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3일 박민식 전 새누리당 의원을 법률 대리인으로 내세워 '박연차 23만 달러 수수 의혹'의 한 갈래인 '2005년 5월 3일 반기문-박연차 외교부 장관 공관 회동' 의혹에 대해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해명 내용의 상당 부분이 정황, 추측, 전언에만 의존하고 있어 의문 해소에는 부족함이 많다.
"'박연차 리스트'에 반 전 사무총장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팩트"라는 한겨레 등 언론의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아예 제대로 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앞서 반 전 총장은 귀국일인 지난 12일 "왜 제 이름이 등장했는지 알 수 없다"며 해당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것 자체를 부인하는 취지의 설명을 했다.
그런 만큼 '박연차 리스트'에 반 전 총장의 이름이 있는지 여부는 '뇌물 수수' 죄의 성립 문제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이 부분은 반 전 총장이 한겨레 등 언론을 상대로 명예 훼손 혐의의 형사 고소를 해야만 적법한 과거 수사 기록(박연차 리스트) 열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潘 측 "6시에 공관에 없었다. 100% 허위"라지만…
박 전 의원의 이날 해명은 '박연차 리스트'에 반 전 사무총장이 거론되었다는 의혹은 우선 완전히 피해갔다.
그러고는 지난해 12월 24일 <시사저널>이 '박연차와 가까운 지인'의 증언을 토대로 지목한 뇌물 수수 의혹 날인 '2005년 5월 3일'을 둘러싼 정황 설명만을 나열했다. <시사저널> 보도 내용을 기본 텍스트로 두고 마치 축조심사(逐條審査)'를 하듯 정교하게 반박을 시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박의 근거로는 당일 행사 사진과 반 전 총장의 일기장 등이 활용됐다.
박 전 의원은 우선 '반 전 사무총장과 박 전 회장이 금품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진 때(2005년 5월 3일 저녁 식사 1시간 전)와 장소(외교부 장관 공관 내 사무실)에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시사저널> 보도가 쓴 "만찬이 열리기 한 시간 전쯤"과 "반 장관 사무실"이라는 구절에는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당시 <시사저널> 보도를 보면, '박연차와 가까운 지인'은 "베트남 외교 장관 일행 환영 만찬이 열리기 한 시간 전쯤 박연차 회장이 한남동 공관에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반 장관 사무실에서 20만 달러가 담긴 쇼핑백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이 증언을 반박하기 위해 반 전 총장과 박 전 회장의 공관 도착 '추정'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반 전 총장이 "저녁 5시에 (서울 종로 삼청동에 있는) 남북회담 사무국에서 비공개 고위 전략회의를 했고 이를 마친 시간은, 12년 전 일이라서 확실하지 않지만 통상 길게 가는 회의로, 6시가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박 전 의원은 "12년 전 일이라서 재구성하기 힘들지만, 삼청동에서 한남동으로 평소 막히는 정도 고려하면 30분 정도"라면서 "반기문 (당시) 장관은 추측건대 7시에서 10분 전, 빨라 봐야 20분 전에 (한남동 장관 공관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도 했다.
당일 만찬 예정 시각(저녁 7시)으로부터 한 시간 전인 저녁 6시가 아니라, 6시 40~50분께가 되어서야 반 당시 장관이 공관에 도착했다는 설명이다.
박 전 의원은 이어 돈을 건넨 쪽으로 지목된 박연차의 공관 도착 시간도 '추리'했다.
