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 현상의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는 지성을 조롱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넷상에 발화했다는 것이다. 비단 일베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권위는 인터넷 혁명과 맞물려 급전직하했다. 대중문화 비평이 더는 권력을 지니지 못한다. 뉴스의 정보 독점력도 사라졌다. 이른바 전문가로 지칭되는 이들의 뉴스 코멘트에 대중이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는 인터넷 포털 댓글로 확인 가능하다.
그런데, 지성에의 거부감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발달에 따라 커졌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들 신문명이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평할 수는 있겠으나, 지성인을 향한 대중의 혐오는 오랜 연원을 가졌다는 평이 나오기 때문이다. 매카시즘 광풍 이후 미국의 당대를 정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역작 <미국의 반지성주의>(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펴냄)는 미국 사회가 일찌감치 지성에의 불편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사회 다방면의 분야를 향한 스케치로 그려냈다. 이는 과거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이 지식 계층의 예상과 다른 결과를 낳자, 미국 출판계는 올 한해 이 현상을 조명키 위한 책을 쏟아냈다. <힐빌리의 노래>(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펴냄), <자기 땅의 이방인들>(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펴냄) 등은 힐러리와 민주당으로 정체성을 대변하던 이들을 향한 대중의 거부감, 이른바 ‘PC함’에 관한 미국 대중의 피로의 연원을 나름의 방식으로 찾으려 한 책이다.
과감히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차용하자면,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는 하나의 강고한 흐름이 되었음을 쉽게 짐작 가능하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갈라 보길 거부하는 사회 태도, 이른바 '747 성장' 공약으로 대표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대 착오적 공약에 열광한 대중, 약자 혐오를 정당화하려는 분위기는 어제오늘의 결과물이 아니다.
특히 여성주의가 사회적 논쟁 대상으로 떠오른 지금, 여성을 향한 혐오는 미국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 볼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상의 근원에의 이해를 거부하는 대중의 시각은 피해의식과 맞물려 강고한 흐름을 만들었다. 이는 여성집단의 대대적 반발로 더 커지면서 소셜 미디어를 막말의 전쟁터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오랜 기간 문화 현상을 관찰했고, 여러 매체에 관련 글을 쓴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로부터 받은 한국의 반지성주의에 관한 글을 나눠 싣는다. 필자는 글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낳은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식민지 남성성을 꼽는다. 이를 바탕으로 약자의 상황을 애써 모르려 하는 태도가 집단 반지성주의로 현현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필자는 우리 문화의 반지성주의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행해진 블랙리스트 사태, 이명박 정부 시절 큰 반향을 낳은 나꼼수 현상, 그리고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는 반여성주의 현상에 관해 세밀한 의견을 글로 정리했다. 편집자.
메갈리아 : 침묵당하기에서 교란시키기로
2015년 1월 한 패션지에 실린 김태훈의 칼럼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는 소셜 미디어에서 여성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이끌어내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그는 이슬람국가(IS)보다 페미니스트를 더 위험한 집단으로 몰아갔다.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지만 이 칼럼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지의 특권'을 아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시위하는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듯, 여성혐오 세력은 페미니스트를 '페미 나치'에서 한 발 나아가 이제 IS에 비유하며 마땅히 척결해야 할 세력으로 만든다. 이런 방식의 전술이 비웃음을 사기보다 버젓이 활자로 인쇄되어 칼럼이라는 형식으로 생산된다면, 이는 한 사회의 지식 권력과 표현 권력이 심각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의미이다.
"콘돔의 발명으로 여성의 성이 온전히 자율권을 갖게된 1960년대에 페미니즘은 발생했다."라고 당당히 매체에 기고할 정도로 그는 '몰라도 말할 수 있는 권력'이다. 페미니즘은 1960년대에 '발생'하지 않았고, 콘돔의 발명 덕분에 여성의 성이 자율권을 갖게 되지도 않았다. 갈수록 페미니즘의 연대기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용기에 새삼 놀라고 있다. 그렇게 여성의 서사와 저항의 역사가 전수되지 못하며 여성은 매번 재발견되는 운명에 처한다. 이로 인해 2015년 2월 소셜 미디어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증후군이 만연했던 기존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단지 소셜 미디어에서 벌어졌다고는 하지만 이 익명의 선언은 어느 정도 파장을 남길 수밖에 없다.
