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더러 진보 쪽에서 자꾸 '종북몰이를 한다', '색깔론을 편다'고 하는데 저는 종북이나 빨갱이 그런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 좌파라는 말도 안 쓴다. (중략) 안보관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걸 종북몰이나 색깔론으로 규정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소리다."(유승민, 1월 31일 <뉴스1> 인터뷰)
그러나, 지난 19일 한국방송(KBS) 토론회에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보여준 모습은 매우 전형적이고 구식의 종북몰이였다. 120분의 토론 시간 중 절반이 외교·안보·통일 영역에 쓰였는데, 토론의 전반적 수준은 한때 유행어가 됐던 "김정은 개OO 해봐"를 끝없이 연상시키는 색깔 검증에 그쳤으며, 놀랍게도 이를 주도한 것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아니라 '새로운 보수'를 내걸고 있는 유 후보였다.
유 후보는 시작부터 송민순 회고록 사태를 꺼내며 문재인 후보의 '기억력'을 물고 늘어졌다. 이른바 '송민순 회고록' 사태는 지난 2007년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유엔(UN)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한 한국 정부의 '기권' 표결에 앞서, 한국이 찬성표를 던질 경우 북한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를 국정원과 외교부 등을 통해 알아보려 했다고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회고록에서 주장하며 벌어진 논란이다.
유 후보는 이 사건을 꺼내 들며 문 후보가 당시 북한에 '의견'을 물었는지 여부를 두고 쏟아진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이 때마다 달랐다고 공격했다. 외교·안보라는 굵직한 이슈에서 입장을 번번이 번복하거나 심지어는 뭉개는 사람으로 문 후보를 비판하고 싶었던 점은 이해된다. 그런데 유 후보의 질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차 말꼬리 잡기 수준으로 비화됐다. 이는 전혀 유승민답지 않은 모습이다.
토론을 돌이켜 보자. 문 후보가 "북한에 물어본 것이 아니라 국정원과 해외의 많은 정보망을 통해 북한의 반응을 판단해보도록 했다"고 하자, 유 후보는 "그게 뭐가 다르냐"고 했다. 다시 문 후보가 비슷한 설명을 내놓자 유 후보는 "누구한테 물어봤느냐"며 흡사 동향 파악에 쓰인 북측 '인물' 공개하란 식으로 공격했다. 어느 정부에서라도 이런 물밑 대화 상대를 생방송 토론 중에 공개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는 유 후보가 더 잘 알 만한 일이다.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에 있었던 일이다. 논란은 지난해 10월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이 출판되었을 때 터져 나왔다. 좀 더 정확하게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일파만파 퍼지던 당시 구 새누리당이 '해방구'라도 만난 듯 '송민순 회고록' 사태를 쟁점화하며 야당에 색깔론 총공세를 폈다. 우상호 원내대표가 "이런 식이면 2002년 박근혜-김정일 면담 가지고 싸우게 된다"며 자제 요청을 했음에도 새누리당의 종북몰이는 한동안 계속됐다.
물론, 논란의 내용과 논란의 제기 배경, 그리고 전개 방식은 다양한 준거들로 각각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총평'이란 것도 불가피하다. 종북몰이는 단순히 공격 언어에 '빨갱이'나 '종북'이란 천박한 구식 용어가 쓰일 때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라는 우리를 위태롭게 하는 공산 국가(실제로는 봉건 왕조국에 가깝지만)와는 어떤 식으로든 접촉, 대화, 교섭을 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군사적·외교적으로 적대적이어야만 '애국'이라는 전제를 깔고, 그 전제를 논증이 불필요한 '공리'로서 활용하며 상대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신사적 태도로 하더라도 종북몰이다.
따라서 2007년 당시 문 비서실장이 '북한의 동향을 파악했다' 가 아니라 '북한에 의견을 물어봤다'란 답을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한 유 후보의 전날 집요한 말꼬리 잡기식 질문은 그 자체로 전형적인 종북몰이다. 새누리당이 최순실-게이트에서 빠져나오고자 송민순 회고록 사태를 일파만파 정치쟁점화했던 것처럼, 대선을 앞두고 보수 진영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며 수세에 빠져 있는 유 후보가 '강한 안보'를 내세우며 지난 수개월 동안 정치권에서 골백번은 공방이 오간 송민순 사태를 문재인 공격 카드 1번으로 꺼낸 것 그 자체가 종북몰이다.
