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피트니스센터를 다니며, 트레드에서 걷고 달리곤 했다. 시간과 속도를 정해서 일정한 운동량을 확보해준다는 점이 합리적으로 느껴졌고, 날씨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운동 방식에도 꽤 익숙해졌다. 트레드에서 걸을 때는 TV 화면을 응시하는 것이 지루함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때로는 산을 오르내리는 것과 같이 경사를 조정해 프로그래밍하기도 했다. 러닝머신의 경험은 마치 우리 도시의 현실을 압축한 것과 같다. 정해진 시간과 속도가 삶의 부분을 규정하고, 일상의 순간은 미디어가 지배하며, 가상이 실재의 경험을 대치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쳇바퀴와 같은 트레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경험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숲길에서 초록의 냄새를 맡고, 숲 속으로 비추는 햇볕을 쬐기도 했다. 때로는 비로 온몸이 젖어도 진공의 트레드보다 살아 있는 공간 속을 걷는 느낌이 한결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된 뒷산 등반과 동네 산책은 내 신체의 감각을 일깨우는 일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걷는 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 체화된 습관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늘 걸어 다녔다.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의 걸었으니, 어린아이가 걷기에는 꽤나 먼 거리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보낸 시간보다 길에서 보낸 기억이 더 생생하다.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다닌 등하굣길은 세상을 발견하고 탐험하는 곳이었다. 길을 가다가 군것질을 하기도 하고, 문방구에서 진기한 잡동사니 구경을 하기도 하고, 때론 친구들과 떼 지어 싸움도 했다. 길을 걸으며 사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고, 그렇게 세상을 조금씩 알아 갔다.
요사이는 대부분 승용차에 의존해 출퇴근한다. 지하철을 타서 환승하고 마을버스도 이용하려고 노력하지만, 시간 단축과 편리함 때문에 자동차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예전에 걷기란 생활과 함께하는 일상이었지만, 이제는 여가와 신체단련을 위해 시간을 들여서 노력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도시에서 걷기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편리함의 미명 속에서 자동차 중심의 도시를 지향해온 도시 여건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생활 속의 걷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집합적 삶의 역인 도시정책 차원과 개인적인 체험과 태도에 대한 성찰이 동시에 필요하다.
걷는 도시 만들기
21세기, 세계의 많은 도시들은 살기 좋고, 활력 있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러 도시들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각자 처한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에 힘쓰고 있다. 앞서나가는 도시들은 '걷는 도시'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에서 '사람 중심의 도시'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근대 도시 걷기의 역사는 19세기부터 시작한다. '보고 보이는 것'의 속성이 존재하는 산책로를 통해 걷기는 확산되었다. 산책로는 공원과 광장을 연결하고, 여러 공공 공간에서 다양한 계층들이 섞이고 소통하게 하다. 20세기에는 교외 도시가 개발되면서 자동차에 의존하는 도시 공간 구조로 변화했다. 도심은 쇠퇴하고 걷는 도시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은 소멸해 갔다. 교외의 쇼핑몰과 주차장이 도시의 광장과 가로를 대치한다. 자동차 속도와 주차장 건설 위주의 도시정책이 지배하면서 걷기는 일상생활에서 소외되었다. 걷는 도시의 쇠락은 공공공간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도심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시 가로와 공원, 광장 등 공공 공간은 활성화되었다.
오늘날 세계 많은 도시가 '걷는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탄소 저감, 건강, 지역활성화 등의 도시화로 인한 여러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대중교통 체계를 갖추고,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여 비동력 교통수단의 비율을 향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젊은 인구를 도심으로 유인하고, 이동에 소요되는 비용을 절약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했다.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박혜인 옮김, 마티 펴냄)의 저자인 제프 스펙은 미국 북서부에 있는 포틀랜드를 성공적인 사례로 든다. 이러한 보행 도시로의 정책은 단지 보행 환경 개선과 친환경 교통수단으로의 전환을 넘어, 지역경제 부흥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수반하는 총체적 도시재생 기획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뉴욕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욕시는 보행 활성화와 공공 공간 재생,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통합적으로 추진한 성공적인 사례이다. 마이클 블룸버그가 시장으로 재직하던 2002~2013년 동안 '더 푸르게, 더 위대하게(Greener, Greater)'라는 비전 아래 'PlaNYC'(2007년 뉴욕시가 뉴욕을 도시로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2030년까지를 목표로 세웠던 장기프로젝트의 명칭)는 도시정책의 비전을 담는 전략계획을 수립하다. 탄소배출을 억제하고 보행자를 편리하게 하는 지속가능한 도시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현실화했다. 공원과 공공 공간은 정책의 주요한 부문을 차지하는데, 친환경적 교통정책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매력적인 버스 시스템, 이용을 증진하는 자전거 네트워크, 공공 역의 질 향상 등이 구체적인 어젠다다. 도로 다이어트와 공공 공간 조성을 결합하여 추진하고, 교통국과 공원휴양국이 협력해 사업을 진행했다. 가로(街路) 활성화가 상권에도 향을 미친다는 생각으로, 자동차 위주의 교통정책에서 걷기와 자전거 활성화를 위한 도로 재조정과 가로 만들기에 역점을 두었다. 그 결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의 수는 2000년에 비해 두 배로 늘었고, 2008년과 비교해 자전거 이용자가 35% 증가하였으며, 2007년 이후 60여 개의 광장이 조성되었다.
