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시대가 열렸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와 함께 트럼프 당선의 의미와 향후 세계 질서의 변동 흐름, 그리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정치적 혼란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대응 방안 등을 모색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우선 트럼프의 당선 배경에 대해 김 교수는 "2001년 9.11테러로 미국의 안보가 무너졌고, 2008년 금융위기로 경제가 무너졌다. 이 두 개의 축이 무너진 상황에서 제도 정치권 바깥에서 두 가지 대안이 나왔다"며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도널드 트럼프가 열풍을 일으켰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결과적으로는 트럼프를 택했다. 김 교수는 "트럼프는 나치의 히틀러와 비슷한 방식의 극우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미국은 이런 방향의 대안을 선택했다"며 "트럼프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식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두려운 부분"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보자면 고립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트럼프가 개입주의를 주장하는 힐러리 클린턴보다 나은 선택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개입주의가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 중국 간의 관계에서 계속 대결 구도로 나갔다"며 "트럼프 당선자는 고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아시아 내에서 미국-러시아, 미국-중국 관계가 일시적으로 완화될 가능성은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그는 미국과 다른 국가의 평화적인 공존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김준형 교수는 "트럼프는 고립주의와 대결주의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통해서 세계 질서를 구축한다는 측면에서는 '네오콘'적인 성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트럼프가 쓸데없는 개입은 하지 않겠지만, 필요하다면 압도적인 힘을 사용해서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트럼프의 성정을 봤을 때도 이런 부분을 부정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미국은 기본적으로 전쟁경제 체제다. 무기 산업을 죽이고 살아남기 어려운 경제 구조"라며 "미국이 평화에 대한 웬만한 헌신 없이는 이런 대결적인 구조를 바꿀 수 없다. 오죽하면 '위기를 생산하고 무기를 팔아라'라는 말도 있지 않나?"라고 되물었다.
트럼프 당선으로 전 세계가 각자의 셈법에 몰두하면서 트럼프와 관계를 고민하고 있는 가운데,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한국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을 계기로 대통령이 외치를 해야 한다며, 이번 일을 대통령 주도의 국정 정상화 필요성을 강조하는 발판으로 삼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김준형 교수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어떻게 외치를 하나?"라고 잘라 말했다.
김 교수는 "APEC은 조약을 체결하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느슨한 협의체인 데다가 매년 열리는 행사다. 이런 행사도 가지 못할 정도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다"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APEC 불참은 한국의 외교 마비 상태를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는 클린턴에 비해 정부를 구성하는 데 오래 걸릴 것이다. 우리에게 시간적 여유와 공간적 운신의 폭이 생긴 셈"이라며 "이러한 기회를 잡아서 우리가 원하는 외교를 펼치기 위해서라도 빨리 체제를 정비한 뒤 대응해야 한다. 과도 내각과 조기 대선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거의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한 세기 만에 일어날까 말까 한 세계사적 사건인 것 같다. 트럼프 당선 이후의 미국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든다.
트럼프의 당선이 가져올 변화를 어느 정도로 봐야 할까? 로널드 레이건이 구축했던 신자유주의의 종언인가? 아니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과 2차 대전 승리로 확립한 미국 패권의 몰락인가? 혹은 그보다 더 앞서 미국이 세계를 경영하겠다는 야심을 천명했던 우드로 윌슨식의 세계 개입의 퇴조인가?
김준형 : 윌슨 대통령 이후에 미국이 변화하는 전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로버트 라이시 UC버클리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도 이야기했듯이 지금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때와 매우 비슷하다. 미국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식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앞서 2001년에는 9.11테러로 안보에서 한 번 휘청거렸다.