'송민순 회고록 사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지금 대선 후보들이 굳이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정도다. 2007년과 달리 남북 관계가 훨씬 적대적인 작금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동향과 북한 정치 지도자들의 미래에 내릴 의사 결정을 어떻게 파악하고 예측할 것이냐다. 늘 그랬듯 일본과 미국에 주로 의존할 것인가. 유승민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의 그 누구도 북한과 물밑 접촉을 하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단지, 북한은 '주적'이므로?
"북한이 주적인가"…너무나 유승민답지 않은 질문
이다음부터는 점입가경이었다. 사회자의 역할이 아예 빠진 5인의 대선 토론장은 이미 '문재인 빨갱이' 청문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국보법이 정말 지금 한국의 주요 이슈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유한국당 홍 후보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냐'고 문 후보에게 물었고, 문 후보는 2006년 일었던 폐지나 일부 개정이냐는 논란을 염두에 둔 듯 '찬양 고무 조항을 개선해야 한다'는 수세적 답변을 내놨다.
이렇게 홍 후보와 문 후보 간 국보법 폐지 공방이 벌어지던 중 유 후보가 질문을 이어받아 문 후보에게 "북한이 주적이냐"고 물었다. 문 후보는 "대통령으로서는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유 후보는 "국방백서에 북한은 우리 주적으로 되어 있다"고 했고 문 후보는 "국방부로서는 할 일일 수 있으나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후보의 대단히 이례적인 말꼬리 잡기는 여기서도 시연됐다. 유 후보는 문 후보에게 이미 "대통령이 되셨냐"고 물었다.
유 후보는 다시 "국방백서에 나오는데 군통수권자가 주적을 주적이라고 못 하는 게 말이 되나"라고 물었고, 문 후보는 "입장을 밝혔다"고 일축했다. 유 후보는 "주적이라고 말씀을 못 하시는" 이유가 있느냐고 파고들었고 문 후보는 다시 "대통령이 될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렇게 '대통령이 되셨냐'를 묻고 한 질문을 하고 또 하는 사이 유 후보가 자기 정책을 말할 시간은 다 날아갔다. 물론 의도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토론 이튿날인 20일 많은 언론의 '팩트 체크'로 보도되고 있지만, 국방백서엔 주적이란 표현이 없다. '주적'이란 단어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사회적 논란 속에 2004년 국방백서에서 삭제됐다. 이 때문에 국방부 대변인도 이날 오전 기자들의 '북한이 주적이 맞냐'는 질문에 진땀을 뺐다.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은 "2016년은 국방백서에 보면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되어 있다"고 답했다. 이에 '그러니까 그게 '주적이란 표현의 부활로 국방부는 받아들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답을 회피했다.
통일부에서도 이날 오전 '주적 질의'는 이어졌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은 적이기도 하지만 통일의 대상이기도 하다. 통일부는 남북문제가 그러한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며 "7.4 공동성명 이후 우리는 북한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변화해 왔다. 이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도 있고 6.15와 10.4 선언문에도 들어가 있다. 정부가 일관되게 가져왔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또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해야 하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대해선 "대통령은 군통수권자의 역할도 있지만 평화 통일을 추진해야 할 의무도 헌법상 가지고 있다"며 "헌법 66조에선 이 두 의무를 다 부여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제가 특정 주자를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으나, 어쨌건 설명의 내용만을 봤을 때는 문 후보는 현재 통일부의 대북 기조와 헌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답했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유승민, 1시간 동안 말한 단어는 사실 '전쟁'뿐
유 후보의 실망스러운 종북몰이는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심상정 의원이 "언제까지 대선 때 써먹을 거냐"고 호통친 대북송금사건이 공방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 후보는 이번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상대로 "불법을 저지를 햇볕 정책을 찬성하느냐"고 물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도 장단을 맞추듯 안 후보에게 "햇볕정책을 계승하냐"고 물었다. 순식간에 김대중 정부 시절의 햇볕 정책과 대북송금 사건이 하나가 됐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작성이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의 전부인가. 이런 식의 토론은 정말 곤란하다.
