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의 실적은 눈부시다. 각 기업의 2분기 실적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분기에 32조5100억 원의 매출과 2조5200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1분기(매출 28조6700억 원, 영업이익 4700억원)에 비해 매출은 14%, 영업이익은 무려 436%나 뛰어올랐다. LG전자도 2분기 영업이익이 1조 원을 돌파하면서 전 분기의 부진을 떨쳐냈다.
현대자동차는 해외공장의 선전에 힘입어 6월 기준 미국의 시장점유율이 7.54%로 높아지는 등 영업이익이 1분기보다 1조 원 가까이 증가한 1조2137억 원을 기록했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번지면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해 일부 공장의 가동을 중단해야 했던 1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들 기업을 필두로 국내 10대 기업들은 9조494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전 분기보다 280% 증가한 수치다. 실적 호조는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 주가가 8일 현재 78만1000원을 기록하는 등 '꿈의 100만 원대'라는 기대감을 불러오면서 코스피 지수도 1600선을 넘어섰다. 현대증권은 9일 3분기에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3조8900억 원으로 예상하면서 '깜짝 실적'을 넘어 경기 회복으로 넘어가리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2분기 실적을 발표한 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위기에 대응하는 체질개선을 이루었고, 과감한 비용절감 등 발 빠른 대응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었다고 자찬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기업들의 위기관리보다 환율효과 등 외부적 환경이 한국 기업에 유리하게 맞아떨어져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신중론도 있다. 환경이 변하면 다시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한국 대기업들은 2분기 들어 예상외의 '깜짝 실적'을 잇따라 발표했다. ⓒ뉴시스 |
금융화 못 따라간 '촌놈' 한국 제조업…가격·성능 앞서는 '역샌드위치 현상'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김병권 부원장은 4일 '한국 대기업의 힘과 한계'라는 보고서에서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금융화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촌놈' 행세를 했던 것이 오히려 행운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GM과 같은 외국의 전통적인 제조업체가 금융업에 역량을 집중하다가 금융위기로 파국을 맞은 것과 반대로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 부문에 집중해온 것이 위기를 맞아 강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김 부원장은 보고서에서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시행된 자본시장 통합법이 만약 수년 전에 발효돼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금융투자업에 뛰어들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한국이 가장 우려한 부분은 수출 감소였다. 불황으로 수요가 줄었고 각국이 자국 기업을 살리기 위해 보호 무역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상황은 역전됐다. 소비시장의 절대적인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한국 기업들은 오히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유수의 외국 기업들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나갔다.
선봉에 선 업종은 단연 제조업이었다. 반도체·LCD·자동차·휴대전화 등 수출 물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LG 전자, 현대·기아차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지식경제부가 1일 발표한 '8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2분기 삼성과 LG의 세계 휴대전화 시장점유율은 30%를 넘어섰다. 현대자동차도 미국과 중국에서 시장점유율을 각각 7.3%, 7,7%까지 끌어올렸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된 셈이다. LG경제연구원는 지난 7월 '우리나라 수출경쟁력 진단'이라는 보고서에서 "첨단제품을 중심으로 우리나라가 상위 기업의 점유율을 뺏는 속도가 개도국이 저부가가치 상품에서 우리를 따라잡는 것보다 빠른 '역샌드위치' 현상이 대두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엔 선진국의 기술력과 개발도상국의 저가 공세 속에 끼어 있던 한국 제품이 불황을 맞아 오히려 성능과 가격 면에서 선호하는 제품이 된 것이다.
▲ 제조업 기업의 '분발'로 우리나라는 2분기 수출 실적이 크게 개선되면서 유수의 기업들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나갔다. ⓒ 지식경제부 제공 |
"기업 실적의 절반 이상이 환율효과"
하지만 기업들의 깜짝 실적의 배후에는 급격하게 올라간 환율이 있었다는 것이 여러 연구 기관의 진단이다. LG경제연구원는 같은 보고서에서 "2009년 1월부터 4월까지의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1년 전에 비해 약 43% 절상되었다"며 "이에 반해 일본은 같은 기간 오히려 8.3% 평가절상되어 가격 경쟁력이 크게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역시 지난 8월에 발표한 '최근 위기에 빛난 기업의 교훈'이란 보고서에서 "최근 한국 기업의 화려한 실적은 경쟁력 확보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절반 이상이 환율효과, 외국 기업의 수비적 전략 등 외부 여건에 기인한 것"이라며 "특히 엔화와 원화의 엇갈린 환율변동으로 2분기 한국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1년 전보다 일본에 비해 36%나 유리해졌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지난해 말부터 환율은 급격히 올랐다. 지난해 4분기에 1362.79원으로 치솟은 환율은 올해 1분기에는 1415.22원을 기록했다. 2분기 들어 1288.68원으로 떨어졌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었다. 경쟁국인 일본의 달러 대비 엔화가치는 지난해 3분기 107.52엔에서 4분기 96.16엔으로 떨어졌으며 올해 1·2분기에도 각각 93.77엔, 97.41엔으로 강세를 이어갔다.
