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 잣, 땅콩 등 견과류를 깨물어 악귀를 쫓아내고 건강과 복을 비는 정월 대보름. 체감 온도 영하 6도 속에서도 하늘에선 보름달이, 광장엔 촛불이 환하게 켜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열다섯 번째 촛불 집회 '천만 촛불 명령이다! 2월 탄핵, 특검 연장'이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 등 전국 곳곳에서 열리면서다.
행진이 한창이었던 저녁 8시 50분 기준 주최 측 추산 광화문 75만 명, 전국 80만 명은 이날에는 헌법재판소의 2월 중 탄핵 인용을 기원하고 특검 연장을 촉구했다.
강추위 속에서도 정유년 새해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고, 참석자들은 집회 후 청와대와 헌법 재판소를 향해 행진했다.
청와대가 무더기 증인 신청을 하며 헌재 심리를 늦추려 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는 청와대 압수수색을 가로막고 특검 연장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박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이른바 '태극기 집회'도 그 몸집을 키우는 등 '이상 기류'가 가시화하자, 촛불 시민들 사이에서도 다시금 긴장감이 감도는 모습이다. (☞ 관련 기사 : 고무된 태극기·성조기 부대…"계엄령이 답이다!")
서울 도심은 본대회 시각 오후 6시를 한참 앞두고부터 촛불 집회에 참석하려는 이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세월호 광장'으로 불리는 광화문 남단 광장에는 세월호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노란색 풍선이 하늘에 떴고, 박 대통령을 규탄하며 분신한 정원스님의 분향소도 광장 한 곳에 차려졌다.
사전 대회에서는 대선 후보인 정의당 심상정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이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앞에서 '탄핵 버스킹' 행사를 펼쳐 지나는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퇴진행동 측은 오후 6시부터 시작된 본대회에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비롯한 범죄 집단이 탄핵 심판을 지연시키기 위해 꼼수를 쓰고 특검을 음해하고 있다"며 촛불 집회의 힘으로 "박 대통령이 없는 봄을 만들자"고 격려했다.
본대회 연단에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내부 탄압'과 '정권 보위'에만 골몰해 온 문화방송(MBC) 안에서 싸우고 있는 이호찬 기자가 오르기도 했다.
이 기자는 집회 참석자들을 향해 "진심으로 죄송하다. MBC는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을 철저히 방조했고 은폐했다"며 거듭 사과했다.
그는 "최근에는 심지어 태극기 집회를 촛불 집회보다 먼저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가 보도 간부 입에서 나오고 있다"고 고발했고 "조금의 반대 목소리도 용납하지 않고 쫓아내고 마이크 빼앗고 징계하는 이런 막장 경영이 5년여 지속돼 왔다"고 전했다.
최 기자는 "MBC에 대한 비판과 질책을 달게 받겠다"며 "질책을 계속해주시되 언론장악 방지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MBC에 대한 관심만은 놓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날 저녁 7시 25분에는 '1분 소등' 퍼포먼스도 다시금 펼쳐졌다.
참석자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 "특검을 연장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황교안은 박근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들고 있던 촛불 등을 잠시 껐다.
소등에 앞서 퇴진행동 측은 "정월 대보름은 악귀를 없애고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는 날"이라며 "김기춘 안종범 조윤선 최순실 등 정권 실세를 구속시키는 등 여러 악귀를 물리쳤다"고 외쳤다.
그러나 "박근혜는 촛불과 특검, 헌재를 공개 비난하고 있고 최순실은 민주 투사 흉내까지 내고 황교안은 박근혜 호위무사 역할을 하고 있다"며 "우리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어둠의 세력이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도록 힘을 달라"고 기원했다.
본집회 1부 말미에는 정월 대보름을 '퇴진'이라고 쓴 '라이트 벌룬(풍선)'이 하늘에 띄워졌다.
이날 행진은 오후 7시 30분부터 2시간여 시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청와대 포위'를 컨셉으로 한 1차 행진은 △내자로터리 △정부종합청사 사거리 △동십자각 방면 등 세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 후 청와대 앞 100미터 지점인 효자치안센터, 자하문로 16길21, 팔판동 126맨션으로 각각 모여 청와대를 에워쌌다.
2차 행진은 헌재 방향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내자로터리와 동십자각 두 갈래로 나뉘어 헌재에서 100미터 떨어진 안국역까지 걸으며 구호를 외치고 춤을 췄다.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참가자들은 박 대통령의 퇴진을 비는 소원지 태우기, 강강술래, 판소리 등도 선보이며 흥겨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한편, 민주노총 등은 '새로운 세상, 길을 걷자 박근혜-재벌총수를 감옥으로 대행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날인 10일부터 이날까지 약 15.7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행진했다.
"재벌 구속" 등을 구호로 내건 행사 참가자 300여 명은 전날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 앞에서 출발해 삼성 서초 사옥을 거쳐 서울중앙지법까지 행진한 후 철야 농성을 하고, 11일 낮 12시 국회 앞을 지나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다.
문재인·안희정·이재명·심상정 등 참석…안철수 "광장은 시민 것" 불참
야권의 대선 주자들과 정치인들도 대거 촛불 집회에 참석해 시민들과 함께했다.
총동원령이 떨어진 민주당에서는 소속 의원 50여 명과 당원 5000여 명이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대세론'을 앞세우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광화문 광장에 등장하기 전 참석했던 '포럼 대구 경북 출범식' 장소 대구 엑스코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반전을 노리고 있다"며 "저는 탄핵에 집중하고 더 촛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촛불을 든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개혁을 향한 촛불 광장의 시민 목소리와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밝혔으며, 세월호 미수습자 조은화 양의 어머니 연설을 보면서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국민은 남의 돈 10만 원만 훔쳐도 잡혀가는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여러분의 돈 수천억 원 뺏어서 불법 이익을 얻었는데 왜 감옥을 안 가나"라며 특검의 강력한 재벌 수사를 촉구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특검 연장이 불가피한 이유가 뭐겠냐"라며 '청와대 압수수색은 못 하게 하고 대통령 대면조사는 거부하기 때문에 특검 연장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라고 해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정치권 일각에서 정치인들이 촛불 집회에 참석해 헌재를 상대로 조속 인용을 촉구하며 '압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헌법재판소나 국회나 국민 주권에 복무해야 하는 헌법 기관"이라며 "'어느 기관을 압박한다' 하는 것은 석고대죄해야 할 새누리당의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당은 소속 의원들의 촛불 집회 참석 여부를 자율에 맡겼다.
박지원 대표와 주승용 원내대표, 천정배 국민의당 전 상임공동대표, 손학규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은 이날 광주 금남로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안철수 전 대표는 촛불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구제역·AI 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해 방역 상황 점검했다.
안 전 대표는 촛불 집회가 열리던 시각 종합편성채널 MBN에 출연해 "헌재에서 공정하고 신속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면서도 "광장은 시민의 것이다. 정치인은 시민께서 권한을 위임해준 만큼 제도권 안에서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촛불집회 주최 측은 2월을 '비상 시국'으로 선포했다. 18일엔 전국에서, 25일엔 서울에서 집중 집회를 벌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