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과연 세간의 평가대로 트럼프의 대외정책 노선을 고립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라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등장이 한국 외교에게 기회인지, 아니면 위기인지에 대한 전망의 문제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트럼프의 외교를 고립주의로 단정하는 것은 왜곡의 위험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간의 많은 분석들은 트럼프가 비록 아웃사이더로서 공화당의 전통적인 노선과 많은 지점에서 이탈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전통 공화당의 고립주의라는 측면에서 대체로 일치한다고 평가한다.
전통 공화당의 고립주의 전통은 제5대 대통령 먼로의 대외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로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이었다가, 전후 '트루먼 독트린'을 계기로 개입주의, 또는 국제주의로 전환했다. 이런 변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동한 것은 민주당이었으며, 공화당은 상대적으로 고립주의 정책 성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본격적인 세계 패권으로 부상하면서 먼로적 고립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양당의 차이는 다른 측면에서 나타났다. 고립에서 개입으로 전환되는 것은 양당의 공통적인 특성이 되었으나, 민주당은 국제기구를 통한, 즉 다자주의를 통한 개입을 선호했던 반면, 공화당은 독자적이거나 일방적인 개입을 선호했다. 특히 공화당의 경우 1980년대 이후 레이건 행정부를 기점으로,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절정을 이뤘다. 당시 신보수주의의 이른바 '네오콘 세력'은 공화당의 일방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전형을 보여주었다. 현재 공화당 내에는 전통 공화당의 고립주의와 네오콘적 개입주의가 모두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의 경우 반(反)클린턴 전선이라는 선거 전략에 따라 고립주의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필요할 경우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겠다는 네오콘의 모습도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네오콘과도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네오콘이 이념적이고, 일관적이며, 분명한 대외정책 독트린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트럼프는 이념이나 원칙보다 소위 '촉(instinct)' 또는 '감(sense)'에 의해 사안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비일관성과 불가측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내 전문가들은 철저하게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되 매우 포퓰리스트적으로 접근하는 트럼프의 대외정책 노선을 미국의 7대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잭슨과 견주며 '잭슨주의(Jacksonian)'로 진단한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의 침체와 소득 불균형의 원인을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실패의 탓으로 두면서 다른 국가들은 물론이고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투자회사 등을 대상으로 노골적인 '제노포비아(Xenophobia)' 성향을 보인다. 또한 무슬림 입국금지, 이민 제한, 멕시코 국경에 장벽설치 등의 공약은 유럽의 브렉시트에서 나타난 세계적인 극우 준동과 궤를 같이한다.
이런 요소들을 종합할 때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지닌 일부 고립주의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고립주의를 붙이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신고립주의로 부른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트럼프 대외정책이 품고 있는 매우 예측이 어려우면서 거친 특성이 간과 또는 경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익이 걸려있는 사안이라고 판단될 경우 트럼프는 군사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공격적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트럼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당 뿐 아니라 미국 전체의 일반적 대외정책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무역, 인권, 핵무기 비확산, 동맹질서로 표현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에 바탕을 둔 가치 외교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해왔다.
트럼프의 외교는 원칙이나 전제를 제시하지 않고 불가측의 행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 국가로서는 대응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포퓰리즘적 성격은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배가시킨다. 오히려 트럼프는 공공연하게 외교에 있어 불가측성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소위 '광인이론(madman theory)'까지 주장한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이 너무 뻔해서 모든 나라가 예측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겠다고 주장했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콜라스 에버스타트는 과거 닉슨이 그랬듯이 외교에서는 상대국가가 예측하지 못하는 비합리성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유리한데, 트럼프는 닉슨보다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는 한국에 위기인가?
트럼프가 선거 기간 던진 한국과 관련한 발언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한미FTA 재협상, 안보 무임승차 비판,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 독자 핵무장 허용 가능성 등인데, 앞의 두 가지는 실천을 위한 아젠다이고, 나머지는 실천보다는 협상을 위한 레버리지용으로 판단된다.
트럼프의 국익 우선 및 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지지층의 불만을 감안하면 통상 압력과 분담금 요구는 어떤 식으로든 추진될 것이다. 트럼프는 1997년 이후 미국 제조업 일자리의 3분의 1이 사라졌는데, 이는 NAFTA와 한미 FTA를 포함한 각종 불공정한 무역협정 때문이라고 맹비난해왔다. 또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를 비판하고 훨씬 더 큰 책임과 헌신을 요구할 것이며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동맹관계는 종식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유럽의 나토 동맹국은 물론이고, 동북아의 한국과 일본을 적시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 미국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해주는 만큼 합당한 대가인 방위비 전액을 부담하지 않으면 미군철수를 고려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위한 협상용이라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과 막상 집권을 하게 되면 실제 철수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라도 트럼프가 집권할 경우 임기 초 상당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한반도의 안보 지형과 한미동맹의 틀이 급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받게 될 스트레스는 심대할 것이 분명하다.
대북정책도 포퓰리스트적 비일관성을 노정했다. 김정은과 대화 용의를 밝혀온 동시에 정반대로 "미치광이(lunatic)"라는 원색적 비난도 있었고, 또 김정은의 암살이나 선제공격 불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또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내비쳤다.
