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프레시안>에 연재된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가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이마 펴냄)는 일제 강점기 경성(서울)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해 경성의 풍경을 바꾼 조선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민족운동가인 정세권의 삶을 중심으로 한국의 부동산 개발 역사를 짚어보는 책이다.
연재를 시작할 당시 김경민 교수는 '제대로 된 디벨로퍼가 없는 한국의 부동산 사업 현실을 되새기고, 근대의 디벨로퍼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본다'는 취지를 밝히고, 그 대표격으로 정세권을 돌아본다고 밝힌 바 있다.
디벨로퍼란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시행사, 혹은 개발자를 뜻한다. 불법 인허가, 커미션, 폭력적 철거로 일그러진 현대의 부동산 개발업자가 아니라, 적정 수준의 주택을 대량 공급해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지역 가치를 끌어올려 도시 발전을 이끄는 사람(법인)을 지칭한다. 흔히 '부동산 업자'로 알려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디벨로퍼'로 성공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 역사를 되짚음은 현대 서울 풍경의 근원을 살펴보는 것이다. 정세권은 1920년대 익선동 166번지 개발을 시작으로 가회동, 삼청동 일대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었다.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조성한 조선 최초의 '건축왕'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찾는 서울의 핫플레이스 북촌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게 각인된다.
특히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사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약탈적 난개발로 고통 받는 현대 서울에도 의의를 제공한다. 정세권이 활동하던 시기, 경성은 급속한 개발로 도시화 과정의 한가운데에 휩쓸린 도시였다.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며 도시에 새로운 건물과 거리를 세우던 시기, 전통 한옥과 초가집을 헐어내고 서양식 주택과 일본식 주택이 들어서던 시기, 인구과 급격히 과밀해져 살 집이 부족한 시기였다. 자연히 자본력이 부족한 상당수 조선인이 살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게 될 판이었다.
"대경성을 계획하고 대도시를 설계하는도다. 나날이 발전하고 나날이 융성하는도다. 그러나 그 융성하는 경성이 어찌 조선사람의 경성인가, 조선사람은 (자본이 없기에) 집을 팔아먹고 땅을 팔아먹고 도망하되, 일본사람은 그 반대로 사고 얻고 하여 일일이 물밀 듯이 경성에서 발전 팽창하여 가는도다. 이와 같이 조선인의 경성은 망하여 가고 일본인의 경성은 흥하여 가는도다!" (1923년 3월 6일 <동아일보>)
일본인들이 몰려들던 도심의 하나가 북촌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서서히 경성의 거주지를 확보해가던 일본인들은 1910년대 이르러 남대문로 1, 2, 3, 4가 대부분의 필지를 소유했다. 하지만 남대문로 인근만으로는 일제 강점 이후 경성으로 온 일본인들의 주거지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 대안 공간이 당시만 해도 조선인 거주 지역이던 북촌 일대를 비롯한 경성 북쪽(종로, 북촌 등지)이었다.
이 시기 정세권은 조선인을 위해 한옥 대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주거 문화까지 지켜낸 최전선에 섰다. 1970년대까지 서울 곳곳에 남은 대규모 한옥 단지가 이 시기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한옥은 대형 주택이었다. 고층 건물로 올리기 어려운 한옥의 특성상, 좁은 면적에 더 많은 조선인 거주지를 만들기에 한옥은 적합하지 않았다. 정세권은 한옥 크기를 줄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큰 대지의 한옥을 철거하고 여러 채의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한옥집단지구 개발 방식인 셈이다. 정세권의 이 같은 개발 방식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오늘날 한옥 관광지로 유명한 북촌 가회동 31번지 한옥집단지구다.
주택 분양 광고를 내고 대규모 개발을 주도함으로써 정세권은 한국 개발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만큼 중요한 일이 현대식 한옥의 표준 모델을 만든 것이다. 당시 경성 상황에 맞춰 정세권은 현대적인 한옥 설계도안 현상모집을 주최했다. 6인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 마루 개념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둘러싸고, 내부 공간은 남향으로 하며, 위생적 화장실을 주택 내부로 들여놓는 새로운 형태의 한옥은 오늘날 북촌을 포함해 대규모 한옥 단지의 표준 모델이 됐다.
이 같은 개발을 주도한 결과, 1919년 당시 20칸 한옥 두 채 가격인 2만 원의 자산으로 상경한 정세권은 10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회사 건양사를 대형 회사로 키움으로서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 재벌이 됐다. 당시 ‘경성 3왕’이 유통왕, 광산왕, 건축왕이었는데, 정세권이 건축왕이었다. 유통왕은 당대 조선 최고 갑부로 꼽힌 박흥식이며, 광산왕은 최창학이다. 박흥식과 최창학은 일제 강점기 손에 꼽히는 친일부역자다.
정세권은 달랐다. 그는 대자본가임에도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등을 후원했다. 조선 독립 운동에 참여한 대가는 명확했다. 일제는 정세권의 재산을 빼앗고 개발사업에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정세권의 회사인 건양사는 급격히 쇠락의 길에 들었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 정세권의 모습도 성실히 기억한다. 잘 알려진 국내 활동 외에도 정세권은 만주동포구제회를 설립해 만주의 독립운동에도 재정적 지원을 이어갔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 등 서울의 여러 거대개발 프로젝트를 비판해 온 김경민 교수는 그간 <도시개발, 길을 잃다>(시공사 펴냄), <리씽킹 서울>(김경민·박재민 지음, 서해문집 펴냄) 등의 저서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도시 개발 방안을 거론했다. 오늘날 도심 개발에도 큰 의미를 남길 책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에서 김경민 교수는 과거로 돌아가 도시 개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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