경제적 측면과 안보적 측면에서 한 번씩 타격을 입은 것인데, 이번 선거는 미국 지배 계급의 통치력에 한계를 보인 것이다. 거의 모든 정치인과 제도권 언론, 학계 등이 일치단결해서 힐러리 클린턴을 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았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30년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한다.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그 비결은 자유무역이었다. 역사상 가장 큰 부를 창출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꽃을 핀 것이 20세기 후반인데, 이번 선거로 자본주의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이미 2008년 금융위기 때 경고 신호가 나왔다. 하지만 이후로도 해결하지 못한 채 소득불균형과 양극화가 가속화됐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기층 민중이 반기를 든 것이다. 미국의 지배 질서가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안보와 경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2016년 미국에는 제도 정치권 바깥에서 두 가지 대안이 나왔다.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가 그들이다. 기존의 정치 질서와 제도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도권 바깥에서 대안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기존 정치권인 민주‧공화 양당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는 일종의 '케인즈 식' 해결 방법이었다. 대공황이 벌어졌던 1929년과 지금은 유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2016년 미국은 당시의 모델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샌더스는 혁명적이었지만 이성적‧논리적‧지성적이었다. 현재 미국인의 의식과는 다소 결이 다른 측면이 있다.
미국 국민들은 히틀러를 겪지 않았다. 대신 미국에는 케인즈주의와 뉴딜 동맹이 있었다. 뉴딜 동맹은 복지동맹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국가가 어려울 때 한 쪽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노인, 가난한 사람들 등 약자의 경제적 상황을 끌어 올려서 구매력을 창출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2016년의 미국은 복지 동맹은커녕 저성장과 소득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뉴딜 동맹이 깨진 것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깊게 파고 들어가지 않더라도, 사실 미국의 중산층은 기존 정치 집단인 민주당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뉴딜 동맹이 깨진 것은 1980년대 이후 생겨난 신자유주의 광풍 때문 아닌가?
김준형 : 물론 그렇다. 바로 그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진보가 손을 잡은 것이 문제다. 우리나라만 해도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와 손을 잡지 않았나. 결국 혁명적으로 뉴딜동맹을 살려내지 않으면 해결점은 없다. 이건 미국과 한국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것은 트럼프 식 해결인데, 이건 나치의 히틀러와 비슷한 방식이다. 히틀러가 전쟁으로 돌파구를 마련했기 때문에 트럼프도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대안이라고 동의한 것은 분명 히틀러 식의 극우 포퓰리즘과 선동이다. 이게 두려운 부분이다.
프레시안 :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되면서 CNN은 'stunning repudiation of political Establishment' 즉, '제도 정치권에 대한 충격적 거부'라는 헤드라인을 내걸었다. 거의 모든 제도 정치권과 학계, 언론이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는데도 트럼프가 승리한 요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김준형 : 소위 '뉴 노멀'(new-normal, 시대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기준이나 표준) 현상이라고 본다. <뉴욕타임스>에서 사회가 영(靈)적으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는데 실제 이번 선거에서도 영적인 단어들이 많이 사용됐다고 한다. 힐링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이런 단어들이다. 이는 지성주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성이 채워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감성주의가 그동안 누려왔던 번영을 잃었다는 박탈감과 합해지면서 혐오적인 색채를 띄기 시작했다. 이것이 분노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사실 감성주의는 사람들을 통합시키고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등 좋은 점도 있다. 그런데 이런 감성은 지금 현재 미국의 기층 정서와 맞지 않았다. 사실 힐러리 클린턴 후보도 선거 과정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클린턴 후보는 기득권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던 상황이라, 가해자가 '힐링'을 하는 격이 돼버렸다.
물론 트럼프도 '금수저'로 태어난 가해자 입장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포용이나 사랑이 아니라 분노를 건드렸다. 똑같이 감성을 건드리더라도 분노를 자극하면 폭발적인 힘이 나올 수 있다.
트럼프는 현재 미국 인구 중 70%를 차지하고 있는 백인들의 분노를 건드렸다. 이번 선거는 백인 유권자와 유색인종 및 여성 간의 대결이었다. CNN은 히스패닉과 아시아계를 비롯한 비(非)백인들이 조기 투표에 많이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과장해석이 된 것 같다. 숨어있던 백인 유권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이번 선거를 '제시 벤추라 효과', 즉 기존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상상하기 힘든 선택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는데, 물론 장난치는 것 같은 부분도 있지만 백인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결집시켜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심리도 있었다고 본다. 지난 6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가 있었을 때도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국민들은 어차피 뻔히 보이는 미래에 '에라 모르겠다',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 표를 던졌을 텐데 이번도 유사한 심리였다고 본다.
