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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에 관하여

최근 개헌 논의가 뜨겁게 전개되는 가운데 유독 오스트리아 권력구조가 최상의 대안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렇게 된 핵심 이유는 그 나라에서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배분을 둘러싼 문제가 별로 크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인식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오스트리아식은 형식적으로는 분권형 대통령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의원내각제와 다를 바 없는 권력구조라고 평가됨에 따라 그 방식을 한국에 적용할 경우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 가능성 및 대통령과 총리 간의 권력 충돌 가능성은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평가와 기대가 충분히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 과정을 다시 거친 후, 적절한 도입 조건의 충족을 전제로 하여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를 한국 권력구조의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그 전제 조건이란 (선거제도의 개혁을 통해) 구조화된 다당제를 먼저 갖춰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의 장점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는 독일식 의원내각제와 달리 헌법적으로 상당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을 지금과 같이 국민이 직접 뽑는 권력구조이므로 그 도입 과정에서의 국민적 반대는 비교적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대통령 직선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단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고 민의 반영에 뛰어난 합의제적 민주체제를 발전시켜가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칠 경우 국민들은 그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결선투표제에 의해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6년 임기의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역시 국민이 선출하는 국민의회(Nationalrat)와 "같은 반열에서, 병렬적으로 서로 경합하는 위치"에 있다(안병영 2013, 120). 대통령 역시 의회와 동등한 정도의 국민적 정통성을 갖는 헌법기구이므로 대통령은 의회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연방총리와 (연방총리의 제청에 의해) 연방정부의 장관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다. 물론 의회에서 안정적인 다수파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정당 간 연합정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경우 대통령의 연방총리 및 장관 임면권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상당한 의미를 갖는 권한으로 작동할 수 있다.(실제로 1959년엔 오스트리아의 6대 대통령인 아돌프 샤르프(Adolf Scharf)가 오스트리아인민당과 자유당 간의 연립정부 인준을 거부했고, 1970년엔 7대 대통령이던 프란츠 요나스(Franz Jonas)가 수상임명권을 행사함으로써 소수파 연립정부의 구성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황태연 2005, 60)).
또한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군통수권, 의회의 소집 및 해산권, 국민투표 회부권, 긴급명령권, 사면권 등의 주요 권한을 재량껏 행사할 수 있으며, 외교권도 제한적 범위에서나마 일부 행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권력구조는 전형적인 분권형 대통령제에 해당하며, 따라서 이 제도를 도입할 경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방지는 물론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정치문화의 영향력

혹자는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는 실질적인 의원내각제에 해당하며 따라서 그 제도의 도입을 통해 의원내각제 개혁 효과를 안정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제도 해석의 오류’에 기인한 주장으로 보인다. 국민의회 내에서 연정의 구성이나 작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연방정부의 형성 및 운영에 관여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긴 하다. 비록 제한적으로 부여된 것이긴 하나 그나마 그 외교권의 행사도 놀라울 정도로 자제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예컨대, 헌법에 의하면 오스트리아를 대외적으로 대표할 권한은 당연히 대통령에게 있으나 역대 대통령들은 EU 정상회의 등의 주요 국제무대에서조차 나라의 대표로 서는 일을 총리에게 양보해왔다. 이같이 오스트리아의 역대 대통령들이 헌법이 보장한 것보다 훨씬 축소된 권한만을 행사해 온 것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권한 행사 자제가 일종의 불문율처럼 지켜져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일반 시민들 사이에도 정치의 중심축은 단연 의회이며 총리가 정부의 최고지도자라는 인식이 확고히 성립돼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안병영 2013, 120)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은 헌법이 보장하는 상당한 실권의 소유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스트리아 대통령들이 통상적으로 '역할 포기'(Rollenverzicht) 또는 실권 행사 자제를 해온 것은 오스트리아 고유의 정치사, 그에 토대를 둔 정치문화와 전통, 그리고 정치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학습경험이 축적된 결과 형성된 일종의 비제도적 규범체계에 따른 것일 뿐 제도가 '강제'한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제1공화국 시절인 1933년에 잉글버트 돌푸스(Engelbert Dollfuss) 주도의 오스트리아판 파시즘 체제에 들어갔고 그 이후 1938년엔 히틀러에 의해 독일에 합병되는 등의 일대 수치를 경험했던 오스트리아인들은 특정 정치인 혹은 정치세력에 의한 독재는 물론 독선과 독주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바, 대통령의 정치 개입 자제는 이러한 정치문화의 영향 탓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은 10년 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전승 4개국에 의해 분할점령을 당하였는바, 이때 오스트리아 시민들은 독립국가 지위의 회복을 위해서는 모든 정당과 정치사회 세력이 합심하고 협력해야한다는 공동 규범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오스트리아 정당들은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연합정치를 펼쳐가야 했고, 그것이 지금의 합의제 정치문화로 자리 잡게 된 측면도 강하다(선학태 2005, 202).