그는 "박연차 전 회장 행적은 저도 사실 알 수가 없다"면서도 저녁 식사 전 관행적으로 진행되는 칵테일 사전 행사 기념 사진에 박 전 회장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공관 내 정원에서 촬영된 단체 사진 하나를 내보이며 "이게 가장 중요한 사진이다. 중간에 반기문 장관이 계시고 (응우옌 지) 니엔 베트남 외교 장관이 계신다. 그런데 당시 민간 기업 (참석자) 중 가장 핵심적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명예총영사, 좌석 배치도 중간에 있는 박연차 전 회장이 이 메인 포토에는 없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해당 사진의 "사진 각도와 음영을 볼 때 일몰이 됐거나 일몰 직전"이라며 "당시 일몰 시각은 7시 24분이었다"고도 부연했다. 적어도 저녁 7시 25분께까지는 박 전 회장이 공관에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종합하면 반 전 총장은 앞선 일정 때문에 만찬 예정 시각이 거의 다 되었을 때인 6시 40~50분께야 공관에 도착했을 것이고, 박 전 회장은 만찬 시작 예정 시각을 한참 넘긴 7시 25분께까지도 공관에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돈이 오갈 수조차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박 전 회장의 공관 도착 시각은 여기서 '추정'일 뿐이다. 박 전 회장의 도착 시각을 완벽히 설명할 '물증'은 없냐는 취재진 질문에 박 전 의원은 "저도 박 전 회장의 행적을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고만 했다.
더욱이 박 전 의원의 해명만으로도 "만찬이 열리기 한 시간 전쯤" 박 회장이 한남동 공관에 도착해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존 의혹은 얼추 들어맞고 만다.
박 전 의원은 "당일 만찬은 평소보다 늦게 시작했다. 7시 40분 정도에 시작해서 9시에 마친 것으로 나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일 행사에 참석한 이들의 "공통적 진술은 박연차 회장이 그날 가장 늦게 도착했다"는 점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만찬 (예정)이 7시였는데 7시 30~40분으로 지연됐다"고도 했다.
만찬 예정 시각이 아니라 실제 만찬이 시작된 시각(7시 30~40분)을 기준으로 보면 한 시간 전쯤인 6시 40~50분께 반 전 총장이 공관에 도착한 사실은 입증되는 셈이다.
潘 일기장에 의문의 '빈칸'…"초청자 이름 몰라 못 썼다"
박 전 의원은 반 전 사무총장이 당일 일기장에 박 회장의 험담을 적으면서도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해 문장 일부를 공백으로 남겨둔 점, 반 전 총장이 당시 박 회장을 처음 만났다고 하는 점 등을 들어서도 뇌물 수수의 정황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일 저녁 행사에 '주요 인사'로 초청되어 반 전 총장의 맞은편 자리에서 식사를 했던 박 전 회장의 이름을 행사 주최자인 반 전 총장이 몰라 일기장에 적지 못했단 점은 되레 의문을 증폭시키는 지점이다.
다음은 박 전 의원이 제시한 반 전 총장의 일기 일부다. 공개된 반 전 총장의 2005년 5월 3일 일기에서 반 당시 장관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베트남 장관이 방한해 만찬을 주최했다. 손님 중 부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베트남 명예총영사로 근무하는 사업가인 (공란) 회장을 초청했는데 이 분은 대통령의 후원자라서 그런지 태도가 불손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불편해하는데도 공식적인 만찬에서 폭탄주를 돌리라고 강권하고 또한 혼자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등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렸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과 가깝다고 돌아다니니 대통령에게 큰 누가 될 것이 틀림없다. 같이 참석한 사람들도 대통령과 관계를 의식해서인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도 상당히 불쾌했을 것이 틀림없다."
박 전 의원은 이 대목 중 특히 눈에 띄는 '공란'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특이한 게 빈칸"이라며 "실물을 보시면 지운 게 아니고 그냥 빈칸이다. 이게(공란) 뭐냐면 일기를 쓰시다가 사람 이름을 몰랐던 거다"고 박 전 의원은 주장했다. 박 전 의원은 "반 총장은 이 분(박연차)을 이때 처음 봤다고 하신다"며 "여러분도 생각해보시라. 친분도 없는 초면의 사람에게 23만 불을 받는 사람이 세상에 있나. 20만 불을 준 사람에 대해 일기를 쓰면서 이렇게 혹평을 한다는 것이 일반 사람들 상식에 맞는가"라고도 했다.