지식경제부도 8일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환율이 수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상반기 수출입 실적이 발표된 15개국 중 제조업 비중이 큰 한국·일본·대만·독일 등에서 우리나라 환율이 가장 크게 올랐다. 6월 기준으로 달러 대비 원화는 21.5% 올랐으며 대만은 8.2%, 중국은 -0.9%의 오름폭을 보였다. 환율의 절상폭이 차이가 난 만큼 상대적으로 경쟁을 계속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 제조업 기업들의 선전에는 높은 환율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이 여러 연구기관들의 견해다. ⓒ한국은행 제공 |
강만수 특보도 "환율효과 제외하면 영업이익률 -10%"
이렇게 급격히 오른 환율을 고려하면 대기업들의 2분기 '어닝 서프라이즈'도 착시 현상일 가능성이 있다. 해외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경우 이전과 같은 액수의 달러를 받아도 환율이 올라 원화가치로 표시되는 매출액만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에 임명된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은 6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의 상반기 실적에서 환율효과를 제외하면 영업이익률이 -10%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 장관 시절 비판받은 환율 정책에 대한 옹호 차원에서 나온 발언이지만 거꾸로 해석하면 환율효과로 인한 수출 증가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환율은 8월 말 기준으로 1249원까지 내려갔다. 기획재정부는 8일 거시경제안정보고서에서 "경상수지 흑자, 외국인의 주식 순매수, 은행 해외차입 재개 등으로 외환수급여건이 개선돼 환율이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외국인 주식투자가 3월 이후 약 14조 원을 순매수하고, 수입 감소로 7월까지 261.5조 원의 '불황형 흑자'가 계속돼 달러가 들어옴으로써 환율 변동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주가가 100만 원대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과거에도 몇 번 100만 원 돌파를 시도한 적이 있지만 번번이 실패해 징크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외국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는 냉정하다. JP모건은 7일 삼성전자가 3분기 들어서는 실적을 이끌었던 휴대전화와 TV 부문에서 이익이 축소되는 등 조정국면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며 목표주가를 기대에 못 미치는 78만 원으로 예상한 바 있다.
중국 내수 부양으로 수출 늘어…그 이후는?
한국 대기업의 '깜짝 실적'에 기여한 또 하나의 원인은 중국이다. 8월 한달에만 중국에서 85만4000대의 승용차가 팔렸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90% 급증한 수치다. 현대자동차의 중국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는 이 같은 바람을 타고 8월까지 중국에서 35만1529대의 자동차를 팔았다. 베이징현대의 지난해 전체 판매량은 29만4508대였다.
자동차만이 아니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중국의 휴대전화와 TV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삼성전자는 3세대 이동통신 시장 중 TD-SCDMA 부문에서 23.6%, CDMA-2000(EVDO) 부문에서 44.1%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며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휴대전화 전체 시장에서도 노키아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LED TV분야에서는 점유율 85.2%로 사실상 독식하고 있다. 50인치 이상 대형 LCD TV 시장도 19.2%의 점유율로 1위다.
LG전자는 디지털 TV시장에서 지난해 같은 달보다 50% 이상 판매량이 늘면서 다국적 기업 중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휴대전화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100% 가까이 더 팔았다. 석유화학 기업 역시 중국의 수요 증가에 힘입어 경제 위기의 타격을 줄일 수 있었다. LG화학은 중국의 수요 증가로 2분기 영업이익이 사상 최대인 6603억 원을 기록했다.
한국 기업들의 이 같은 선전은 중국이 경제위기 이후 4조 위안(728조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해 내수 경기를 부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자동차 판매 촉진을 위해 세제 감면 정책을 폈다. 세금 혜택을 받는 1600cc 이하 모델에 현대차가 역량을 집중하면서 판매량이 늘었다. LG전자의 경우 농촌에서 판매하는 가전제품에 13%의 정부 보조금을 지불하는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에 입찰해 중국 26개 성의 농촌지역에 LCD TV를 공급하는 업체로 선정된 점이 주효했다.
