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5일 "개헌은 대통령 선거 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불과 9일 전인 지난 16일 기자들을 만나서는 "대선 전 개헌은 어려울 것"이라고 했던 데에서 또 말이 바뀐 모습이다.
반 전 사무총장은 당시 '금전이 빡빡해 정당에 가입해야 할 것 같다'는 취지의 말도 했었으나, 이 입장 또한 며칠 만에 바뀌어 알려졌다.
이날 오전 새누리당 의원들을 만나서는 "특정 정당에 입당하기보다 당분간 독자 활동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는 게 복수의 참석자들이 전한 비공개 회동 내용이다. (☞ 관련 기사 : '금전 빡빡' 潘 "정당 입당 안하겠다" 오락가락)
이처럼 귀국 후 2주도 안 되는 기간 정치 행보에 관한 제 입장이 계속 흔들리는 모습은 '애초부터 반 전 총장이 국내 정치 지형에 맞추어 임기응변을 하려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대권 가도를 가장 유리하게 만들어줄 조건인 '제3 지대 빅텐트 구성'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주변의 조언을 들으며 조금씩 입장을 수정하고 다듬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반 전 사무총장은 이날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대다수 국민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는 선거구제 변경, 분권과 협치의 헌법 개정을 통해 정치질서와 정치 문화를 확실히 교체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반 전 사무총장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개헌을 약속하고는 정작 집권 후에는 흐지부지 해오던 일을 우리는 수 없이 보아 왔다"고도 했다.
그러나 개헌 필요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대선 전'이라는 시간표는 현실성이 없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이르면 2월 말 늦어도 3월 초에는 결정될 것이란 게 통설이고 이는 곧 대선이 3~4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임을 뜻한다.
짧은 시간 안에 권력 구조와 여타 조항들에 대한 개정 방향을 논의해 합의점을 이루고, 개정안 초안을 쓰고, 국민 투표에 부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앞서 반 전 사무총장 지난 16일 경남 김해에서 기자들을 만나 치킨과 맥주를 곁들여 '편안한 대화'를 나누었을 때는 "대선 전 개헌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에 대해 당시에는 개헌을 고리로 비박(非박근혜)계와 비문(非문재인)계를 규합하는 '빅텐트'를 구상할 지라도, 시점 상 개헌은 대선 후로 보고 있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었다.
그 사이 정치적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반 전 사무총장이 이날 개헌 시점에 대해 다른 생각을 밝힌 것은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반 전 사무총장은 권력 구조 개헌 방향과 관련해서는 "대통령 혼자 내치와 외치 모든 걸 하려고 하니까, 사실 대통령도 인간이라서 능력에 한계가 있다"며 분권형으로 그 가닥을 잡아 밝혔다.
대선 4달 앞두고…"12월 대선 출마 결심, 빨리 배우겠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반 전 총장 스스로도 대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다는 '고백'성 발언도 나왔다.
그는 '언제 대선 출마를 결심했느냐'는 질문에 " 최순실 사건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아주 불행한 일을 보고 지난해 12월 (대선 출마를) 결정했다"고 했다.
토론 참석자가 '그렇다면 불과 20여일 전 결심했다는 말이다. 몇 년을 준비한 후보도 있는데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묻자 이에 대해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정신은 준비돼 있다. 앞으로 빨리 배우고 준비해 나가겠다"는 답으로 대응했다.
이는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했다고 하면 유엔 사무총장 임기 중 대권 준비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없는 조건에서 나온 불가피한 말들인 것으로 평가된다.
"동생 미얀마 사업, 유엔과 무관…국민 볼 면목 없어"
반기호 씨와 관련해서는 미얀마 등지에서 사업을 하면서 유엔의 부적절한 조력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져 있다. (☞ 관련 기사 : "반기문 동생 미얀마 진출, UN이 특혜 준 의혹")
반 전 총장은 이에 대해 "동생, 조카 관련해서는 사실 보도를 보고 알았다"며 "미얀마에서 사업하는 것은 제가 들었지만 유엔과 무관하다"고 했다.
