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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한국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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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한국은 다른가

[인권으로 읽는 세상] 무너진 인권의 자리에 차오르는 축출의 광기

얼마 전 미국에 다녀온 지인이, 이란을 방문했던 기록 때문에 비자 발급이 늦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가보다 무심코 넘겼던 이야기의 극단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 7개 국가 국민의 입국을 90일 동안 금지한다, 체류 자격 없는 이민자를 보호하는 도시에 재정지원을 중단한다, 난민의 입국을 120일 동안 금지하고 시리아 난민 수용은 무기한 중단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트럼프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그건 미국이 아니다?

트럼프의 이번 조치가 "미국 역사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CNN)"이라는 해석은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민자들이 건설한 자유의 국가라는 역사의식은 미국 이민 정책에 영향을 미쳐왔다. 이번에 트럼프가 선전포고한 '피난처 도시'도 그렇다. 미등록 이민자의 체포에 협조하지 않으며 공무원이 이민자의 체류 자격을 묻지 못하도록 하는 도시가 수백 곳이라니 한국에서는 트럼프보다 놀라운 일일지도 모른다.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항의 행동에서 "이건 미국이 아니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는 것도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도 미국이었다.

미국 이민 정책은 언제나 배제의 정책이었다. 국경이 사실상 열려 있었던 초창기 미국에서도 시민권 신청은 '자유인인 백인'만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많은 이들이 '원정 출산'을 다녀왔던 것은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 시민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걸 선언한 14차 개헌(1868) 이후로도 아시아계 이민은 제한되고 있었다. "시민이 될 권리는 인종에 의해 부정되지 않는다"고 명시한 1952년의 법 제정 이후로도 출신 국가에 따라 이민자 수를 제한하기 위한 쿼터 시스템은 존속했다.

이민 정책은 차별과 관용 사이에서 결정되기보다 인구 변동과 산업 구조 사이에서 결정된다. '생산 가능 인구' 증가율이 높을수록, 국내 실업률이 높을수록 이민 유입 비율은 낮아진다. 이주민은 노동력으로서만 국경을 넘어 들어올 수 있다. 이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때 따르는 사회경제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불법 체류' 상태가 묵인되다가 필요 없어지면 강한 통제와 단속 정책을 쓴다.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IT 기업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트럼프가 손대려는 H1-B 비자를 통해 유입되는 전문직이 주로 미국 IT 산업으로 흡수된다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비차별과 평등의 토대에서 자란 인권은 사람이 노동력으로만 셈해져 버려지도록 두지 않았다. 미국 이민 정책은 언제나 논쟁 중에 있었으며 트럼프의 이번 조치 역시 수 년 넘도록 미국 내 정치적 쟁점이었다. 미국 사회 안에서의 정치적 실천들이 경합하면서 '트럼프'들을 막아왔다. '미국의 자부심'은 정확히 말하면 차별 철폐 운동의 자부심이다.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발언과 정책 기조에서 히틀러를 보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인간을 '다른' 집단들로 구분해내면서 박해와 학살이 벌어졌던 역사를 기억할 때,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은 '미국의 이민 정책'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인권의 위기

유엔 인권대표는 "국적에 따라 차별하는 행위는 인권법으로 금지돼 있다"며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비열한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권법뿐만 아니라 미국의 법이 출신 국가에 따른 이민자 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트럼프는 더욱 기습적으로 '행정명령'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충격을 던졌을 것이다. 그동안 인류가 쌓아온 인권의 원칙이나 정치의 질서를 대화의 출발선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만 그가 발언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의 위기는 트럼프 이전에 시작되었다.

인권은 국민국가 체제 안에서 그것의 보장을 위한 시스템을 발전시켜왔다. 사람이라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들이 제도화되었다. 일자리와 사회보장, 주거와 교육, 건강에 대한 권리들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흐름과 함께 국민국가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권도 함께 흔들렸다. 가장 취약한 곳이 국경이었다. 국경의 출입국 관리는 사람을 가르는 권한이 인정되는 영역이다. 이주민의 인권 문제는 국제인권 체제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문제였다. 인권의 국제적 기준과 비교할 때 이주민의 인권은 언제나 제한된 권리였다. 그리고 국경에서 흔들리는 권리는 인권 자체의 위기로 이어졌다.