트럼프의 성격상 북한과의 극적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으나, 이것이 실패할 경우 대북 압박을 높이고 군사 제재로 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대북정책의 연속성이 부각되었을 클린턴의 경우와는 달리, 트럼프의 경우에는 강경책이든 전격적인 대화든 간에 한반도 안보지형의 변화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소위 'ABO(Anything but Obama)', 즉 오바마가 했던 모든 정책을 뒤집겠다는 의도를 보여 왔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북핵 정책의 근간인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전략은 실패로 규정했다.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최근 부상하고 있는 민족주의와 자국 중심주의로 국제질서는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장기적 글로벌 경기침체와 저성장 기조 속에서 미국경제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상황에서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는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고 이로 인해 갈등은 심화될 수 있다.
트럼프 현상은 2008년 재정위기 이후 미국의 위상 하락과 중국의 급속한 부상에 대한 우려와 반감이 기저에 깔려있다. 물론 오바마-클린턴의 아시아재균형 전략을 통한 대중 봉쇄나 대러 강경책이 일시 완화될 가능성이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 갈등구조는 재현될 것이다.
시진핑, 아베, 푸틴, 김정은, 박근혜가 하나같이 국내 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안보 포퓰리즘에 의지하는 동북아 리더십의 동조화에 트럼프가 가세함으로써 이른바 '스트롱맨'의 '완전체(?)'가 갖춰지는 셈이다. 이로 인해 동북아의 군비경쟁과 안보 딜레마는 심화될 것이다. 특히 최근 트럼프의 대만 총통과 통화나 필리핀과의 협력 조짐 등에서 보듯 트럼프 역시 중국의 부상을 제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으로 갈등구조는 재현될 수밖에 없다.
외교의 골든타임
현재 대한민국은 내우외환으로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렵다. 외교의 경우는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강행, '위안부' 합의,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 등 연이은 패착으로 박근혜 정부는 주요 외교 카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인한 국정 공백의 상황 속에서 불가측의 트럼프 정부까지 마주하게 됐다. 게다가 국정 공백과 함께 깊어지는 한국 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곧 현실이 되어 다가올 미국의 통상 압박은 설상가상의 부담이다.
그러나 위기 속에는 기회가 있다는 말을 다시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둘은 반반의 가능성은 아니며, 위기적 상황이 지배하는 속에 기회의 틈이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으며, 우리가 하기에 따라 반전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트럼프의 당선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에서 운신의 폭을 늘려주는 측면이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트럼프는 대외정책에 관한 세계관은 분명하지만, 정책적 전문성과 콘텐츠가 부족하기 때문에 학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자신은 관리자로의 역할만 하고 대외정책을 전문 관료들에게 위임한다고 해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지배 정당이 교체되기 때문에 외교안보 라인의 진용을 새로이 갖추는데 상당한 시일을 소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시점에서 국무장관, 안보보좌관, 국방장관의 3가지 핵심요직 중에 마이크 플린 안보보좌관만 내정되었을 뿐 나머지 인사는 소문만 무성한 채 진통을 겪고 있다. 게다가 트럼프는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리얼리티 쇼였던 <어프렌티스>처럼 사람들을 임명하는 소란스러운 과정을 즐기는 태도까지 보이고 있다. 더욱이 트럼프가 국내 정책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정책의 틀을 갖추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여러 변수들을 감안하면 빨라야 내년 5~6월까지, 현실적으로 7~8월, 또는 늦어질 경우에는 연말까지 갈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골든타임이 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국정 공백 상황이 해결이 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 트럼프가 대외정책 기조를 완성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대북정책을 포함해 한반도 상황을 주도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원칙이나 이념에 기초하기보다는 '실용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발 동맹의 재조정은 국내 이념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미국 발 재조정은 이념 분열도 최소화할 수 있으며, 동맹에 대한 한국의 지나친 의존성을 극복하고 보다 실용적이고 호혜적으로 양국 관계를 재설정하는 호기로 삼을 수 있다. 한미동맹의 중독, 신화, 관성이 아닌 국익 우선에 입각한 계약 관계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트럼프는 평생 비즈니스맨으로서 이익을 위해 수시로 진영을 넘나들고, 입장도 바꿔왔다. 낙태 문제, 헬스 케어, 총기 규제, 이라크 전쟁 등의 이슈에서 필요에 따라 찬성과 반대를 오갔으며, 심지어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체성도 바꾼 적이 있다.
이는 예측이 어렵다는 측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즉, 원칙과 이념을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보다 대화를 통한 이른바 '딜'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충동적 성격으로 인해 통제 불능으로 가버릴 위험이 없진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포퓰리즘적 특성에서 국내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제안을 한다면 수용할 수 있다는 부분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는 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등장과 박근혜 게이트는 위기와 기회 요인을 모두 품고 있다. 기성 정치 체제에 대한 실망과 혐오가 극에 달해서 트럼프 같은 선동 정치가가 득세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는 세계적인 극우 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경한 대외정책으로 무장한 안보장사꾼들이 판치는 동북아에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평화를 주도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 난국을 타개하게 된다면 더욱 탄탄하고 강력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라며 현재 한국의 스캔들이 갖고 있는 밝은 측면을 부각시켰다. 지금 대한민국은 진정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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