이러한 정치문화 탓에 오스트리아인들은 정당 간의 협력정치 혹은 연합의 정치를 유난히 소중하게 여기는 바, 그러한 연합정치가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부에서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을 경우 거기에 대통령이 개입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합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인식하는 풍토가 엄존해왔다.

권력구조를 포함한 제도 모델의 도입과 적용 가능성을 논하면서 제도 외적 변수를 마치 제도에 마땅히 ‘따라 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를 모델로서 평가할 때는 오직 제도 자체만의 개혁 효과를 점검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특유의 역사와 전통, 학습경험 등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같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요컨대, 오스트리아 권력구조는 실질적인 의원내각제가 아닌 전형적인 분권형 대통령제로 ‘건조하게’ 해석하고, 그 토대 위에서 도입 및 적용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의 도입 조건

오스트리아식 권력구조를 도입할 때에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의 양대 문제’가 거기서 고스란히 발생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첫째, 양당제 상황 혹은 다당제일지라도 양당제와 유사한 형태의 블록정치 상황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경우엔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도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중심제처럼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대통령과 수상 간에 권력 배분을 어떻게 매끄럽게 함으로써 두 정치 지도자 간의 갈등과 충돌을 최소화할 것인지의 문제에 관해서도 나름의 해법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더구나 한국은 오랜 기간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였으므로 그 제도 유산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 기간 지속될 터인데, 그 기간 중에 끊임없이 벌어질 공식/비공식적인 이원적 정통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오스트리아는 구조화된 다당제가 확립된 국가인데다 정치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대통령은 헌법이 부여한 권리마저 포기할 정도인지라 상기한 두 문제가 웬만해선 발생하지 않고 있으나 과연 한국에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식 권력구조를 확립해가고자 한다면, 위에 기술한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상의 양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아래에서는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가 실질적인 대통령중심제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그리고 대통령과 총리 간의 권력 배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차례대로 논의한다.

1) 대통령중심제로의 실질적인 회귀 방지 방안

분권형 대통령제의 합의제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대통령이 과도한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이나 환경을 애당초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은 구조화의 수준이 높은 다정당체계를 구축해 놓는 것이다. 진보, 중도, 보수 등으로 구분되는 다양한 이념 및 가치의 공간마다 각기 유력정당들이 하나 이상씩 포진해 있는 높은 수준의 정당구조화를 이룬 분권형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소속된) 단일정당이 의회의 다수파가 되거나 이념이나 가치지향이 유사한 여러 정당들이 (여당이 포함된) 정당연합체를 결성하여 그들만으로 다수파 진영을 구축할 수 있는 경우는 웬만해선 발생하지 않는다. 셋 이상의 유력 정당들이 의회 의석을 비교적 고루 나누어 가질 경우엔 어느 한 정당이 단독 과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정당들 모두가 이념과 정책 기조 등의 면에서 서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경우엔 그 가운데 둘 이상의 정당들이 모여 하나의 ‘진영행위자’(bloc actor)로서 행동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준으로 구조화된 다당제 환경에선 대통령이 여당(연합) 장악력을 활용하여 총리가 주도하는 행정부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벌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다당제의 구조화 수준을 이 정도로 높이기 위해선 당연히 정당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의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선거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렇다면,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은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산업화를 이미 오래전에 거친 ‘이질 사회’인 동시에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국가이므로 어느 한 정당이 50% 이상의 득표율을 얻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 50% 미만에서 상당한 의석 점유율을 차지하는 의회 내 유력 정당들은 늘 여럿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대통령 정당이 포함된) 어느 한 정당도 단독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는 통상적인 정부 형태가 거의 언제나 연립정부이다.