'걷고 싶은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걸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넓어진 보도에서 도시를 즐길 수 있는 매력 있는 공간이 형성되어야 한다. 사람들을 유인할 상점, 편히 쉴 수 있는 거리의 카페는 사람들을 모으고 머무르게 하며 도시를 즐기게 한다. 보행 도시는 도시를 활력 있게 하는 공원과 광장, 공개 공지와 가로, 건축물 간의 긴밀한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가속화된다. 따라서 걷는 도시는 통합적인 도시 만들기의 관점에서 여러 주체가 협력하여 추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서울시도 1997년부터 보행환경 개선 조례를 제정했다. 2013년에는 '보행친화도시 서울' 비전을 발표하며 보행환경 개선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사대문의 역사 도심을 보행 중심 공간을 만들기 위해 더욱 과감한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종로의 도로다이어트, 지하 공간을 포함하는 광화문 일대의 보행 체계 개선 등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새로운 친환경 교통수단의 도입, 차량통행 억제, 공공 공간 조성, 상가 활성화 등 통합적인 도심 리뉴얼 프로젝트와 연계하여 추진해야 한다. 시청의 여러 부서뿐만 아니라 경찰청, 구청, 상인회 등과 긴하게 협력할 수 있는 신뢰와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걷기,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
루소에서 워즈워스, 니체와 칸트에 이르기까지 걷기는 자유의 경험, 상상력의 시간, 명상의 공간, 행복의 원천이었다. 레베카 솔닛은 "걷기의 리듬은 사유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는 움직임은 사유 속을 지나는 움직임에 반향을 일으키거나 자극한다"고 걷기와 사유의 관계에 대해 주목했다.(<걷기의 역사>(김정아 옮김, 민음사 펴냄) 13쪽) 자연 속을 걷는 것은 고요함과 명상을 수반하며 정신과 육체의 회복을 촉진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하루 4시간 정도는 세속에서 벗어나 걸어야 한다고 하다. 걷기를 통하여 우리는 주변에 대한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내면으로의 성찰이 가능해진다. 오늘날 빠르게 변화하는 일상 속에서 사색과 관찰을 위한 걷기는 사라지고,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걷기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걷기가 현대 도시 생활에서 다시 위로를 줄 수 있을까? 폴 오스터의 <유리의 도시>(속 주인공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지탱할 힘을 걷기에서 얻는다.(<뉴욕 3부작>(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펴냄) 10쪽) 그는 걷기를 통하여 평화를 얻어 편안하게 마음을 비우곤 하다. 걷기는 정신과 육체의 감각을 회복하게 하며, 탈인간화된 도시에서 개인의 실존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도시 감각은 상실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하 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자연조건, 습도와 기온, 바람 등은 체감하기 어렵다. 완벽한 자동차 실내공간에서 도시의 소음은 소거된다. 이어폰을 끼고 도시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도시의 소리와는 벽을 쌓는다. 3D 또는 4D 등의 스크린도 감각 경험을 상품화하고 있다.
도시는 늘 우리 감각과 감성을 자극한다. 걷기는 도시의 감각 풍경을 체험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두 발로 도시의 가로를 걸을 때 생생한 도시의 삶의 현장이 체감된다. 걸으면서 냄새 맡고, 소리를 듣고, 맛보면서 도시를 느끼게 된다. 찰스 랜드리는 "친환경 교통수단을 앞당겨 도입하라. 나무를 많이 심어라. 자극적인 공간과 사색적인 공간의 균형을 맞추라는 여론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역사넷 펴냄) 80쪽)이라고 말하며, 시민의 감각을 자극하면 행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도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이 탈육체화되는 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도시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런던에서 공용자전거를 타며 하루를 온종일 도심에서 보냈다. 갤러리와 박물관 등의 도시 공간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걷기를 반복했다. 자전거를 타고 템즈 강변을 달리기도 했고, 차로 변 자전거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그리 쉬운 일을 아니었지만, 도시의 스케일과 움직임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도시의 중심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우리 도시도 변해야 한다고 절감하다.
걷는 도시를 만드는 일은 개개인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고민하고 집단으로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도시는 아직도 자동차 중심의 사고가 지배한다. 자동차의 속도를 높이고 주차장을 확보하는 것보다 걷는 사람들의 보행권이 더욱더 강화되어야 하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더 많은 도로가 차선을 줄이고, 보행로나 자전거도로로 전환되어야 한다. 도시 여건의 변화로만 걷는 도시가 실현될 수는 없다. 개개인의 인식과 태도,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걷고, 자전거를 타면서 온몸으로 감각을 느끼는 도시로 전환하는 것, 이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