미국에서 현대·기아차의 선전도 자동차 소비를 촉진하려 쏟아 부은 보조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지난 8월에만 현대차는 미국에서 1년 전보다 47% 많은 6만467대를 팔았고 기아차는 60.4% 많은 4만198대를 팔았다. 하지만 이는 미국 정부가 한달 새 30억 달러를 신차 보조금 정책에 투입해 수요를 늘린 탓이다. 현재 정부의 재정확대로 끌어올린 수요가 경기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한국 기업들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 현대기아차 정몽구회장(오른쪽)과 궈진룽(郭金龍) 중국 베이징 시장. 현대자동차의 합작기업인 베이징현대는 올해 들어 중국의 적극적인 경기부양으로 8월까지 35만 대의 자동차를 판매했다. ⓒ뉴시스 |
조선업 신규 수주 '뚝'…해운업계는 초비상
수출량에서 10%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업은 위기를 맞고 있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선박 수출량은 지난해보다 33.6%나 오른 252.4억 달러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작년 상반기까지 미리 수주했던 선박 수출에 따른 효과다. 모건스탠리는 8일 보고서에서 올해 선박의 신규 수주가 작년보다 89% 줄었다고 밝혔다.
선수금을 받아 운영하는 조선업의 특성상 신규물량이 없는 상태에서 기존에 수주한 선박을 만들기 위해 자금을 계속 투입하다 보니 자금 사정도 악화되고 있다. 지난 8월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 등 국내 '빅3' 조선사의 현금성 자산이 6개월 사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수주량 1위를 자랑하는 중국의 위협도 문제다. 조선시황 전문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지난 7월 전 세계 조선 수주량인 634만 톤에서 중국이 차지한 물량은 74%인 470만 톤이었다. 저가 수주를 내세워 얼마 되지 않은 신규 선박 발주를 싹쓸이하는 형국이다.
지식경제부는 "2년치 이상의 수주물량이 확보되어 있어 수출 호조가 지속될 것"이라 전망했지만 경제 위기로 무역량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수주량이 쉽게 회복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미 무역량이 감소한 상황에서 경기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미 수요를 초과한 선박 공급이 늘어날 리 없기 때문이다.
수송량 급감으로 운임마저 떨어진 해운업계는 이미 2분기부터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진해운, 현대상선, STX팬오션, 대한해운 등 대표적인 해운회사의 2분기 영업이익은 7070억 원의 적자를 봤다. 특히 대한해운은 -35.8%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해운 4사의 총 매출액 역시 지난해 하반기보다 38.6%가 감소했다.
▲ 선박 수주량 감소는 세계적인 무역 침체로 물동량이 감소하면서 쉽게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뉴시스 |
"상반기 실적 하반기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
대외무역 의존도가 80%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수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수출 감소를 막기 위해 고환율 정책 등을 함부로 쓸 경우 자칫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경제 위기가 사라졌다며 안심할 때가 아니고 최근 들어와서 선진국에서는 경제 위기의 2차 여진 가능성도 거론되는 상황"이라며 "상반기 실적이 하반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정부 정책 입장에서 수출을 위해 무리한 고환율 정책을 추진할 경우 현재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는 물가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며 "여러 내수경기 부양책 때문에 부동산 등의 자산 가치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물가 상승이 더해진다면 결국 기업의 원가 인상 압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키코 사태, 그 이후 지난 8월 24일 서울고법은 화학제품 수출기업 KPX화인케피탈이 키코(KIKO)의 효력을 중지해 달라며 신한·시티·SC제일은행을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키코는 환율이 지정 범위 이상을 넘어가면 계약금액의 2~3배를 시장가보다 낮은 환율로 팔아야 돼 손해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옵션상품이다. 경제 위기가 불거질 당시 환율이 급증하면서 환헤지 수단으로 키코를 이용하던 중소기업들이 대규모로 피해를 본 바 있다. 당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들은 은행 측에서 키코의 위험을 충분히 알리지 않고 가입을 권유했다며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에 열린 1심에서는 일부 중소기업이 은행에 승소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첫 상급심에서 패소함으로써 소송이 진행 중인 다른 중소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환헤지피해기업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소속 250개 기업의 환차손은 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태환 중소기업중앙회 국제통상실 부장은 "실제로 실현된 손실을 매달 집계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평균 환율 1300원을 기준으로 계산한 결과 대략 3조 원의 손실이 있었고 공대위의 일부 중소기업은 문을 닫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이번 가처분 기각 판결이 본안인 부당이익 반환청구소송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며 "가처분 소송을 판결한 재판부도 은행의 잘못에 대해 인정한 부분이 있는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금융감독원은 지난 4일 제제심의위원회에서 키코와 관련해 한국시티·신한·외환은행 등 5개 은행에 내리기로 했던 징계를 유보하기로 결정했다. 은행 측에서 현재 진행 중인 소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판단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은행들이 충분한 설명 없이 키코를 판매한 책임을 인식했음에도 은행들의 피해를 우려해 징계를 미룬 것은 이중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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