게다가 이러한 감성적인 부분은 여론조사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지성주의에 입각한 전문가의 객관적인 분석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한 분석과 대비는 필수적이다.
프레시안 : 결국 기층 백인과 여성 및 소수인종 간의 대결에서 백인이 이긴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준형 :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의 여성 혐오는 계획된 것일 수 있다. 폭스 뉴스 앵커 메긴 켈리가 날카로운 질문을 하자 트럼프는 '눈에서 피가 나왔다, 다른 곳에서도 나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미국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혐오를 잘 표현하지 않는다. 'Political Correctness', 그러니까 '정치적인 올바름'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말하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이를 'neutral', 즉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태도는 오래 전부터 냉소의 대상이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기준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웃기고 있네, 올바른 척 하고 있네'라는 냉소가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심리를 건드린 셈이다.
이걸 백인 남성 입장에 투영시켜보면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되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히스패닉이 많이 보이고, 심지어 그들이 본인보다 잘 살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주인 입장에서 투표로 복수를 실행에 옮겼다.
미국 백인들은 자신들이 확실한 우위를 차지했을 때는 굉장히 관대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잔인해진다. 그런 사람들이 본인이 주인 자리를 뺏기는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고, 이번이 마지막 반격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은 이번 트럼프 당선을 보고 유럽의 극우 현상이 미국으로 전파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놨다.
김준형 : 유럽에서 전파됐다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중심이 같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불가리아의 정치학자 이반 크라스테브는 브렉시트가 유럽의 통합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번 선거는 미국의 통합을 되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탈냉전이 오기 전까지, 즉 1990년대 이전까지 소외됐던 것은 제3세계였다. 그래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이 선진국과 제3세계 간의 불평등 문제였다. 이 부분이 맑시스트나 종속이론가들에게 문제제기를 받았는데 탈냉전이 된 이후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이 불평등에 대한 제어판이 없어졌다.
이렇게 되면서 양극화와 빈곤은 제3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중심에서도 문제가 됐다. 저성장 기조가 유지되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까지 연계되면서 양극화와 빈곤은 가중됐다. 중산층 붕괴라는 현상이 선진국에서 만들어지면서 우파의 토양을 만들어 낸 셈이다.
물론 이는 좌파의 토양이 될 수도 있었지만 좌파는 이미 유럽에서 실패한 바 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예전에는 찾지 않았던, 좌파의 해결 방법보다 더 멀리 있었던 히틀러 식의 해결 방법을 선택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감성주의나 분노가 흘러가게 됐고 이는 자본주의의 중심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럽이 미국을 감염시켰다기 보다는 미국은 유럽보다 더 늦게 나타난 것 뿐이다.
프레시안 : 미국은 그동안 자유무역협정을 여러 국가와 체결해왔다. 그런데 트럼프 집권 이후로 무역 관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김준형 : 트럼프 당선자는 후보 시절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가 '최악'이라고 말했다. 반드시 건드릴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 공화당과 부딪힐 것이다.
물론 트럼프가 이러한 발언을 멕시코나 한국, 중국 등에 협상을 위한 압박용으로 쓴다면 공화당도 지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FTA를 파기하려 한다면 공화당과 첫 번째 대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 공화당 지지자와 트럼프 및 트럼프 지지자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프레시안 : 파기가 쉽지 않다면, 재협상 내지 수정을 해야 할 텐데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까?
김준형 : 경제전문가가 아니라서 확답을 하기는 어렵지만, 미국에 더 이익이 되는, 그것도 눈에 확 보이는 이익이 되도록 재협상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어느 국가가 그렇게까지 양보하겠나? 이 지점에서 갈등만 촉발될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 입장에서는 비록 갈등만 커지더라도 이런 모습을 지지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과연 트럼프가 첫 임기인 4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나오고 있다. 제도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혐오감을 표시했고 심지어 공화당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국정 운영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까?
