 공부하듯'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외국어를 배울 때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든, 학벌이 어떻게 됐든, 나이가 얼마나 많든, 스스로를 '배우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외국어 앞에서는 누구나 초보자의 경험을 하며 모국어를 벗어났을 때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짐을 경험한다. 내 말이 올바르게 전달되는지 조심하고, 상대의 문화에서 어떻게 들리는지 역지사지를 꾸준히 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학습방식을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는 물론이고 흔히 사회적으로 타자화되는 세계에 다가갈 때도 적용해야 한다. 여성의 말을 듣고, 지역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인종의 언어를 들으며 꾸준히 '다른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듣지 못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물론 이런 것을 몰라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이 세계의 타자들이 이중 노동을 하는 덕분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은 모국어만 해도 세계 시민이 되지만, 이민자는 제2외국어까지 갖춰도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 이방인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익혀준 덕분에 제1세계 시민으로 불편하지 않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제주도 사람 누구나 육지의 언어를 익히듯, 여성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회적 타자들은 자연스럽게 '이중 언어 구사자(바이링구얼, bilingual)'로 길러진다. 자신의 언어가 있어도 사회의 '표준어'를 익혀야만 한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이중 언어 구사자 되기(Be bilingual)'에 관심 가지는 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이 '외국어'의 개념이 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확장되면 좋겠다. '외국'어만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를 익히기.

이 '타자'들은 두려움 없이 말할 권리가 있다. 흑인 차별에 저항한 버스 보이콧 운동의 상징인 로자 파크스의 유명한 말이 있다.

"You may do so(당신이 그렇게 해도 좋다)."

이 말은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한 뒤 경찰에 연행될 때 했던 말이다. '나의 체포를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을 피해자로 두기보다 저항하는 주체로 행동했다.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정치적 역할을 한다. 상식을 불편하게 만드는 언어를 통해 억압당하는 존재는 힘을 얻는다. 해방된 언어는 행동에 추동력을 준다.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소녀들이여, 두려움 없이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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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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