더불어 2015년 여름 만들어진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메갈리아 의 탄생은 적어도 온라인 상에서 여성의 언어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메갈리아는 시각에 따라 페미니즘 사이트와 '남성혐오' 사이트로 나뉘어 불렸다. 메갈리아는 성소수자나 성 판매 여성 혐오 등의 이유로 내부에서도 갈등과 분열을 겪었다. 내외부의 꾸준한 비판과 공격으로 인해 활발하게 활동한 기간은 1년이 채 안 된다. 금세 사이트 방문객이 줄어들고 활동이 뜸해지더니 2년도 되기 전에 사용자를 찾기가 거의 어려워지고 사이트는 접속도 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이 기간 메갈리아가 남긴 파문은 컸다. 메갈리아 활동 초기 1년 동안에만 나무위키 사이트의 '메갈리아' 항목에 300만 자 정도의 글이 수정되고 추가되었다고 한다. 메갈리아와 더불어 비판되곤 한 일간베스트(일베)의 변천사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시인사이드에서 파생된 일베는 2010년 만들어졌다. 일베의 극우 성향과 여성혐오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2013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와 달리 일베에서는 여전히 회원의 활동이 활발하다. 이제 일베는 온라인을 벗어나 오프라인에서도 점차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낸다.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에서 주의할 점은 메갈리아 찬반 여부로 초점이 맞춰져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발생 맥락과 이들을 둘러싼 사회의 반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별의 숨겨진 얼굴에 집중해야 한다. 메갈리아가 가지는 상징성과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서 쏟아져 나온 차별과 폭력의 양태는 여성혐오의 구조를 잘 드러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트위터를 통해 메갈리아 활동을 '소아병'으로 부르거나 역시 IS에 비유했다. 세계를 뒤흔든 공포스러운 집단으로 알려진 단체를 끌어와 최선을 다해 메갈리아를 폭력적 이미지로 몰아가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의 이런 극단적인 비유를 두고 "나중에 가서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꾸준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메갈리아를 비판하면서 티나 성우 교체사건 당시 "스탈린주의가 곧 사회주의가 아니듯 메갈리아가 곧 페미니즘은 아닙니다"라고도 했다. 여성혐오에 대항하는 메갈리아의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IS와 스탈린주의로 비유하던 그는 반면 트위터에서 탁현민을 옹호하며 "책에 어떤 내용을 썼다는 것만으로 10년 후 해고 사유가 된다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겐 그게 더 무거운 족쇄일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적극적인 '모름'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IS보다 더 강력한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하면 또 그 이름을 빌려 여성의 목소리를 제압하는데 힘을 보탤 것이다. 여성주의 활동가 권김현영의 표현대로 정확하게 "무지의 특권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메갈리아의 활동은 사라졌지만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수단이며 여성의 입을 틀어막는 검열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메갈'은 어느새 낙인의 이름이 되었다. '진짜(진정한)'와 '모든'의 함정에 빠지기 시작하면 누구도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모든 폭력은 나쁘다, 모든 혐오 발언은 나쁘다 등으로 메갈을 비난 혹은 비판하기란 쉽다. 메갈의 언어가 용납되면 일베의 언어도 허락되기 때문이라는 논리도 대두된다. 단지 여성혐오 집단만의 태도가 아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도 같은 논리를 적용했다. 이 '진정성'을 빌미로 새로운 언어를 내치려는 여성혐오 집단과 역시 '진정성'에 스스로 갇혀 '메갈리아'로 상징되는 새로운 움직임과 거리 두려는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는 결국 동일한 결과로 향했다. 메갈리아를 극단주의로 규정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이현재는 이러한 현상을 고민하고 궁극적으로 메갈리아의 언어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비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나의 언어 안에 그녀들을 가두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을 비체로 인정하는 순간, 순수성과 완결성으로 '무장'한 나의 이념에 스스로 갇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는 어떠해야 한다와 같은 잣대를 만들어놓고 그녀들에게 도덕적 순수성과 논리적 완결성을 요구하는 일이야말로 버틀러가 말한 '윤리적 폭력'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회는 여성의 노동에 관심이 없으며 노동을 남성화했다. 노동자의 정체성이 남성화 되어 있기에 남성의 '밥줄'은 모두의 걱정을 산다. '가정을 책임지는 남성'인 가장을 향한 연민은 그들의 도덕성이나 갖은 차별을 변호하는 배경이 된다. 반면 일부 '페미니스트'와 여성혐오 집단이 윤리적 폭력을 통해 메갈리아를 극단주의로 몰아가는 동안 메갈리아라는 낙인은 '단지 온라인 싸움'을 넘어 여성의 노동 현장을 비롯한 일상으로 침투했다.