김준형 : 트럼프는 특유의 촉이 있어서 일단은 '간'을 볼 것 같다. 일단 처음에는 본인이 공언했던 일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볼 것이다. 물론 트럼프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반대자를 포함한 지지자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세계 평화에는 클린턴보다 트럼프가 낫다?
프레시안 :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세계적인 평화에 관해서라면 트럼프가 낫다'고 평가했다. 트럼프가 미국의 과도한 해외 군사 개입을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또 문정인 연세대학교 명예 특임교수는 트럼프의 당선이 한국의 자주화를 앞당길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우리 스스로 안보, 국방 정책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도 미국 내에 기존 관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을 수 있지만, 미국 세계전략의 두 축인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미-유럽 군사 동맹과 미일 군사 동맹이 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향후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이 세계질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보나?
김준형 : 단기적으로는 개입주의가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협력적, 다자적, 협상적인 거버넌스로 시작했다가 러시아, 중국 간의 관계에서 계속 대결 구도로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당선자는 고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아시아 내에서 미국-러시아, 미국-중국 관계가 일시적으로 완화될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두 가지 측면에서 이는 실현하기 힘든 시나리오라고 본다. 우선 트럼프는 고립주의와 대결주의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통해서 세계 질서를 구축한다는 측면에서는 네오콘적인 성향이 있다. 특히 쓸데없는 개입은 하지 않겠지만, 필요하다면 압도적인 힘을 사용해서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성정을 봤을 때도 이런 부분을 부정하기 힘들다.
두 번째, 미국은 기본적으로 전쟁경제 체제다. 즉 무기산업을 죽이고 살아남기 어려운 경제 체제를 갖고 있다. 미국 국내 구조도 그렇고, 중국이 부상하고 러시아가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는 동북아의 역학 구조 상 미국이 평화에 대한 웬만한 헌신 없이는 이런 대결적인 구조를 바꿀 수 없다.
'위기를 생산하고 무기를 팔아라'라는 말도 있지 않나? 이러한 미국의 속성은 바뀌기가 힘들다. 무기산업뿐만 아니라 군도 그렇다. 지금 용산에서 주둔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
프레시안 :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의 제국주의가 나름대로 원칙이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진행됐다면, 트럼프는 공격적이고 자국 중심적인 제국주의를 보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와중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행보가 상당히 재빠르다. 17일 미국을 방문하는 일정이 예정돼있다.
김준형 : 오바마 정부 8년 동안 일본은 자국의 국익을 증진시킨다는 차원에서 보면 가장 적절한 대응을 한 국가다. 아시아에서 중국에 밀려서 주변부가 될 위기를 맞았지만 미국을 불러들여 이 고비를 넘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일본은 자국의 필요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 관계 또는 미국과 중국 관계를 악화시키고 대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현재 일본은 여러 가지 카드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지난 8년 동안 재무장으로 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제는 다양한 전략을 사용할 타이밍이다. 트럼프의 당선이 일본에 적지 않은 충격이었지만 나름 받아들일 준비는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현재 미국의 힘의 공백 시기를 틈타 러시아와 급격하게 가까워질 수도 있다. 물론 통상적으로 새 정부의 준비 기간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트럼프의 경우 정부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다. 동북아 전문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힘의 공백을 이용해 어떻게 일본 국익을 증진시킬지를 고민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것이다.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는 한국과는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프레시안 : 브렉시트가 유럽 민주주의의 파탄이라면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 민주주의의 몰락이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 즉 서구 민주주의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중국식 정치체제, 이른바 '차이나 모델'이 각광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은 지방 차원에서는 인민들의 선거를 통해 기층 지도자를 뽑지만 중앙정치에서는 능력을 감안해 당 고위층이 미래 지도자를 선발한다.
김준형 : 그럴 수도 있다. 실질적인 미국의 축은 국방부인 펜타곤과 금융자본의 중심인 월스트리트지만 미국이 겉으로 내세운 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였다. 이걸로 전 세계 이데올로기를 지배해왔다. 그리고 소위 '가치외교'라는 이름하에서 이를 밀어붙였는데, 트럼프 당선 전까지만해도 러시아와 중국은 기분은 나쁘지만 이러한 미국의 가치외교에서 열세에 처해 있었다. 여기에는 인권 문제도 포함된다.
