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한미 FTA 재협상과 방위비 분담금 압박이라는 청구서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와 남북관계에서 우리의 주도권을 확인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대통령의 표현대로 드디어 우리가 '운전석'을 잡았지만,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도권을 확보한 우리가 실제로 한반도 정세에서 긍정적 성과를 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오래전부터 미국 정부가 일관되게 동의해온 일반론이자 원칙이었다. 남북대화 지지 역시 미국 정부가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포괄적 원칙이었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FTA 재협상과 방위비 인상이라는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얻어낸 한반도의 '운전석'이 실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비싼 대가만 지불한 '립서비스'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미국에게서 운전석을 찾아왔지만 정작 북핵문제에 진전이 있을 지는 의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시한 핵동결 입구론만 해도 생각처럼 만만한 게 아니다.
북한이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영변 등의 핵시설을 검증가능하게 동결하는 댓가로 우리도 북에게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대안으로 거론되었던 한미군사훈련 축소와 폐지는 이번 한미정상회담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스스로 불가하다고 못을 박았다.
북한과 중국이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군사훈련 축소중단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북의 핵동결을 이끌어낼 방법은 사실상 없다. 당장의 조건에서 아무 댓가 없이 북한이 스스로 핵동결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결국 현 상황은 입구조차 열기 힘든, 운전석은 잡았지만 자동차를 출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는 충분히 높이 사지만 핵문제의 당사자인 북한은 꿈쩍도 하지 않을 태세다. 이미 북한은 '핵 포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김정은의 북한은 과거와 분명히 다른 핵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김정은의 핵전략은 협상보다 핵보유 자체를 우선의 목표로 하고 있다. 협상에 목을 매는 게 아니라 협상이 없는 동안 오히려 핵능력 고도화와 사실상의 핵보유국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다.
대북제재에 중국이 동참하는 것에 대해서도 <노동신문> 공식논평을 통해 중국을 직접 거명하며 거센 비난을 하고 있는 것도 이것 저것 눈치보지 않고 일단 핵보유를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정은의 핵전략은 이미 헌법과 법률에 핵보유국을 명시화했고 당중앙위 전체회의를 통해 '경제-핵 병진노선'을 공식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노동당의 자진해체 이전에는 핵보유를 포기할 수 없도록 못박아 버렸다. 7차 당대회를 통해 북한의 핵대국, 핵강국의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 북한에서 핵포기는 당노선과 헌법을 위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거의 매주 간격으로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는 것은 당분간 협상의 기대보다는 자신의 스케줄대로 핵능력을 완성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은 향후 비핵화와 평화체제 협상을 병행함으로써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을 구상하고 있다.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통일 특보의 발언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이는 중국의 이른바 '쌍중단, 쌍궤병행' 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북한의 핵전략은 어긋나있다. 이미 북한은 비핵화와 평화체제 병행론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2015년 당창건 70주년 기념식 이후로는 선 평화체제, 후 비핵화로 더욱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당장 2016년 초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 중국이 비핵화와 평화체제 병행론이라는 이른바 '왕이 이니셔티브'를 제안했지만 북한이 거부하고 말았다.
결국 지금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불편함을 무릅쓰면서까지 핵동결 협상을 시도하고 비핵화와 평화체제 병행을 추진하려 해도 정작 북한은 핵동결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비핵화를 논의하는 평화체제 협상에도 관심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어떤 경우에도 핵포기를 수용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고 이는 곧 북핵진전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추진하려는 문재인 정부에게 한발짝도 나가기 어렵게 하는 구조적 현실이 되고 있다.
북핵문제의 진전이 여의치 않은 조건에서 과연 남북대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대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이 역시도 운전석은 잡았지만 시동을 걸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북한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민간단체의 인도적 지원 접촉마저도 매몰차게 거부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북한이 남조선 집권자의 친미사대와 대미굴종 운운하며 감정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김정은 시대의 대남전략은 과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김정일 시대의 대남전략은 민족공조를 내세워 북미갈등의 국면에서 남측을 우군화하는 한편, 관계 개선과 교류 협력을 통해 남측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북한은 남북관계를 통해 얻을 게 별로 없다고 인식하게 됐다. 어렵사리 남북이 합의해도 정부가 바뀌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도 지켜봤다. 김정은의 대남전략은 본질적으로 남쪽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의존하지도 말자는 것이고 결국은 남북관계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새로운 대남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과거와 같은 경제적 지원 차원의 남북관계가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북한은 남북이 각자도생하자는 이른바 '두개의 조선'(Two Koreas) 전략으로 선회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과 체제 위기를 일단 넘겼다는 자신감과 함께 정치경제적으로 나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제 갈 길을 알아서 가겠다는 '마이웨이' 전략이다.
핵보유로 안보를 챙기고 시장 확대로 경제를 회복함으로써 이제 체제위기가 아닌 체제유지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판단이다. 경제가 먹고 살만하고 스스로 버틸 만하면서 남북관계를 통한 경제적 지원과 협력에 그리 목말라 하지 않는다. 드레스덴 선언 등 박근혜 정부의 대화 제의와 대북지원 제안에 시큰둥했던 이유다. 경협과 사회문화 교류는 관심 없고 '투 코리아'의 대외 환경으로서 전단 살포와 군사 훈련 중단에만 관심을 보인다. 2014년 국방위 중대제안 이후 일관되게 정치군사 이슈만을 대화의제로 요구하는 이유다.
김정은의 '투 코리아' 전략은 2015년 광복절을 기해 남측보다 30분 늦은 시간으로 북한의 표준시간을 변경한 데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정치적 경제적 분단을 이제는 일상의 분단으로 완성하겠다는 의도다. 남북이 서로 다른 나라라는 인식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이 아닌 상호 국가성의 강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제안한 경협과 사회문화 교류는 애써 무시하면서 금강산 병충해 방지를 위한 협력과 개성공단에 메르스 검역장비 제공은 북이 먼저 요구하기도 했다. 민족이라는 이유로 통일을 강조하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이웃나라의 긴급사태에 대한 즉각적 반응에는 신속한 모습이다. 민족성을 강화하는 교류협력은 거부한 채 국가의 안전에 필요한 것들은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모양새다.
김정은 체제는 남북대화에 대해 기존의 적극적 필요에서 소극적‧원론적 대응으로 선회했다. 자신에게 도움에 된다면 남북대화를 마다하지 않지만 과거처럼 대화와 교류 그 자체를 절대시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북이 원하는 대로 나온다면 대화에 나서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경제적 지원따위 바라면서 남북대화에 나서지 않는 다는 게 지금 김정은의 생각인 셈이다.
운전석을 잡은 문재인 정부의 희망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북핵문제는 이미 최악의 상황이다. 핵보유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김정은의 핵전략은 문재인 정부의 핵동결 입구론도, 평화체제 병행론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태세다. 북핵문제의 교착은 그 자체로 남북대화를 제약하게 된다. 남북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남북대화에 올인하지 않는 김정은의 대남전략도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힘들게 하는 구조적 제약요인이다.
경제적 지원이라는 당근으로만 남북대화를 접근한다면 향후 남북관계는 십중팔구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의 핵전략과 대남전략 모두 문재인 정부에게는 풀기 힘든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과거와는 다른 창의적이고 합리적인 대북전략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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