티나 성우 교체 사건
메갈리아가 만들어진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메갈리아 낙인은 조직적인 소비자 운동의 차원으로까지 번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2016년 7월 18일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에서 티나 목소리를 담당한 성우 교체 사건이다. 메갈리아가 만들어진 후 벌어진 여러 사건 중에서 '티나 성우 교체 사건'은 정의당의 대규모 탈당 사태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심층 분석한 <시사인> 도 절독 사태에 휘말렸다.
사건은 해당 성우가 트위터에 한 티셔츠를 입고 이를 인증한 사진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왕자는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글귀가 쓰인 티셔츠였다. 이 티셔츠는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피해자 여성을 후원하기 위한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에서 만들었다. 트위터에서는 곧장 성우에게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행동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며, 이에 성우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메갈리아는 미소지니(여성혐오)에 대응하는 사이트로 알고 있으며 나무위키야 말로 미소지니가 팽배한 곳으로 알고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을 지지할 것이고, 이에 관해 책임을 진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해당 성우에게 의견 철회를 강권한 이들은 페미니즘은 지지하지만 메갈리아는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며 '남성혐오' 단체라고 주장했다. 또한 메갈리아에서 갈라져 나온 '더 극단적인 단체 워마드' 회원도 티셔츠 제작에 관여하고 있으니 메갈리아를 지지하기 위해 티셔츠 인증 사진을 올리는 행위가 옳지 않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급기야 사태는 당신은 메갈이냐, 아니냐 라는 사상검증 차원으로 넘어갔다. 많은 이들이 메갈리아를 반사회적 단체로 명명했으며, 급기야 넥슨에 성우 교체를 요구했다. 넥슨은 결국 성우를 교체했으며 성우도 이를 받아들였다. 고작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 사건에 앞선 5월, 강남역 살인 사건을 거치며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연대는 더욱 강해졌다. 이 후 일어난 성우 교체 사태는 성우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는 사회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웹툰 사이트 레진 코믹스에 작품을 연재하는 만화가 중에도 메갈리아 지지를 표하는 작가들이 있었다. 이에 사태는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만화가를 보이콧 하는 상황으로까지 퍼졌다. 이는 독자들의 레진 코믹스 탈퇴 운동으로 이어졌다. 오늘의 유머(오유)는 정부의 웹툰 규제를 찬성하는 '예스컷- 창작은 권력이 아니다'는 운동을 벌이는 등 여성의 목소리를 제한하기 위해 과감히 검열을 지지하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대체로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을 지지하는 사용자들이 모인 오유는 일베와 정치적 입장 차이를 보이지만, 여성혐오에 관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사건은 여러 언론에 기사화 되었고, 이틀 후에는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가 이에 관해 논평을 냈다. "성우는 정치적 의견을 내세웠을 뿐이며, 따라서 그 탓에 직업 선택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사건은 본격적으로 정치화되었다. 상당수 당원은 정의당이 '여성혐오'와 무관한 사건을 여성혐오의 문제로 만든다고 비판했으며, 성우의 입장은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혐오 단체 옹호라고 했다. 그들은 정의당이 페미나치나 다름없는 극단적이며 반윤리적인 단체를 옹호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문화예술위원회가 논평을 철회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고 실제로 탈당 사태가 일어났다. 당원뿐 아니라 오유도 정의당 지지 철회를 선언하는 등 사회 전반적으로 정의당을 향한 질타가 빗발쳤다. 결국 정의당은 이 논평을 철회했다. 정의당은 문화예술위원회의 논평은 당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게임 사용자라는 소비자들의 항의에 넥슨이 성우를 교체했듯이, 정당은 당원이라는 고객의 소리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고객은 왕이며, 수요자의 요구는 정의의 기준이 되었다.