유 후보는 '전술핵 재배치'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이걸 하지 않으면 북한이 핵 공격을 했을 때 우리가 무슨 수로 북한을 응징하고 보복하겠느냐"고도 했다. 문 후보는 "전술핵을 재배치하면 한반도 비핵화라는 북핵 포기 명분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으나 유 후보는 '아니다. 전술핵 배치는 우리 스스로 핵개발을 하고 핵무장을 하자는 것과 다르다"고 강변했다. 미국의 핵 무기가 한미 공동 운용 체제로 한반도에 놓여도 여전히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할 수 있다는 발상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유 후보는 이날 토론회에서 대북인권결의안, 주적, 전술핵, 사드, 선제 타격 등 다양한 안보 이슈를 꺼내 든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 이야기한 단어는 단 하나다. 전쟁. 유 후보는 외교·안보·통일 영역에 부여된 1시간 동안 내내 사실상 전쟁만을 말했다. 한반도 평화와 주변국과의 긴장 해소를 위한 어떠한 해소법도 제출하지 못했으며, 그저 유권자들의 전쟁 불안을 고조시키고 상대편 후보를 향한 '질문 전쟁'만을 벌였다. 전술핵 재배치로 응징이라니. 정말로 지금처럼 긴장이 고조되다 불현듯 전쟁이 터져 서울 땅에 핵이 떨어지면 전술핵을 통한 응징은 아무 소용이 없다.
유 후보의 강점은 '직업 정치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책임의식과 소명의식과 균형 감각을 제법 잘 갖추었다는 점이다. 막스 베버는 오래 전 이 세 가지를 직업 정치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말했다. 유 후보는 이 가치의 '구체적 모습'을 몸으로 모여주듯 지난 시간 '왜 정치를 하는가'란 질문과 함께 구체적이고 또렷한 정책을 보여왔다. 보수 진영에서는 '금기'였던 증세를 꺼내 들며 반공 보수와는 다른 '새로운 보수', 또는 '합리적 보수'가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그러나 전날 토론회에서는 균형 감각은 물론이고, 국가라는 삶의 터전에서 먹고 일하고 아이를 낳고 삶을 마감해야 할 모든 사람들의 '평화'는 온데 간데없이 지워버리는 무서운 표정만을 짓고 서 있었다. 경제 전문가라고 자신을 내세우는 유 후보가 '전쟁'의 다른 단어들을 수없이 쏟아내면서도 '중국'에 관해 한 말은 "중국을 설득해 대북 제재를 훨씬 더 강하게 해야 한다"가 전부였다. 어떻게도 없고 언제도 없이, 그저 야권 후보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강점인 '자기 정책 홍보'는 거의 하지도 못했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유 후보가 만든 바른정당은 강령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되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할 강한 억지력을 구축한다",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을 존중하며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남북 간의 다양한 대화와 교류 협력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한반도 평화와 공동 이익을 추구한다. (☞ 관련 기사 : "DJ의 6.15 존중" 파격 '보수신당' 강령 대해부)
'강한 안보'와 '전쟁 (공포)'은 다르다.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가 도발적이고 호전적인 대결 구도를 만들 때 한국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 지는 '눈에는 눈'과 같은 일차 방정식 안에서 구해질 수 없다.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대통령이 이를 자신 있게 선언한다는 정치적 '말'로서 '강한 자위권'이 생기고 남북한 포함 7500만 '생명'에게 평화가 보장된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유승민은 유승민답게 싸워야 한다. 그간 유승민이란 정치인이 보여준 '따뜻한 보수' '새로운 보수'에 희망을 걸고 소신 있게 지지를 보내온 작지만 많은 가능성이 잠재된 '신 보수층'에게도 낡은 색깔론이 아닌 '새 안보관'이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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