그러나 박 전 의원의 이날 해명만 종합해도 박 전 회장은 당시 만찬 행사에서 '중요 인사'였다.
박 전 의원은 해명 전반부에서 만찬 행사를 찍은 사진을 보이며 "반기문 장관 맞은 편에 이옌 베트남 장관이 앉아있고, 옆에 계신 분이 반 장관 사모님이고. 박연차 회장이 거의 중앙에 계신다"며 박 회장이 주요 인물임을 강조했다. 박 전 의원은 해명 도중 박 회장을 "당시 민간 기업 (참석자) 중 가장 핵심적 인사"라고도 강조했고 "박 전 회장 때문에 만찬이 1시간가량 늦춰졌다"고도 했다.
실제로 1994년 7월 '태광비나'라는 베트남 현지법인을 설립한 이래 긴 시간 베트남 경제 발전에 기여한 이유로 '명예총영사'에 위촉되었고, 이런 배경으로 한국-베트남 외교부 장관 만찬에 초청되었으며, 행사 도중 소란까지 떨었다는 박 회장을 행사 주최자인 반 장관이 이름을 몰라 일기장에 적지 '못'했단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지점이다.
외려 어떤 다른 이유로 이름은 빼고 상황만 기록에 남겼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구심만 제기될 수 있다.
"반기문 23달러 수수 의혹은 유령 등장하는 소설"
이 외에 박 전 의원이 한 나머지 해명들은 힘이 약했다. 그는 <시사저널> 보도내용과 달리 "숱한 사람에게 물어봐도 공관에 사무실이 없다"고 했다. 장관 공관에 "장관 개인 집무실이나 사무실이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박 전 의원은 또 만찬 행사 당시 "추측건대 참석자와 보좌관 등 50명 정도가 공관 주변에 있었을 것이다"며 "23만 달러는 100달러짜리 지폐로 2000장이다. 부피가 상당해 주머니에 넣으려고 해도 안 들어간다"고 했다.
<시사저널> 보도에선 쇼핑백이 전달됐다는 증언이 나온다.
박 전 의원은 또 "뇌물에는 공짜가 없다"며 "그런데 시사저널 기사나 돈을 줬다는 풍문을 들어봐도 외교부 장관에게 어떤 권한이 있기에 그런 거금을 줬는지가 전혀 제시가 안 된다"고 말했다. <시사저널> 보도에선 '박 회장의 지인'은 "돈을 줌으로써 베트남 장관 일행이 만찬장에 왔을 때 (박 회장이) 반 장관과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베트남 장관 일행에게 박 회장이 한국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사업가로 보였을 것"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박 전 의원은 브리핑을 마칠 즈음에는 "뇌물죄가 성립하려면 누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언제 어디에서 (주었다는) 이런 7가지 요소는 기본적으로 맞아야 한다"며 "이 사건은 이 7가지 중 단 하나도 특정을 못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건 7대 불가사의라고 저는 생각한다"며 "유령들이 등장하는 소설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박 전 의원은 검찰이 2009년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던 당시 '박연차 리스트'를 확보했고 여기에 박 전 사무총장도 포함돼 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리스트가 있다 한들 물리적으로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작성했는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에서 작성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리스트가 100장 1000장이 있든 무슨 소용인가"라고도 했다.
반 전 총장이 '박연차 리스트' 관련 의혹 제기를 하는 매체나 기자를 형사 고소하지 않고 언론중재위와 민사 소송을 통한 의혹 해소 시도에만 매달리고 있는 점은 이날 질의응답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거론됐다. 박 전 의원은 '시사저널을 고소할 계획은 없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제가 오늘 그거까지 다 말씀드리기는 그렇다"고 주저하며 사견을 전제로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언론계 일각에서는 반 전 총장의 형사 고소로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 대검찰청에 보관되어 있는 '박연차 리스트'가 불가피하게 공개될 터라 반 전 회장이 고소를 피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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