물론 정의당 내부에서도 이 사태에 관한 의견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다. 조성주의 경우 "사회 구성원 어느 누구에게도 가해지는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발언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표현에 관한 윤리적 판단 이전에 그 사회적 맥락과 배경을 살피지 않은 단정적이고 무조건적인 배제에는 더더욱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정의당 내 여성주의자 모임에서도 공당의 여성주의가 후퇴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은 끊임없는 반발에 부딪혔다. 이렇게 이 사건은 정의당의 정체성, 나아가 진보 정당의 정체성에 관해 진지한 고찰을 필요로 하는 사건으로 커졌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와 여성의 표현의 자유, 노동권 등이 중첩된 상징적인 사건이다. 정의당은 소수자를 향한 정치적 가치보다는 당원의 탈당이라는 '표'의 힘에 좌우되었다.
이 현상을 설명할 논거를 제대로 찾지 못한 언론은 나무위키를 인용해 메갈리아를 정의하기도 했다. "넥슨의 조치를 지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대표적 여혐 사이트인 일간베스트가 '애국 보수'가 아닌 것처럼 메갈리아 역시 페미니즘과 무관한 단순 남성혐오 사이트라고 지적한다. 각종 저질 단어를 사용해 선동을 일삼았다는 주장이다. 네티즌이 직접 만드는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는 메갈리아를 '여성의 권리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같은 여성의 적이자 사회악인 집단'이라고 적시했다. (나무위키의 일부 페미니즘 관련 키워드에 관한 설명은 여성 혐오자들이 주로 쓰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혐오의 원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혐오의 역사는 증발하고 오늘날 남성들은 피해자가 되었다.
순식간에 '여혐 대 남혐'의 구도가 짜였다. 모든 혐오에 반대한다라는 식의 '좋은' 말들이 '여성'이라는 개념을 성실하게 지워갔다. 이는 메갈리아가 일으킨 '언어 봉기'를 묵살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이러한 묵살을 제도화한다. 웹툰작가를 '한남충'이라 지칭한 여성에게는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벌금은 30만 원이다. 이 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의 '웹툰작가를 '한남충'이라 지칭한 대학원생에 벌금형 선고'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남충에서 '충'은 벌레라는 뜻으로 부정적 의미가 강하고, A씨는 피해자 개인을 대상으로 해 문제의 글을 썼고 모욕의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어 '모욕적 언사를 사용하지 않고도 불매운동을 할 수 있음에도 피해자의 가치에 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2017년 8월 "메갈BJ(갓건배) 죽이러 간다"던 남자 BJ는 경찰에 체포돼 범칙금 5만 원 처분을 받고 '귀가조치' 되었다. 경찰은 "형사과로 넘기기에는 사안이 경미하다"고 했다. 공권력은 여성을 향한 모욕과 물리적 폭력, 살인에 이르기까지 편파적으로 남성의 입장을 대변한다. 7000여 명이 생방송으로 여성을 향한 살해 협박을 구경하면서 여성의 죽음은 하나의 '공연'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에 앞서 왁싱샵을 운영하던 여성이 살해된 사건과 겹쳐 생각해 보면 젠더 권력의 차이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수 없이 많은 여성 연예인을 비롯하여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김치녀'나 '된장녀'가 되어도 제도적으로 이러한 발언이 규제 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립국어원은 2006년에 이미 '된장녀'를 신어 목록에 올려서 된장녀의 실체를 인정해버렸다. 여성혐오는 이렇게 역사가 되고 예술이 되며 종교와 철학의 지위를 얻어 인간의 의식과 피와 살을 구성한다.
