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70년을 넘긴 핵 시대에서 '87년 체제'라고 불러도 좋을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1987년 12월 미국의 레이건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미국 워싱턴에서 만나 중거리핵미사일폐기(INF) 협정에 서명한 것이다.
이 협정에 힘입어 미소 양측은 사정거리 500~5500km의 지상 발사 탄도미사일 및 순항미사일을 모두 폐기키로 했다. 여기에는 1980년대 신냉전의 상징이었던 소련의 SS-20과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4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미소 간의 핵 군비 '경쟁'의 역사는 무대 뒤로 사라졌고 핵 '감축'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조지 오웰이 일찍이 간파한 것처럼 냉전의 핵심에는 핵 경쟁이 있었다. 이는 곧 핵 감축 협정이 냉전 종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럽을 핵전쟁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던 SS-20과 퍼싱-Ⅱ가 철수·폐기되면서 그 자리에는 탈냉전의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INF 조약은 한반도에도 훈풍을 몰고 왔다. 조지 H. W 부시 행정부가 한국에 배치한 수백 기의 전술핵을 철수키로 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버지 부시는 노태우와의 협의를 통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핵전쟁 훈련 가운데 하나였던 '팀 스피릿' 중단 결정을 내렸다. 이는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협정 가입과 동시에 이뤄지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에 결정적인 추동력을 만들어내는 듯 했다.
하지만 중단키로 했던 '팀 스피릿'을 한미 강경파들이 느닷없이 재개키로 하고 북한이 이에 반발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하면서 핵 위기가 비핵화를 밀어내고 말았다.
핵 시대의 '87년 체제'가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트위터 하나가 핵 군비경쟁의 망령을 불러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22일(현지 시각) 트위터에 "미국은 세계가 핵무기에 대한 분별력을 갖게 되는 시점까지는 핵 능력을 큰 폭으로 강화(strengthen)하고 확장(expand)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관련 기사 :
트럼프와 푸틴, 냉전시대 '핵 망령' 불러냈다)
트럼프의 발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발언 직후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푸틴이 "전략 핵무기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현존하거나 앞으로 개발될 미사일 방어체제(MD)를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미사일 성능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하자 이에 대한 맞대응의 성격으로 나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푸틴의 발언이 도발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 주도의 MD에 맞서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전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2000년 취임 이후 줄곧 해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트럼프의 발언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한 버락 오바마는 물론이고 핵감축에 대단히 미온적이었던 조지 W. 부시조차도 미국의 핵무기를 양적·질적으로 증강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트럼프의 발언은 북한의 성명과 대단히 유사하다.
파장이 커지자 트럼프는 언론 탓으로 돌리면서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말실수로 치부하기에는 심상치 않은 부분이 있다. 먼저 '예측 불가능성'을 자신의 특기로 내세워온 트럼프는 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언술을 계속 구사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 현대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바마가 승인한 1조 달러짜리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힘에 의한 평화'를 주창해온 트럼프의 안보관과 부합할 뿐만 아니라 일자리 유지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가 계승할 오바마의 정책 가운데 하나로 예상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MD에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핵무기 현대화의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MD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가 핵무기 현대화와 MD를 동시에 추구하면 강대국들 사이의 핵 군비경쟁은 불가피해질 공산이 커진다.
이는 곧 한반도 문제와도 직결된다. 미국이 핵무기 현대화 및 사드를 비롯한 MD 추진의 가장 큰 명분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 위협이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핵 억제력" 강화의 이유를 미국의 적대시 정책으로 돌린다. 또한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면 중국과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핵 시대의 '87년 체제'는 핵무기와 MD의 적대적 동반성장에 마침표를 찍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INF 조약의 가장 큰 배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의 유명무실화였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방패를 갖겠다는 것 대신에 핵 감축을 선택했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핵 시대에 한반도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핵 군비경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답보 상태에 있는 핵군축의 시대에 선봉에 서느냐' 하는 중차대한 선택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승전 '사드 철회'이다. 사드 배치는 핵무기와 MD의 적대적 동반성장으로 상징되는 군비경쟁의 망령에 한반도를 영원히 가둬두는 최악의 수가 될 것이다. 반면 사드 철회는 이 둘 사이의 오랜 악연을 끊고 비핵·평화로 가는 길로 우리를 인도해줄 것이다. 우리가 정녕 다른 미래를 원한다면 그 출발점은 사드 철회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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