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등 기독교 단체를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 자신의 성소수자 관련 발언에 대해 '해명'을 했다.
유엔 사무총장 재직 시절 동성애자와 성전환자 등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한 것이 그들을 "지지"하거나 소수 성 정체성을 갖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이었다는 게다. (☞관련 기사 : 반기문 해명도 논란 "동성애 지지한다는 게 아니라")
반 전 총장 측이 보도자료까지 내어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그의 발언 가운데 해당 부분은 아래와 같았다.
"제가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인권, 인격이 차별받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이고, 차별을 받지 않도록 여러가지 정책에 대해 지지한 것이다. 제가 권장해서 '당신들 그렇게 해라'(하고) 행위를 권장하는 게 아니다."
차별에 반대하긴 하는데 차별받는 이들을 '지지'하지는 않겠다는 게 무슨 말인지, 동성애를 '성 정체성'의 문제로 파악한다면서 이게 과연 '권장'하거나 하지 않을 대상이 되는지 등등 숱한 논란을 낳을 만한 발언이었지만, 단순히 말 자체만으로 놓고 봤을 때도 그가 과거 사무총장으로서 했던 말들과 모순된다는 지적이 예상된다.
반 전 총장은 지난 2016년 7월 13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LGBTI(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간성) 컨퍼런스'에서 "LGBTI는 차별에 용감하게 맞서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에게 완전한 지지와 리더십을 보내야 한다(We owe them full support and leadership)"고 연설했다.
2014년 5월에는 유엔이 만든 성소수자 차별 철폐 홍보 영상에 대해 "이 비디오는 우리들 개개인이 우리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LGBT 동료들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보여주는 것(showing our support for our LGBT colleagues)의 영향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며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 비디오를 보고 공유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같은해 11월, 유엔의 홍보 블로그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존중과 관용'을 주제로 한 국제 행사 소식이 올라왔다. 이 블로그는 유엔 소셜미디어팀이 홍보 등의 목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유엔 소셜미디어팀은 이 블로그에 "반기문 사무총장은 이 행사에서 LGBTI에 대한 그의 지지를 보여줬다"고 썼다.
아래 연설은 '지지'였을까, 아닐까? 2015년 9월 연설에서 그는 "나는 괴롭힘당한 십대 게이 소년과, 일자리를 잃은 트랜스젠더 여성과, 비열한 성적 공격에 노출된 레즈비언들과 나란히 서겠다(stand with)"고 말했다.
'stand with'는 직역하면 '~와 나란히 서겠다'이지만, 의역하면 '~를 지지한다'고도 해석된다. 예컨대 2015년 파리 테러 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 메인 화면에는 'We stand with Paris'라는 문구가 띄워졌는데, 한국 언론은 이를 "우리는 파리를 지지한다"로 번역해 보도했다.
같은해 6월 26일, 유엔 헌장 70주년 기념행사 후 오찬 연설에서도 같은 표현이 쓰였다.
"오늘, 나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십대와, 건강보험과 일자리를 잃은 노숙자 트랜스젠더 여성과, 단지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고문받은 젊은 커플과, 인권 지지 선언을 용감히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활동가와 나란히 선다(또는 지지한다. stand with)."
반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남긴 업적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평가하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외신의 평가는 대체로 비판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판적인 보도에서도 그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파리 기후변화 협정 등 지구 온난화 문제 대처와, 성소수자 권리 옹호다. 그런데 귀국 후 반 전 총장은 고작 10여 일 만에 이런 빛나는 '업적'에 스스로 먹칠을 하고 있다.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보수 기독교인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일까? 퇴임을 딱 3달 앞둔 2016년 9월 21일, 그는 "정치적 비용을 기꺼이 치르겠다"고 했었다. 미국 뉴욕에서 열린 LGBT 코어그룹 부대행사 연설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LGBT 핵심그룹은 우리의 든든한 동맹군이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적이 있다. '더 크게 말하는 것(speaking up)'에는 [정치적] 비용도 따르지만 나는 그 비용을 자랑스럽게 치르겠다.
(The LGBT Core Group is our great ally – but we have many adversaries. There is a [political] cost to speaking up – one which I am proud to pay. 여기서 'speak up & speak out'은 유엔의 성소수자 캠페인 슬로건이다.)"
사실 이 연설 내용은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연설에서 "나는 우리 인류 가족(human family)의 LGBT 멤버들의 평등을 위해 언제나 싸울 것"이라며 "이 과업은 내가 사무총장직을 떠나도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임한 뒤에도 사무총장 사무실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또 그는 이렇게 질타했다.
"나는 종교적, 문화적 주장을 성소수자 인권을 박탈하는 데 이용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다른 사람을 '덜 평등'하게 만드는 것으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의 '종교'나 '문화'라는 것이, 오직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것으로만 지켜질 만큼 약한가? 우리의 21세기는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나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에 기반을 둔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다."
유엔 사무총장직을 떠나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공격에 계속해서 맞서 싸울 것이라는 약속, 종교나 문화는 결코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신념, 이를 지키는 일에 따르는 정치적 대가라면 얼마든지 치르겠다는 용기.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가졌었으나, '정치인 반기문'도 가졌는지는 조금 의심되는 덕목들이다.
반 총장의 '업적'은 이른바 '핑크 워싱(pink washing, 본인의 소신과 상관 없이 인기, 표 등을 위해 성소수자 옹호 발언을 하는 행위. 분홍 세탁)'이었을 뿐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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