혐오 발언과 행위를 편의상 나눠보자. 속으로만 생각하기-사적인 관계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말로 표현하며 공유하기-강연이나 출판물 등 창작 활동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혐오와 비하 감정을 표현하기-행동으로 옮기기. 이 각각의 단계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2단계까지는 외부의 개입이 어렵다. 3단계부터는 개입이 필요하지만 사법적 영역이라기보다 비판의 영역이다. 4단계는 명백하게 사법적 개입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사회는 여성 살해 협박이 일어나도 기본적인 사법적 개입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탁현민의 여성비하 발언을 옹호하는 목소리의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 3단계에 관한 비판도 제제 받는다. 연이어 터져 나오는 단톡방 성희롱은 바로 이런 사회 구조 아래 자연스럽게 양식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나름 분석한다며 오히려 '남성성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남자들이 기가 죽어서 그렇다거나, 사냥꾼 본능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로 원인과 해법을 엉뚱한 곳에서 찾아 내놓는다. 조금 더 그럴 듯 하게 말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여성혐오의 원인을 찾거나, 진화심리학을 동원해 현상을 당위로 탈바꿈하거나, 막연한 인문학 공부를 통해 해법을 찾는 시도도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혐오의 알리바이만 제공해준다. 맞은 여자, 죽은 여자의 시각에서 생각하기를 결코 시도하지 않은 채 때리는 남자, 죽이는 남자의 시각에서 세계를 해석한다. 대중 철학자로 이름을 알린 강신주는 한국의 대표적 저항 시인인 김수영의 시 <죄와 벌>을 통해 사랑과 미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날 김수영은 안 거예요. 김현경을 미워하지도 못한다는 것을요. 우산이 아깝다고 생각하잖아요. 죽일 것 같으면 죽여 버리면 되죠. 나 없었을 때 외간남자랑 눈이 맞은 여자니까 죽여 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김수영은 우산으로 때렸을 때도 누가 봤을까 봐 그게 두려워요. '타인의 시선'이 들어오죠? 더 아까운 건 뭐예요? 우산, 그 신상 우산을 두고 온 거예요. 부인은 여기 없죠. 그때 김수영은 안 거예요. '아, 제대로 때리지도 못 하는구나.' 살인도 못해요, 김수영은. 이날 이후로 김현경과의 관계는 딱 그 정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타는 없어져요. 이제 사랑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아내와 남편으로 사는 거에요."
남편의 아내 폭행과 여성 살해를 낭만화하는 철학자의 해석 속에 역시 '맞은 여자'의 관점은 없다. 철학적 사유든 과학적 논리든 문학적 상상력이든, 이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일련의 태도들은 사르트르가 지적한 '사이비 지식인'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배 계급의 사주를 받아 자칭 엄격한 논리-말하자면 과학적 연구방법의 산물인양 제시되는 논리-를 통해 특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 든다."
사르트르 당시 프랑스 '사이비 지식인'들의 태도에서 오늘날과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식민지배에 대항하는 피식민자들의 봉기를 두고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사실 도를 지나친 감이 있다. 우리의 해외 영토에 너무 여러 가지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어느 편의 것이건 폭력에는 반대다. 나는 백정이 되기도, 백정의 희생물이 되기도 둘 다 원치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식민자에 대한 원주민들의 반항에 반대한다." 사이비 지식인들이 저항의 태도를 문제 삼는 이유는 실은 태도가 일으키는 혁명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도를 빌미로 '혐오에 혐오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한다. '똑같은 혐오'는 과연 실재하는가. 국가인권위가 2016년 조사하여 2017년 2월 발표한 혐오표현의 실상을 보면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이 압도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온라인 혐오표현 피해 경험률은 성소수자가 94.6%로 가장 높았고 이어 여성(83.7%), 장애인(79.5%), 이주민(42.1%) 순으로 나타났다. 오프라인 혐오표현 피해 경험률도 성소수자가 87.5%로 가장 높았다. 장애인(73.5%), 여성(70.2%), 이주민(51.6%)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조사는 혐오표현과 관련된 첫 번째 실태조사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16년까지 이러한 실태를 조사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는 '혐오표현'에 관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었다. 여성에게 가해진 수많은 폭력과 조롱과 비하의 언어에 무심하던 사회는 여성의 저항 언어를 통해 '혐오'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는다. 2015년 <시사인>에는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이라는 주목할만한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일베 게시 글 43만 개를 분석해서 여성혐오 지도를 그렸다. 꼼꼼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남성의 경제력에 더 집중하는 태도를 "보편적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거나 성비 불균형을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보는 한계도 드러난다. 짝을 찾지 못한 남성들이 여성혐오를 표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성비 불균형은 혐오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여성혐오가 안전하게 유지되던 가부장제를 여성들이 조금씩 흔들면서 혐오가 '보이게' 되었을 뿐, 혐오 자체가 상승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럼에도 이렇게 본격적인 조사와 분석이 생산되는 상황은 고무적이었다. 된장녀와 김치녀가 '탄생'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다가 이 '김치녀'들이 거울을 들어 '한남충'을 만들어내자 비로소 사회는 '혐오'를 인식한다.