또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며 동생에게 "조심하라고, 혹시라도 이런 문제로 말썽 일으키지 말라고는 그 전에 (당부) 했었다"고 말했다.
'유엔과 무관하다'고 했지만 이 또한 재검증 대상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당장 반기호 씨가 사장으로 있던 에너지 기업 'KD 파워'가 미얀마 진출을 앞두고 '유엔 글로벌컴팩트'에 가입 신청을 했던 2012년 9월에도 반 전 사무총장은 유엔을 책임지고 있었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공개한 KD 파워의 신청서(사진 참조)에도 발신자가 반기호 사장, 수신자가 반 전 사무총장으로 나와 있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유엔 글로벌콤팩트 측은 "가입 신청의 경우 유엔 사무총장을 수신인으로 보내도 승인자는 유엔글로벌콤팩트 사무총장"이라며 "유앤글로벌콤팩트는 유엔이 제시하는 원칙에 따라 경영 활동을 하길 원하는 기업이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朴 대통령에겐 "위안부 협상, 올바른 용단"…이날엔 "협상자 책임"
귀국 후 혹독한 '검증 대상 이슈'가 되었던 한-일 위안부 협상 평가와 관련해서는 반 전 사무총장은 "불가역적이다 최종적이라고 한 것에 한국 정부가 동의를 했으니 당시의 한국 정부 협상자의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당시 합의를 '환영'했던 것에 대해서는 "유엔 사무총장 자격으로 한일 간 오래되고 아주 민감한 문제에 대해 합의를 이룬 것에 대해 환영한다는 평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제 기구의 책임자로서 합의 내용보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 그 자체에 대한 환영 입장을 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반 전 사무총장은 지난해 1월 1일 박 대통령과 한 전화 통화에서는 "박 대통령께서 비전을 가지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했었다.
'올바른 용단'은 합의 그 자체에 대한 환영을 넘어 주관적 평가가 들어간 '칭찬'으로 해석될 여지가 여전히 크다.
이런 까닭에 귀국 후 위안부 협상 평가에 대한 취재진 질문이 집요하게 이어지자 반 전 사무총장은 '나쁜 놈들'이라는 격한 반응을 내놓기도 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날 반 전 사무총장은 재차 사과했다. 그는 "짜증이 나서 감정적 표현을 한 것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는 23일에는 짜증을 냈던 이유는 "시차 적응" 때문이었다고 해서 또 한 번 논란이 됐었다.
반 전 사무총장은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결정과 관련해서도 특유의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제 입장을 밝혔다.
"개성공단, 남북 신뢰에 큰 도움…(그러나) 어차피 폐쇄했어야"
그는 우선 "결과적으로는 어차피 취소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나"라며 "사실 그때(2015년) 당시 개성공단을 유엔 안보리 결의 전에 페쇄했는데, 지금쯤엔 폐쇄했었어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인질로 잡을 가능성이 있었다"며 "북한이 핵무기 포기에 진지한 자세를 보이고, 자세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기 전에 당분간 (개성공단 재개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개성공단이 남북 긴장을 해소하고 약간이나마 신뢰를 조성해 나가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저 자신도 개성공단을 외교통상부 장관 때 주한 대사들을 모시고 갔다"고 말했다.
과거 외교부 장관으로서 개성공단에 순기능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으나 '어쨌거나' 취소해야 하는 것이었다는 발언이다.
반 전 사무총장은 보수 '표'의 규합을 노린 듯 문재인 전 대표의 '안보관'을 꼬집기도 했다.
그는 문 전 대표는 "대통령 되자마자 미국보다 평양을 먼저 가겠다고 해서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다"며 "사드배치에 대해서도 말씀이 오락가락하고,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유엔총회 결의를 하는데 북한 입장 들어보고 결정하자고 하는 것도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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