그런데 트럼프의 당선으로 이게 무너져버렸다. 트럼프가 미국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를 주장할 수 없게 됐다. 이는 곧 서구 민주주의가 '세계의 보편'이라는 것을 밀어붙이기가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대신할 '대안 모델'에 대한 논의가 나올텐데 그 대안 모델이 중국이 된다? 각광은 받을 수 있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될 것으로 본다. 민주주의는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 핵심은 결국 '약자 보호'인데 이게 우파적인 선동주의로 가면 약잡 보호라는 동력이 급격히 축소될 수밖에 없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홉스식으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프레시안 : 유럽 곳곳에서는 극우파 정치인들이 득세하고 있고 중국은 굴기하고 러시아도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사실상 세계 질서가 무정부 상태로 가고 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될까?
김준형 : 심리적‧구조적‧정치적으로 모두 불안한 상태가 될 것 같다. 소위 말하는 '각자 도생'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공포를 숙명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다.
사실 그동안은 미국이 욕을 먹더라도 국제질서의 '안정자' 역할을 해왔는데 이 역할이 사라져버렸다. 이것을 무엇으로 대체할지를 두고 혼란이 있을 것 같은데, 논리적인 해결이 되지 않고 다른 해결 방안이 떠오르는 것이 문제다. 충돌이나 전쟁과 같은, 사실 뻔히 결과를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절호의 기회인데…'무정부 상태'인 한국
프레시안 : 이제 우리 문제를 좀 이야기해보자. 일단 트럼프가 미사일 방어체제(MD)의 효용성을 의심한다는 발언을 한 것을 두고 남한 내 사드 배치는 물 건너 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김준형 : 한국의 정권이 바뀌었거나, 새로 들어설 정권이 확실하거나 현재 권력의 중심이 있다면 사드 배치 문제를 뒤집을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외 안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디테일'이 하나도 없다. 단지 오바마 정부가 국방을 약하게 만들었고, 외교는 유약하다고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 이야기하자"라고 미국에 제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미국의 국방부가 치고 나오고 있다. 사드 배치가 8~10개월 내에 가능하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미국의 정권 교체와 한국의 무정부 상태 등 양국의 혼란을 틈타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시키는 전략이다. 이렇게 미국의 국방성과 한국의 국방부끼리 움직여서 사드 배치 시기를 당길 수도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드는 오바마 대통령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국방성과 군수 업체인 록히드 마틴이 띄운 것이다. 이들은 트럼프를 설득하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프레시안 : 사드 문제와 함께 박근혜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현재 상황에서 국방과 외교 당국을 제어할 수 없다면 야당이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김준형 : 야당이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외치(外治)는 가능하다는 식의 발언도 나오고 있는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어떻게 외치를 하나?
박근혜 대통령의 APEC 불참은 한국의 외교 마비 상태를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다. APEC이 사실 큰 의미가 있는 행사는 아니다. 조약을 체결하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느슨한 협의체인 데다가 매년 열리는 행사다. 이런 행사도 가지 못할 정도면, 이건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외교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거국내각이 아닌, 대선 전까지 상황을 관리하는 과도 내각을 세우고 대선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 모두에게 기회를 주고 내년 4월 봄에 대선을 준비해야 한다.
단기적이긴 하지만, 한국의 운신 폭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게 우리한테 호기인데 현재 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가 없는 상태다. 만약 클린턴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면 이런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새 정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모든 체제를 갖췄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간이 생겼을 때 빨리 체제를 새롭게 정비해서 대응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예고 하야와 과도 내각 도입, 조기 대선이 시급한 이유다.
프레시안 : 그런데 청와대는 트럼프 당선 이후 오히려 이를 이용하는 것 같아 보인다. 청와대에서 트럼프 당선을 논의하기 위해 NSC를 소집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 유지를 위해 좋은 구실을 잡은 것 아닌가?