혐오와 분노는 전혀 다르다.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분노라는 감정을 이렇게 정리한다. "분노는 세상 속에서 가질 수 있는 타당한 '유형'의 감정이다. 다른 사람에게 받는 손상을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타당하다. 따라서 누군가 분노를 표출한 경우 질문해야 할 것은 [분노를 촉발한] 사실이 정확했으며, [그 속에 담긴] 가치가 균형을 이루었는가이다." 반면 혐오는 "혐오의 사고 내용은 전염이라는 신비적 생각과 순수성, 불멸성, 비동물성-우리가 아는 인간 삶의 선상에 놓여 있지 않은-에 관한 불가능한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전형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중략) 지배 집단은 자신이 지닌 동물성과 유한성에 관한 두려움과 역겨움을 느끼게 하는 집단이나 사람에게 혐오를 드러냄으로써 이들을 배제하고 주변화해 왔던 것이다."
'부르기'를 통해 언어를 교란시키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정말 말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권력 구조를 향한 문제제기였다. 저항의 서사를 남성의 목소리로 선점하는 이중 억압 속에서 여성 하위주체는 더욱 말하기 어렵다. 메갈리아는 언어 탈취 행위로 여성을 침묵케 하는 구조에 대항했다. 통념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얌전한 수신자이지 적극적인 발신자가 아니다. 미러링이라는 언어의 반사는 남성의 언어를 수신하지 않는 전략이다. 메갈리아는 발신자의 위치에서 지속적으로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만들어 기존 언어를 교란했다. 그 동안 여성들은 꾸준히 나는 김치녀가 아니다, 된장녀가 아니다, 라고 대응해야 했다. 메갈리아는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 남성을 '한남충'으로 부르기 전략을 세웠다. 이에 관한 응답의 형태는 여성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여성이 김치녀나 된장녀로 불리지 않기 위해 '개념녀'가 되려 한 반면, 남성은 한남충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여성이 남성을 명명하는 상황, 그 형식 자체가 남성에게는 문제로 다가온다.
'한남충'이라는 호명은 바로 '한국 남성'을 소환하고, 그 남성을 불편하게 불러 세우는 작용을 한다. '한남충'이냐 '한남'이냐는 크게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부름'이다. 그래서 가수 이랑이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한 후 "돈 되는 일=한남으로 태어나기임"이라고 트위터에 남겼을 때 이를 두고 '남혐'이라고 비난하는 반응이 나왔다. 남성의 이러한 반응은 비로소 여성의 언어가 그들에게 '도착'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2010년에 나온 엘레오노르 푸리아(Eléonore Pourriat) 의 단편영화 <억압받는 다수 (majorité opprimée)>는 일종의 미러링을 통해 성 역할을 교란한 작품이다. 10분 정도의 짤막한 이야기 속에 일상의 젠더 문법을 반대로 뒤집어 놓는다. 영화는 길에서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며 시작한다. 앉아있는 여성들은 지나가는 남성을 쳐다본다. 이제 주인공인 한 남성이 유모차를 끌고 등장한다. 그는 가슴을 노출한 채 조깅을 하는 젊은 여성과 마주친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히잡을 두른 또 다른 남성이다. 남자는 길에서 모르는 여성의 추근댐과 욕설에 시달린다. 골목에는 주저앉아 소변을 보는 여성이 있다. 이 남성은 골목에서 여성들에게 집단 성추행을 당한다. 경찰은 오히려 남성의 행동을 지적한다. 남성은 자신이 입은 짧은 반바지를 손으로 끌어내리는 장면도 있다. 아내도 결국 남자의 행동을 탓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단지 성별만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상황은 웃기고 어색해진다.
김혜수와 김고은 주연의 <차이나 타운>에서도 이러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 문법 아래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단지 뒤집었을 뿐, <억압받는 다수>처럼 어떤 비판 의식이나 메시지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며 관객은 경험한다. 수많은 남성 느와르에서 사용하던 익숙한 소재가 단지 여성물로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상황이 어색하게 다가온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어색함은 스크린 속의 자연스러운 성적 수행에 관한 미러링으로 작용하고 만다.