미국 국경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1996년 클린턴은 "국경 강화를 위한 강력한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미 의회는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이민자 강제 송환을 용이하게 하는 내용의 법을 제정했다. 트럼프의 이번 조치에 언급된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장벽설치법은 2005년에 제정되었다. 2001년 9.11 테러는 이민 정책에 국가 안보를 결합시킬 명분을 주었고 그때부터 무슬림은 희생양이었다. 테러에 대한 충격 속에서 무슬림의 인권은 손쉽게 제압당했다. 그것이 시민권 자체의 훼손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생활의 자유가 강하게 보장되는 국가라는 환상은 미국이야말로 감시의 온상임이 폭로되면서 깨져나갔다. 부시의 '악의 축' 선포와 함께 국제 질서는 새로운 전쟁의 시대로 돌입했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 국경만 강화됐던 것은 아니다. 테러와의 전쟁과 함께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며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모습을 드러냈다. 로익 바캉의 <가난을 엄벌하다>에 실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100명 중 1명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은폐된 불평등

사스키아 사센은 <축출 자본주의>에서, 위축되는 경제가 축출을 확산시킨다고 주장한다. 경제위기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체제의 동력이 경제로부터의 축출이라는 지적이다. 전후 세계가 내부에서의 '배제'를 낳으면서도–케인스주의든 공산주의든-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촉진하는 경제적 토대를 확립해왔다면, 1990년대 들어 이와 같은 경제적 지형과 역사는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국경 사이에 갇힌 난민과 이민 인구의 증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수감 등을 통해 경제 및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내쫓겨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사센은 이와 같은 '축출'이 이제 "거의 모든 영역에 내재되어 일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경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열렬하게 환호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트럼프의 이번 조치를 격하게 환영한 유럽의 극우 정치세력 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에 기생하고 있다. 극우 정치는 이민자들이 일자리와 복지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가난한 '국민'들을 선동한다. 소득과 자산이 상위 1%로 집중되는 극심한 불평등은 은폐된다. 누군가를 '축출'해야만 지탱될 수 있는 체제는 '배제'된 사람들의 적대와 혐오를 부추기며 축출을 정당화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지명한 노동부 장관이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반노동적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충분히 예견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무너진 인권의 자리에 축출의 광기가 차오르고 있다.

트럼프는 시대가 만들어내는 괴물이다. 이번 조치에 대한 거센 항의와 규탄에도 흔들림 없는 트럼프를 보며, '힘 센' 국가를 부러워하는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내야 하는 시대 말이다. 남의 나라 일일 수가 없다.

그건 한국의 문제다

한국의 이민자 규모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05년 7만5000명이었던 것이 2015년 190만 명으로 증가했다. 2013년 이민자 유입 규모는 OECD 국가 중 독일,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았다. 이제 한국은 엄연한 이민 유입국이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불평등 지표의 순위를 다투는 나라다. 상위 10%와 하위 10%의 임금 격차도 미국 다음으로 크고,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은 미국 다음으로 많다. 한국에서 이민자에 대한 축출이 미국이나 유럽처럼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평등에 똬리를 튼 혐오가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민사회의 역량도 척박하다. 얼마 전 전북의 건설노동조합이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노동조합이 그랬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노동조합이라서 반성하고 사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라고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축출의 시대를 홀로 살아내며 '트럼프'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우리 자신의 숙제다. 축출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다시, 인권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권은 한 발 늦게 오고 한 발 늦게 남는다. 인권은 인류가 겪어온 문제에 대한 해법이자 지향이었다. 우리가 겪는 문제들 속에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감각을 발견해낼 때 인권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인권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감각은 '우리'라는 결속과 연대로부터 시작된다. 광장의 정치를 일상으로 뿌리내리는 것은 곳곳에 '우리'들이 만들어지는 것과 다름없다. 누구와 어떻게 결사할 것인가, 트럼프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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