김준형 :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들이 '아 지금 대통령이 할 일이 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기가 좋다. 청와대가 상황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정부를 공백 상태로 두면 안 되겠네'라는 생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와대는 자기들이 이정도 역할은 해야 하고 국정의 공백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프레시안 : 한편으로는 트럼프 당선자가 후보 시절 분담금 협상을 다시 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기 때문에, 방위비 분담금 문제와 맞물려 주한미군이 철수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김준형 : 방위비 분담금 인상은 몰라도 주한미군 철수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한국의 분담금을 올리는 쪽으로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을 간접 비용이나 항목별 예산이 아닌 총액으로 주고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미국에 돈만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카투사 유지 비용인 8700억 원이 빠져있다. 현재 대략 9500억 원 정도를 부담하고 있는데 카투사 비용까지 합하면 거의 2조에 가깝다. 사실상 분담금의 3분의 2를 한국이 내고 있는 셈이다.
FTA와 함께 분담금 협상 압박은 당장에 닥친 문제다. 그런데 이 분담금 문제는 우리가 금액을 현재 1조 8000억 원 수준에서 2억 원으로 올릴테니, 대신 나토나 일본처럼 계산하자고 협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80%를 부담하고 있는 것이라고 못을 박아야 한다.
프레시안 : 트럼프의 당선을 본 북한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북한은 예전에 대외 선전용 매체인 <조선의 오늘>을 통해 트럼프 당선자를 '현명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10일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서는 논평을 통해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최근 "북한을 비핵화하겠다는 생각은 실패한 개념"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대북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김준형 : 북한은 트럼프의 당선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다. 일단 트럼프든 클린턴이든 새 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재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들에게 북한 문제는 초기에 이용가치가 별로 없다. 그래서 초기에 뭔가 타결이 가능한 방안을 가져가면 이들은 이를 덥석 물 수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 내 북한 여론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북한을 만나서 협상안을 어느 정도 만든 뒤에 이걸 미국에 가져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현재 남한 상황에서는 이걸 이루기가 힘들 것이다.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고립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데다가 핵 무장까지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핵확산을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북문제의 우선순위는 시간이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최우선 과제는 미국 국내 경제 문제다. 따라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 우선순위를 다시 끌어 올리거나, 아니면 지금 치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사실상 정부가 없는 상태다. 답답한 노릇이다.
프레시안 : 현재 동북아는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결 구도가 확립돼있다. 북한도 이러한 구도 속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무력화시키는 등 나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의 당선으로 이러한 대결 구도에 균열이 일어난다면 북한 입장에서 트럼프 당선이 별로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준형 : 북한의 최고 목적은 생존이다. 북한은 어느 한쪽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북한은 클린턴보다 트럼프가 좋을 수 있지만, 트럼프 당선자가 자기들에게 우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트럼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이러다가 북한은 얼마든지 미국과 직접 거래하고 협상할 수도 있다. 이는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이득만 된다면 뭔들 못하겠나? 결국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통미봉남'의 시대가 올 수도 있다.
프레시안 : 결국 우리한테는 남북관계, 북핵 문제가 중요한데 한국에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선다고 하면 어떤 로드맵을 들고 나가야 할까?
김준형 : 트럼프는 위대한 미국을 다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의 자존심을 세운다는 건데, 그럼에도 고립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트럼프 당선인이 고립주의를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대신 분담금을 올려주겠다고 협상할 수 있다.
사드 문제만 해도 왜 너네 돈을 들여와서 무기를 배치하느냐, 배치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단 우리가 한반도의 안정화를 선도적으로 만든 다음에 운신의 폭이 높아진 것을 활용해서 움직여야 한다. 지금 이 상태로는 미국에 들고 가서 협상할 무기가 아무것도 없다. 지난 4년 동안 모든 카드를 버리는 외교를 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트럼프 당선으로 미국 패권이 몰락하고, 세계는 각자도생의 시대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면 우리도 '자력갱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한국의 정치인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김준형 : 한국은 기본적으로 미국 편승에 너무 오랫동안 중독돼서 미국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결국 서북쪽, 유라시아로 갈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헛된 공약이 아니다.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의 생존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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