이처럼 미러링은 우리에게 낯섦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과 행동을 향한 자기검열이 여성에게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 있다. 이를 뒤집는 언어를 통해 억압받는 목소리는 해방을 경험하고 언어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이 언어들을 여성들이 즐기는 모습이 기존 문화 속에서는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성은 그 동안 남성의 언어 속에서 유머의 소재였다. 그러나 이제 언어 '놀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웃음의 생산자 역할을 하며, 자신을 조심케 하는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에 대한 저항 발언 (counter-speech), 곧 "되받아쳐 말하기 (talking back)"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수신자에서 발신자 되기, 발화 양식의 변화는 은폐되었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역할을 한다. 2016년 쏟아져 나온 성폭력 폭로는 우연이 아니다. 철학자 윤김지영은 미셀 푸코의 '파르헤지아(parrhesia)' 개념을 빌려 여성들의 폭로 행위가 '두려움 없이 말하기'의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듣는 청자를 고려한 '고백'이 아니라, 말하는 '나'의 주체적인 발화양식인 '폭로'를 통해 여성들이 '피해자'로 남지 않기를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메갈, 시대의 빨갱이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했던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태도는 비웃음을 샀다. 문재인의 사상 검증을 요한다기 보다 오히려 철 지난 빨갱이 검증에 발언자의 태도가 우스운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냉전시대처럼 빨갱이를 몰아내는 정치의 시대가 아니다. 소수자 탄압에의 저항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굴이 보이는 등 점점 기존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인식하는 시대로 향해가기 때문이다. 19대 대선에서 드러나듯이 이제 색깔론은 유권자에게 피로감을 준다. 대신 페미니스트 선언이나 군 동성애자 색출 사태를 두고 일어난 논란처럼, 소수자 인권을 둘러싼 태도가 정치인 검증 요소 중 하나다. "동성애를 찬성합니까?" 이는 "김정일 개새끼라고 해봐."가 시대에 따라 바뀌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에게는 "메갈이니?"라고 묻는다. 메갈리아 사이트는 이제 접속도 안 되는데 '메갈'이라는 적을 만들어 여성의 입을 단속한다. 종북 사냥과 비슷하다. 2014년 통진당 해산 판결은 민주주의를 향한 일종의 공격이었다. 권력이 처형당하는 '본보기'를 만들어서 좌파가 함부로 까불지 못하게 하듯, 현재 남성은 '메갈'이라는 이름을 대상으로 이러한 처형을 진행하고 있다.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의 성명으로 촉발된 정의당 내부의 여성주의 '문제'는 여름 내내 지속되었다. 정의당 일부 당원은 오유의 지지 절회와 탈당을 막기 위해, '친메갈리아 정당'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노력했다. 2016년 9월에는 일부 당원들이 '당원비상대책회의'라는 이름으로 '남성의 마음'에 호소하고 여성의 목소리를 왜곡하는 현수막을 서울 일부 지역에 걸기 시작했다. "정의당은 성평등주의 정당입니다! 남성을 버리지 말아주세요", "남자 여자 편가르기 그만 했으면. 친하게 지내요~!", "오유야 미안해 ㅠㅠ. 우리도 죽겠어 ㅜㅜ", "정의당원은 혐오와 전쟁 중! 매라포밍을 막아라!", "혐오를 거둬줘. 나는 네 언니가 아니야", "정의여, 혐오여? 뭐시 중헌디! 뭐시 중허냐고!", "정의의 이름으로 혐오 널! 용서하지 않겠다", "지지자 분들 미안합니다. 우리도 죽겠습니다", "정의당은 사람과 사람의 상생을 추구합니다. 무분별한 혐오는 상생이 아닙니다"라는 총 아홉 가지 현수막을 걸었다. 이 현수막에서 말하는 '혐오' 행위는 메갈리아로 상징되는 여성의 비판적 목소리다. 이에 관해 정의당은 공식입장이 아님을 전했다.
