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대화의 의지가 없어 보였던 최 국장은 세미나 이후 열린 강연에서 다른 말을 꺼냈다. 그는 이 강연에서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미 사이에 물밑 대화가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이를 두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물밑 회담의 결과로, 이제는 협상이나 회담을 수면 위로 올리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는 최 국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정 전 장관은 '조건절'에 주목해서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으면'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여기서 조건절에 주목해 보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가 확실시될 경우 회담에 나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 사람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려면 일단 조건절을 잘 봐야 한다. 조건절은 안보고 주절만 가지고 북한의 의도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면 북한의 말을 '오독'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외교적 방식으로 풀려는 의지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정 전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을 할 것처럼,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본인 임기 동안에는 계속 상대방에게 책임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을 압박하고 한국에 무기를 팔기 위해 북핵을 하나의 구실로 이용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결국 누가됐든 양측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 중재자가 필요한데 한국은 이미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지렛대를 상당 부분 상실한 상황이다. 정 전 장관은 "사드 문제를 서두르지 않고 일단 2기만 갖다 놓고 나머지는 시간을 좀 끄는 한편, 중국에게는 북핵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미북 간 접촉이 있어야 하니 "우리 둘이 중재해보자" 라고 중국을 끌어들였어야 한다"며 "사드 배치가 움직일 여지를 없애 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만 "상황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국제정세가 뒷받침되지 못해 이번에는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라도 전략은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전 장관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국제정치다. 각 국가의 내부적인 요인이 있고 상황의 변동이 있을 수 있다"며 "미국이 대중 압박을 완화하거나 중지하는 과정에서 틈새가 열렸을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는 24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북미국장이 러시아 에너지안보연구소가 주최하는 국제 핵 비확산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지 않으면 6자회담으로 복귀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요.
최 국장은 "미국의 대조선(북한) 적대시 정책과 제재를 통한 압살 정책에 맞서기 위해 핵 보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권 수호를 위한 유일한 길은 핵 보유 뿐"이라면서 자신들은 이라크와 리비아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 국장의 이같은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세현 : 북한 사람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려면 일단 조건절을 잘 봐야 합니다. 보통 조건절은 안보고 주절만 가지고 북한의 의도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면 북한의 말을 '오독'하게 됩니다.
북한은 보통 상대방의 정책이나 입장을 요약해서 설명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들이 이렇게 대응을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최 국장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으면'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여기서 조건절에 주목해 보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가 확실시될 경우 회담에 나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절에만 주목하면 북한이 이렇게 말했는데 무슨 대화냐며 대화 무용론, 협상 무용론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절까지 같이 보면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두고 '북한은 대화할 생각이 없다, 따라서 비핵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안하겠다는 것을 하도록 만들려면 조건절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프레시안 : 미국 입장에서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지난 5월 3일(현지 시각) 국무부 직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북한에 대해 △군사적 공격 △정권교체 및 붕괴 △인위적 통일 가속화 등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3노(NO)' 정책을 밝혔고, 이게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정세현 : 미국은 북한의 정권교체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북한에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 선언이 자신들을 대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 인센티브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북한은 외부로부터 인위적인 정권교체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체제는 끄떡없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도 아닌데 그걸 가지고 미국이 마치 대단한 것을 해준 것마냥 착각하고 있다고 되받아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는 지금 실재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적 압살과 위협을 철회해달라는 겁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나 발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양측의 문화적 차이가 심각하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북한이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자신들의 틀로 생각하고 재단하고 이야기합니다. 북한을 다루려면 북한의 말을 정확히 읽어야 하는데, 자신들의 화법으로만 북한을 판단하는 겁니다.
실제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발생한 일은 같은 언어를 쓰는 남북 간에도 있었습니다. 1990년 가을 1차 총리급 회담이 개최된 뒤 약 한 달이 지난 후에 2차 총리급 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남측 회담 대표로 강영훈 총리가 평양에 올라갔는데 강 총리를 맞은 김일성이 강 총리가 주석궁으로 들어오자 그를 와락 끌어 안으며 '강영훈 총리 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각하를 대통령에게만 붙이는 우리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다른 나라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이렇게 부릅니다.
이후에 김일성은 강영훈 총리와 마주 앉아 '이번 회담이 잘 돼서' 평소에 만나고 싶었던 노태우 대통령과 만남도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북한이 남한에 정상회담을 제안한 셈이 된 겁니다. 그래서 당시 남한 언론에서는 김일성이 남북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북한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김일성은 분명히 '이번 회담이 잘 돼서'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직전 회담인 1차 총리급 회담에서 제안했던 것을 남한이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당시 회담 대표였던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는 1차 회담에서 긴급 선결과제 3가지를 제시합니다. 이미 1년 반 동안 회담을 준비해서 의제를 합의했는데 갑자기 긴급하다며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들고 나온 겁니다. 그 내용은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수용 △문익환-임수경 석방 (국가보안법 철폐) 등이었습니다.
