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 참가를 위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25일 오전 경의선 육로를 통해 우리측 지역으로 입경했다. 보수 야당은 북측 대표단 단장이 이른바 '천안함 사태 주범'으로 지목된 김영철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란 점을 지적하며 북측 대표단의 예상 이동 경로를 막고 연좌농성을 벌이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북측 대표단은 이들의 농성 지점을 피해 우회로를 택해 남측 땅을 밟았다.
김영철 부위원장과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은 이날 오전 9시 49분께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53분께 경기 파주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에 도착했다. 이들은 10시 15분께부터 차량 이동을 시작했다. 김 부위원장은 CIQ에서 국내 취재진으로부터 '천안함에 대해 어떤 생각이냐', '방한 소감을 말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지만, 굳은 얼굴로 아무 대답도 않고 지나갔다.
북측 대표단은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당이 '김영철 방한 반대' 시위를 벌이며 농성 중인 통일대교를 피해 전진교로 우회 통과, 보수 야당 시위대와 북측 대표단이 조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 부위원장은 과거 '당 비서'라고 불렸던 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고, 2016년 7차 노동당 대회 당시 김정은을 필두로 한 중앙위 위원 명단에서 17번째로 호명됐다. 북한 조선노동당의 대남정책·전략을 총괄하는 통일전선부 부장도 겸하고 있다. 리선권 위원장은 과거 통전부 외곽 기구였다가 2016년 6월 북한 헌법 개정시(추정) 내각 산하 국가기구로 승격된 조평통을 맡고 있다.
당이 국가를 지도하는 체제인 북한에서, 각각 당과 국가 행정부(내각)에서 대남정책을 맡고 있는 책임자급 인사 2인이 한꺼번에 방한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지난 1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리 위원장은 조명균 방관의 카운터파트로 나왔고, 청와대는 최근 김영철 통전부장의 맞상대는 서훈 국정원장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북측 대표단을 CIQ에서 영접한 것은 천해성 통일부 차관이었다.
이들 북한 고위급 대표단은 이날 저녁 8시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2박 3일 간의 방한 일정에 돌입한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접견 및 서훈 국가정보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의 회동도 예상되고 있다. 다만 통일부는 전날까지 '협의 중'이라며 북측 대표단의 일정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는 상태다.
홍준표·유승민·김무성에 MB까지…보수정치권 '反 김영철'로 총결집, 왜?
북측 대표단, 특히 김영철 부위원장의 방한을 두고 천안함 유족들과 보수 야당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유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보수 야당도 총력 투쟁에 나선 게 눈에 띈다. 자유한국당은 전날 서울광장 집회 및 연좌농성에 이어, 같은날 오후부터는 CIQ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목 통일대교에서 밤샘 연좌농성을 벌였다.
한국당은 당내에 '김영철 방한 저지 투쟁위원회'까지 만들고 위원장에 대선주자급 중진인 김무성 의원을 임명하는가 하면,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 등도 모두 통일대교 농성에 참여하는 등 당력을 총결집해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홍 대표는 이날 오전 농성 현장에서 "이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결국 사회주의 체제로 변혁을 해서 남북 연방제로 가자는 것"이라며 "그 전 단계로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만들고, 거기에 김여정이 오고, 국민 감정이 가장 심각하게 충돌할 수 있는 김영철도 와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혁중도보수를 내세우고 있는 바른미래당도 이날 대전 국립현충원의 천안함 희생자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다. '천안함 배후'라는 김 부위원장 방한에 대한 비판의 뜻이 담겼다는 해석이 나온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전날 "천안함 46 용사를 살해한 전범(戰犯) 김영철이 북한 대표로 대한민국에 온다"며 "정부는 김영철을 거부하기는커녕 김영철의 죄를 사면해주려고 대신 나서서 갖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전범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유 대표는 "대통령은 지금 김영철에 대해 한 마디도 안 하고 비겁한 투명인간처럼 뒤에 숨었다"며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천안함 폭침 전범 김영철의 방한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창올림픽 폐막식이 다가오며 검찰 소환 초읽기에 들어간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나섰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23일 오후, 자신의 측근이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던 천영우 전 수석의 글을 자신의 SNS를 통해 공유했다. 460자 분량인 천 전 수석의 글은 "북한이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을 보낸다고 하는데도 정부는 아무 항변도 못하고 북한 결정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46명 고귀한 천안함 용사들의 생명을 앗아간 주범을 보내는 것은 5.24 조치와 국제 제재를 조롱하는 것을 넘어 우리 군과 유족에 대한 너무나 뻔뻔한 모욕이고, 국민 자존심을 짓밟고 평화올림픽의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북한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쩔쩔매는 정부가 참으로 불쌍하고 창피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설사 김영철 부위원장이 천안함 사건에 관여한 게 사실이라 한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일가에 의한 1인 지배 체제 국가 북한에서 김 부위원장 개인이 자칫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대남 무력도발을 독단 결정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대남 무력도발의 '총책임자'는 결국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한 정권과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역대 보수정부도 모두 김일성(1994년)-김정일(2011년)-김정은(2015년)과의 대화를 추진했거나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예컨대 김영삼 정부는 백만이 넘는 사망자를 발생시킨 한국전쟁 남침 주모자이자, 김신조·판문점 도끼만행·KAL기·아웅산 등 대남 도발행위를 총지휘한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연평도 사태 이듬해인 2011년에도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가능성 타진을 포함한 비공개 대북 접촉에 나섰다. 김정일의 후계자 김정은에 대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2015년 신년기자회견에서 '조건 없이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때문에 보수 야당이 김영철 방한 반대를 내걸고 총력 '투쟁'에 나서고 있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정권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한 '특정 인물은 전범이어서 방한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투쟁'을 이어가는 배경에는, 김영철에 대한 한국민의 여론이 지극히 좋지 않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평창올림픽 직후부터 정치권은 사실상 6.13 지방선거 준비 체제로 넘어가게 되고,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보수진영의 표심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이른바 '적폐 청산' 수사도 평창올림픽 이후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게 법조계 안팎의 관측이다. 검찰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3월 초 소환 조사를 진행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국당이든 바른미래당이든 이 전 대통령 측이든, 정부에 비판적인 보수 여론의 결집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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