지금까지 보수 우파가 '안보장사'로 사회의 지성을 마비시켜왔다면, 이제는 여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칭 진보도 스스로 지성을 퇴보시킨다. 페미니즘이 축적한 지적 역사를 끊임없이 부정한다.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 '나를 설득해 봐라'는 태도를 고집한다. 여성학은 학문이며 여성운동은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있고 여성주의는 하나의 인식론이다. 설사 비판적 지식인이라도 남성의 경우 여성주의에 관한 지적 태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젠더 문제에 있어서는 '본능'을 옹호하며, 자연법칙을 내세울 때가 많다. 운동과 지성의 흐름을 거부한 채 '남성의 본능'에 갇혀 알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성차별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꺼이 '애 아니면 개'가 된다. 그래서 본능, 욕망, 날것, 야성이라는 개념을 자주 들먹인다. 본능을 옹호하는 이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원시'로 돌아가 무지를 선택한다. 앎보다는 권력 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 사건만이 사건이 아니다. 사건 이후 우리 사회가 여성의 목소리를 묵살한 것 역시 명백히 사건이다. 여성들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사건화' 했다. '사건 이후의 사건'은 바로 차분한 토론에서 등장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MBC <100분 토론>에서 다뤘는데, 참여한 패널이 인상적이다. 변호사, 경찰행정학과 교수, 경찰안보학과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패널로 참석했다. 모두 남성이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여성이며, 가해 남성은 살인 동기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는 발언을 했지만, 단 한 명의 여성도 이 자리에 없었다. 사건을 토론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성별이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여성의 의견을 얼마나 무시하고 묵살하려고 조직적으로 애쓰는지 알게 해준다.
뿐만 아니다. '군무벅스' 논란처럼 여성혐오를 위한 거짓 정보와 조작이 넘실댄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신장 팔아 여자친구 명품가방 사줬다는 괴담을 유포해 여성에게 착취당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요즘은 식당에서 아이 엄마가 '~를 달라고 요구했다'는 식의 목격담, 혹은 목격담으로 전해 들었다는 '카더라' 식의 이야기들이 퍼져나가며 '맘충'을 창조하고 있다. 조작의 방식은 점점 진화하여 이퀄리즘이라는 가짜 정보를 통해 한국 페미니즘이 문제라는 그림을 그려 나간다. 심지어 역사학자 전우용은 트위터에서 인천 초등학생 유괴 살인 사건이 마치 '패륜적 언어'의 '해방'으로 여성들이 패륜을 저지른 것인 양 선동을 펼치기도 했다. 소셜 미디어와 커뮤니티는 혐오 공유의 장이면서 동시에 공론장이 되었다. 여기에 주기적으로 튀어나오는 "여성단체 뭐하냐"와 일부 남성 지식인들의 '페미니즘은 중산층 엘리트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발언은 '여성을 외면하는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이라는 오해를 확산시켜 여성의 연대를 꾸준히 방해한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간첩 조작을 허하는 사회를 만들듯이 남성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여성과 성소수자 등에 관한 거짓 정보를 유통시킨다.
남자들을 무시한다는 여성의 현실은 어떠한가. IMF 외환위기 이후로 인턴과 비정규직 증가는 여성 노동력을 더욱 값싸게 만들어 빈곤의 여성화를 만들었다. 한국 남성의 하루 가사노동 시간은 45분으로 OECD국가 중 최하위이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의원 중 여성 비율은 17%에 불과하다. 2015년 강력범죄(흉악) 피해자의 88.9%는 여성이었으며 여성의 50.9%는 사회 안전 수준에 관해 불안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으로 2016년에만 8367명이 입건되었다. '2017년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참고하면,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남학생 보다7.2%포인트 높지만 여성의 임금은 남성 임금의 월평균 64.1%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오늘날 한국 남성은 여성들의 기에 눌려 피해자가 되었다는 피해의식 과잉 상태에 빠졌다. 결혼에 관한 여성의 의식은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다. 2016년 혼인건수는 전년보다 7.2% 감소했고, 20년 이상을 함께 한 부부의 이혼 비중은 30%를 넘어섰다. '결혼을 해야 한다'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13세 이상 여성의 비율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변화하는 여성의 의식만큼 남성들은 '여성 상위 시대'라는 착각을 키운다. 1930년대에도 '신여성' 때문에 '여존남비' 세상이 온다며 당시 남성들은 한탄했다. 드러나지 않던 문제를 보이게 만드는 목소리들 덕분에 사회는 혐오와 차별을 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특권을 누리던 이들은 '무시' 당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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