미군 철수하고 연방제 수용하고 보안법 철폐한 뒤에 노태우 대통령이 김일성 만나면 그게 투항이지 정상회담입니까? 그러니까 북한의 선결 과제 속에는 이미 남한이 사실상 투항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이게 이뤄져야 남한 정상과 만날 수 있다고 밝힌 겁니다. 그런데 이 조건절을 빼고 뒷부분만 해석해 버렸고, 그래서 김일성이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바란다는 보도가 나오게 된 겁니다.
미국은 북한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대해 오판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북부의 월맹을 융단폭격하면 이들이 쉽게 손을 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월맹은 손들고 나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베트남은 중국의 식민지나 속국과 비슷한 처지로 계속 시달렸고 이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또다시 고충을 겪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국과 전쟁을 벌인 건데 베트남 국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외국의 침략이나 식민 세력에 시달리면서 강자를 대상으로 버티는 DNA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쉽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재나 압박으로 쉽게 무릎을 꿇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버틸 수 있는 내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은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 제재 해봐야 소용없다. 북한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 시절에 풀뿌리 뜯어먹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며 북한이 제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허투루 흘려 들으면 안되는 대목입니다.
프레시안 : 최선희 국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자신들의 핵 보유를 인정하라는 의미도 있어 보입니다.
정세현 : 핵 보유국 이야기는 자신들의 핵 폐기만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핵 폐기만 요구할 게 아니라 핵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끼리 군축회담을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게 터무니 없는 이야기 같았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6번이나 했고, 실질적으로 핵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북한이 핵을 가졌다고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북한의 핵 보유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회담을 통해 북핵을 폐기시키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핵을 버릴만한 경제적 대가를 줘야 하는데, 북한은 리비아나 이라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리비아의 경우 핵을 포기하면 경제적 지원을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핵을 폐기했다가 나중에 핵 능력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점을 확인하고 서구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라크의 경우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의혹 때문에 미국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런 무기는 없었고 사담 후세인은 제거됐습니다.
북한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자신들은 결코 이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핵화를 전제로 한 회담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비핵화를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이 핵 무기를 가지고 절대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평화협정이자 북미 수교입니다. 협상 차원에서 제일 높은 가격을 부른 겁니다.
프레시안 : 최 국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미국과 대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세현 : 비확산 회의에서는 회담에 나가지 않겠다고 해놓고 강연에서는 미국과 물밑 대화를 계속 해왔다고 말하는 것은 물밑 회담의 결과로, 이제는 협상이나 회담을 수면 위로 올리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또 쿠알라룸푸르와 제네바, 오슬로 등 북미 간 1.5트랙도 북한으로서는 중요한 대화 채널 중 하나일 겁니다. 실무급이라도 할지라도 뉴욕 채널을 통해 북한과 미국이 계속 만나고 있다는 것도 북한으로서는 나쁜 신호는 아닙니다.
트럼프, 북핵 해결 의지 있나
프레시안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3일(현지 시각) 이란이 지난 2015년 체결된 핵 협정인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을 여러 번 위반했다면서 자신들도 협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앞으로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정세현 : 당시 이란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독일과 유럽연합까지 참여해서 협정을 만들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공신력이 있는 협정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걸 깨기 위해서 이란이 협정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누명을 씌우면서 자기들도 이행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은 2005년 9.19 공동성명 합의가 발표된 그다음날 방코델타아시아(BDA)를 제재하면서 북한의 자금줄을 압박했습니다. 이에 9.19 공동성명이 이행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겪은 뒤 미국과 협상을 해도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트럼프 정부가 이란 핵 협정에 대해 위와 같은 입장을 밝히면서 미국과 협상이 의미가 없다는, 이른바 북한판 '협상 무용론'이 나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됐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협상 무용론을 주장하면 자기들도 협상 무용론을 이야기하고 대북 제재와 압박을 강화할 겁니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 공포를 이용해 안보 불안감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이른바 '무기 장사'를 하려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이란 핵 협정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동안 북한에 수십억 달러를 건네줬지만 북핵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합의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합의가 깨졌다면서 북한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향후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협상 무용론을 주장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적 해결을 이야기했다가 다시 또 군사적 조치를 암시하는 등 계속 발언이 왔다갔다하고 있는데요. 이건 북핵 문제를 협상으로 풀지 않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협상 전 일종의 기선 제압이라고 봐야 할까요?
