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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명 살해한 '로커비 테러범'의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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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명 살해한 '로커비 테러범'의 석방

[서정민의 '인샬라 중동'] 팬암 항공기 로커비 상공 테러의 진실은

성탄절을 불과 며칠 앞둔 1988년 12월 21일 미국의 팬암 항공기가 스코틀랜드의 로커비 지역 상공에서 폭발했다. 탑승생 259명과 마을 주민 11명. 모두 2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서방은 일제히 중동의 테러세력을 그 배후로 지목했고, 결국 리비아 정보부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결국 리비아 전(前) 정보장교 2명이 기소됐다. 네덜란드에서 열린 재판에서 스코틀랜드 판사들은 2001년 이들 중 한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한 유럽에서의 법정최고형이었다. 다른 한 명은 무죄를 선고받고 리비아로 귀국했다.

270명의 민간인 살해범, 본국에선 영웅대접

압둘바시트 알-미그라히(57)는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270명의 사망자를 낸 테러와 관련해 단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리비아 정보부 출신인 그는 테러발생 당시 '리비아아랍항공'의 안전총책임자이자 트리폴리에 위치한 전략연구소 소장이었다. 서방의 언론은 그가 리비아 정부의 사주를 받아 미국 항공기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감옥에서 8년간 복역한 '로커비 테러범'이 지난 달 20일 급작스레 석방됐다. 그를 태운 특별기가 트리폴리 공항에 도착하자 수천 명의 군중은 리비아와 스코틀랜드 국기에 손을 흔들고 노래를 부르며 환호했다. 알-미그라히가 비행기 문을 나서자 일부 군중은 비행기 계단에 꽃잎을 흩뿌려주기도 했다.

▲ '로커비 테러범'으로 8년간 스코틀랜드에서 복역한 압둘바시트 알-미그라히가 8월 20일 석방된 후 리비아 트피폴리의 한 병실로 들어가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는 비행기 문 앞에서 그와 포옹한 뒤 군중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손을 뻗어 올렸다. '270명 민간인 살해범'이 리비아에서 영웅대접을 받은 것이다. 리비아인 대다수는 서방이 리비아를 음해하기 위해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투옥시킨 것으로 믿고 있다.

반면 팬암 항공기 테러 사고의 미국인 희생자 가족들은 그의 석방을 용납할 수 없다며 울분을 표출했다. "민간인 수백명을 살해한 테러범이 어떻게 석방될 수 있는가"라고 그들은 여러 서방 방송에 나와 분노했다.