오스트리아식 분권형 대통령제를 도입함으로써 다수 정당 간 연합정치를 안정적으로 제도화하고 그럼으로써 실질적인 대통령중심제로의 회귀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국 역시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를 채택하여 높은 수준의 구조화된 다당제를 확립해야 한다. 단, 연정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준의 비례대표 봉쇄조항은 확보해야 한다. 위에서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내각에 대한 정치권력 행사를 삼가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온건 다당제 아래서 운영되는 연립정부의 정치적 안정성이라고 강조한 바와 같이 연정의 안정성은 분권형 대통령제의 합의제적 순항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는 4%의 비례대표제 저지조항을 채택하고 있다. 독일식 의원내각제도 가장 안정적인 분권형 권력구조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 역시 상기한 대로 독일이 군소정당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하여 5%의 비례대표 저지조항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를 새롭게 채택할 경우 현행 3% 저지조항이 그 새로운 환경 아래서 구조화된 온건 다당제를 구축하는 데에 기여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이 비례대표제 국가로 전환하며 구조화된 다당제를 구축하는 과정 중에 특히 유력한 중도정당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중도정당이 충분히 많은 의석을 점함으로써 자신의 좌우 쪽에 위치한 정당 혹은 정당연합이 자기(들)만으로는 의회 다수파를 형성할 수 없는 구조를 창출해준다면, 거기서는 초이념적인 포괄형 연립정부가 상존할 수 있게 된다. 연립정부는 언제나 좌파와 중도, 중도와 우파, 혹은 우파와 좌파 정당 간에만 구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엔 대통령과 총리가 동일한 정당(연합)에서 배출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게 된다.

2) 대통령과 총리 간의 균형 잡힌 분권 구조 창출 방안

분권형 대통령제를 도입함에 있어 또 하나의 심각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는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권한 분배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 둘 간의 역할분담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엔 권한 행사를 둘러싼 잦은 갈등으로 인해 국정운영이 교착 상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한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이 오스트리아를 모델삼아 분권형 대통령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면, 국가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분권의 합리적 기준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물론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법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도 군통수권 정도만을 대통령에게 맡기고 그 나머지인 외교와 내치 영역은 모두 총리의 소관 사항으로 돌리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보는데, 오스트리아의 대통령도 외교 영역에서는 조약체결권 등과 같은 제한적 권한만을 부여받고 있고, 국방 영역에서만 군통수권과 군인사권 등의 핵심 권한을 모두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돼있다.

분단체제에 있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국방이야말로 당파적 유불리를 초월하여 오롯이 국민적 공감대에 기반을 두어 수립하고 추진해야할, 따라서 전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전담하는 것이 마땅하고 적합한 정책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할분담을 위와 같이 분명히 하더라도 대통령과 총리 간의 체계적인 협의 기제는 별도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분권 구조가 우선 명확히 서고 그에 더하여 상시적 협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여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잠재적이거나 실재적인 갈등이 적시에 순조롭게 조정될 수 있을 때 분권형 대통령제는 안정적인 권력구조로 정착할 수 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물론 핀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의 많은 선진국들이 분권형 대통령제를 그렇게 성공적으로 운영했거나 운영하고 있다.

참고문헌

선학태. 2005. 『민주주의와 상생정치』 서울: 다산출판사
안병영. 2013.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 서울: 문학과 지성사
황태연. 2005. "유럽 분권형 대통령제에 관한 고찰" 『한국정치학회보』 39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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