정세현 :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을 할 것처럼,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본인 임기 동안에는 계속 상대방에게 책임을 넘길 것으로 보입니다. 본인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북한이 여기에 응하지 않고 새로운 조건을 자꾸 내놓는다는 식으로 대치상황을 이어가는 방식을 취하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세게 이야기하면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나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대화와 외교적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트럼프 대통령 혼자 날뛰는 거고 정작 관료들은 대화로 풀려고 하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트럼프 정부가 절묘하게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해결할 것처럼 하면서 더 꼬이게 만드는, 이들 간에 일종의 역할 분담을 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러한 전술을 구사하는 이유는 중국을 압박하고 한국에 무기를 팔기 위해 북핵을 하나의 구실로 이용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오는 11월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이 있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북핵 문제 해결 방향이 순방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을까요?
정세현 :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화로 풀겠다는 이야기보다는 계속 북한을 압박하고 제재하겠다는 한국의 다짐을 받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패턴을 읽었기 때문에 좋은 말로 살살 달래서 한미 공조를 통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계속해야만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있다고, 북한이 굴복하는 식으로 협상에 나올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공동성명을 발표하려고 할 것입니다.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북핵 문제 해결의 모멘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미국의 의도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은 건가요?
정세현 : 속절없이 끌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도 우려되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원고를 보고 그대로 읽기 보다는 돌발 발언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국회에 와서 북한을 욕하고 '화염과 분노', '완전 파괴' 등등 지금까지 했던 말폭탄을 한꺼번에 쏟아 내면서 문재인 대통령도 동의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기립박수를 치는 국회의원들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트럼프 대통령은 더욱 기고만장해지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는 겁니다.
프레시안 :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젖먹던 힘을 다해 설득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정세현 : 오전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정책 기조나 철학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부시 대통령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에 비하면 지극히 일반적인 인물입니다. 정치가인 아버지 밑에서 보고 배운 것도 있었고요.
또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기 전에 대통령이 주변 참모들이 이를 철저하게 준비했을 겁니다. 지금 청와대가 이때만큼 준비가 돼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이 워낙 럭비공이긴 하지만, 적어도 남한 정부가 정부로서 책임을 가지고 있다면 북핵 문제에 대한 청사진은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세현 :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도 문제고 일본 중의원 총선 결과도 그렇고 남한 정부에게 좋지 않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지난 22일 여당인 자민당과 연립 여당인 공명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면서 아베 신조 총리는 이 여세를 몰아 일본을 정상국가로 탈바꿈하려고 시도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되도록 트럼프 대통령 재임 중에 끝내려고 할 겁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북한을 걸고 넘어져야 합니다. '북한이 저렇게 미사일을 쏘고 있는데 일본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우리도 전수방위를 넘어서 선제적 타격 가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등의 여론이 힘을 얻어야 개헌을 하고 정상국가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의 압승에는 김정은의 공이 컸습니다. 북한이 군사적 행동을 벌이니까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일본 보수층이 자민당으로 결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나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안이 먹혀들어 갈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을 먼저 방문한 뒤 한국에 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는 아베 총리와 약속한 내용 위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미일 정상회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에 따라 한미 정상회담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미북 중재, 한국이 해야 하지만…
프레시안 : 중국의 당 대회가 마무리되면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없을까요?
정세현 : 시진핑 주석은 중화민족 부흥과 '중국몽'을 강조했습니다. 이건 군사적으로 강력했던 한나라와 문화적으로 번성했던 당나라, 소위 '강한성당' 시대의 중국의 위상을 재건하겠다는 뜻입니다.
프레시안 : 사실 미국과 북한 사이의 중재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세현 :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드를 배치해버리면서 레버리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드 문제를 서두르지 않고 일단 2기만 갖다놓고 나머지는 시간을 좀 끄는 한편, 중국에게는 북핵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미북 간 접촉이 있어야 하니 "우리 둘이 중재해보자" 라고 중국을 끌어들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드 배치가 이렇게 움직일만한 여지를 없애 버린 겁니다.
하지만 사드 배치가 실제 이뤄졌고 현재 한국은 미국에 너무 예속돼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미국편에 서서 북한을 압박했는데, 그러다 보니 북한 입장에서는 우리가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들이 직접 미국과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게다가 만약 북한이 처음부터 핵 군축 회담으로 들어가자고 하면 우리는 아예 그 회담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습니다. 동아시아에 더 이상의 핵은 없어야 하지 않겠냐고, 만남의 모멘텀을 만들어 놓고 시작해야 한다면서 이렇게라도 일단 만나자고 하면 미국도 거절할 명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미국도 세계 곳곳에 벌여 놓은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중국과 이 정도로 적절하게 세력균형을 이루고 다른 곳을 공략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중국의 중재로 미북 접촉과 대화가 성사될 수 있고 이걸 확대하는 회담이 열렸을 때 우리가 잘못하면 끼어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국제정세가 뒷받침되지 못해 이번에는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라도 전략은 세워야 합니다.
또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국제정치입니다. 각 국가의 내부적인 요인이 있고 상황의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대중 압박을 완화하거나 중지하는 과정에서 틈새가 열렸을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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