"인도적 결정"…배후엔 자원 전쟁 있어

이번 석방은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결정에 대해 '실수'라고 비판하며 유감의 뜻을 표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에릭 홀더 법무장관도 성명서를 내고 스코틀랜드의 방침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영웅 대접을 받는 '테러범'의 환영행사가 전 세계에 방영되자 미국은 더욱 거센 비난을 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다시 "매우 불쾌한 일"이라고 불만을 표시했고,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도 "우리가 본 리비아의 광경은 괘씸하고 역겨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처럼 미국 등 우방 및 희생자 가족의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도 알-미그라히를 석방한 것에 대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인도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케니 매카스킬 스코틀랜드 법무장관은 "말기 전립선암 판정을 받은 알-미그라히를 '온정적' 차원에서 본국인 리비아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장관은 "당초 리비아 정부의 요청을 거부했었으나 상태를 정밀 점검한 결과,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학적 소견을 받았다"며 "리비아로 가지만 곧 죽게 된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인도적 차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을 포함 국제사회의 해석은 상당히 다르다. 이번 결정이 동정적인 석방이 아니라 리비아로부터 석유를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로이터 통신은 알-미그라히의 석방을 계기로 영국이 아프리카 최대 석유 매장지인 리비아에서의 석유 개발활동이 더욱 원활히 진행될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통신은 영국 정부가 리비아에서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 셸 등 영국 석유회사의 석유 개발권 취득을 돕기 위해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었지만, 알-미그라히의 수감이 문제가 돼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는 리비아 측의 공식발언도 있었다.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이슬람은 알-미그라히와 특별기편으로 수도 트리폴리로 돌아오면서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이 석방을 결정한 것은 리비아의 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 개발 관련 계약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과의 석유, 가스 상업화 관련 논의에서 알-미그라히 문제는 언제나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며 "영국의 모든 이익은 알-미그라히의 석방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 양국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에 대해 영국 외무부는 "영국 정부와 리비아 사이에는 알-미그라히와 상업적 이해관계가 개입된 어떤 거래도 없었다"며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데이비드 밀리반드 외무장관은 "리비아 측의 이런 주장은 나와 영국 모두를 모욕하는 것"이라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한 거래설' 외에 법적 논란도 아직 끊이지 않고 있다. '알-미그라히가 진짜 범인이 아닐 수 있다'라는 주장이다. 아랍뿐만 아니라 유럽의 법조계와 언론에서도 이 문제는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알-미그라히의 개입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폭탄이 실린 가방에 남아있던 옷가지였다. 그가 입었다는 증거도 없었고, 다만 옷의 판매처로 확인된 말타의 옷가게 주인의 증언뿐이었다. 그 가게 주인은 알-미그라히가 그 옷을 샀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을 지켜본 UN 감독관 한스 코슐러에 따르면 그 증언에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가게 주인은 검사측이 제시한 사진들 중에 앞서 여러 사람이 옷을 구매했다고 지목했었다. 그 중에는 CIA 요원도 있었다. 나중에 가게 주인이 알-미그라히도 지목했을 뿐이다. 더불어 가게 주인은 옷을 산 사람이 키 180cm이상이고 50대 남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알-미그라히는 174cm의 키에 당시 나이는 36세에 불과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로커비 테러와 재판과정을 집중 조사해 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한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휴 마일스 기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아부 탈브와 요르단 출신 마르완 압둘 크리사트를 언급했다. 두 사람 모두 이란의 지원을 받는 첩보원이었고, 이 중 크리사트는 CIA의 자금을 받으며 활동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로커비 테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돼 있지만, 이상하게도 재판에서는 제외됐다는 것의 마일스 기자의 주장이다. 아부 탈브는 로커비 재판에서 증거를 제공한 대가로 평생 기소면책 특권을 부여받았다. CIA와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크리사트의 행보는 더욱 황당하다. 팬암 항공기 테러당시 기폭장치로 사용된 기압식 타이머(barometric timer)가 체포 당시 그의 차에서 발견됐지만 독일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그를 석방했었다.

결국 알-미그라히의 기소와 재판 모두 '정황적 증거'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정치적 재판이었다는 분석도 끊이지 않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노동당 전 하원의원인 탐 달옐조차 로커비 재판은 "정의를 상실한 것이며 알-미그라히는 희생양일 뿐"이라고 공식석상에서 여러 차례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이번 '테러범'의 급작스런 석방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논란이 되어오던 정치적 기소와 재판을 급히 마무리하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미그라히의 석방은 영국이 카다피에게 보낸 '선물'

로커비 테러와 그 재판은 사실 리비아와 미국 그리고 영국 간의 갈등 상황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항공기 폭파 사건에 앞서 1986년 미국은 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텍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리비아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그해 4월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카다피의 생후 15개월 된 수양딸을 포함해 41명이 숨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가 1988년 첩보원 알-미그라히를 보내 로커비 상공에서 팬암기를 폭파시킨 것으로 당시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몰아갔다.

미·영 합동수사팀은 폭파 사건의 배후로 리비아를 지목했고 용의자 인도를 거부하던 리비아는 1992년부터 시작된 유엔안보리의 각종 제재로 타격을 입고 경제가 피폐해졌다. 결국 1999년 미국과의 화해를 위해 알-미그라히 등 2명의 신병을 인도했다.

재판이 끝난 이후에도 카다피 국가원수는 포기하지 않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으며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알-미그라히의 석방은 2003년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서방과의 본격적인 관계개선에 나선 카다피에 대한 영국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9월 1일은 카다피의 혁명과 집권 4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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