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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연쇄 살인마, 광해군=혼군, 박근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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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도세자=연쇄 살인마, 광해군=혼군, 박근혜는?

[강양구의 親book] <호모 히스토리쿠스>

한국은 역사 전쟁 중입니다. 역사 국정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이제 본격적으로 불 붙었습니다. 지난 4일 박근혜 정부가 철통 보안에 부쳐온 역사 국정 교과서 심의위원 가운데 한 명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기동 원장이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자신이 19년간 심의위원이었다고 밝히고 "(국정 교과서) 목차 정도만 봤다"고 말했습니다. 국정 교과서 심의가 졸속으로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 불을 붙였습니다.

역사 국정 교과서가 군부 독재를 미화하리라는 우려가 큰 만큼, 원고를 공개하라는 목소리도 큽니다. 하지만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이마저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독재 정부에 뿌리를 둔 여당이 역사를 사유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눈을 넓히면 새로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역사학계 한편에서는 오래 전부터 국사 위주의 역사 교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역사'를 방치해 역사를 시민의 삶에서 유리해 버린다는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가 권력의 통치하는 수단으로써 착취의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쓴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사=국사'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이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이 제작하고 <시사통>을 통해 매주 월요일 방송되는 팟캐스트 '강양구의 친북'은 지난 3일 서울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와 신간 <호모 히스토리쿠스>(오항녕 지음, 개마고원 펴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고, 과거에 관한 편견을 깨뜨리는 오항녕 교수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역사는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강양구 : 강양구의 친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역사 전쟁'이라 부를법한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대표적입니다. 내년(2017년) 대선을 앞두고 건국절을 둘러싼 논란도 본격화될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역사에 관한 책을 한 권 같이 읽어보고자 합니다.

최근에 나온 <호모 히스토리쿠스>입니다. 뜻을 풀어보면 '역사 그 자체인 인간' 정도일 텐데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역사학자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께서 쓰신 책입니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로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분이죠.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오항녕 :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강양구 : <호모 히스토리쿠스>의 부제가 '지금 여기를 위한 역사 공부'입니다. 일종의 역사학개론 같은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보자마자 대학생 때 읽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떠올랐어요. 방송을 준비하면서 찾아보니 카가 1892년생인데, <역사란 무엇인가>를 만 69세 되던 1961년에 썼더군요. 그 정도 나이가 되어야 이런 책을 쓰는 거죠. 오항녕 교수께서 역사학 개론을 쓰기엔 아직 젊은 나이 아닌가요? (웃음)

오항녕 :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원래 역사학 개론은 2030년, 그러니까 70살 정도에 낼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 개론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이 편하게 접근할 개론 서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래서 제대로 된 역사학 개론은 나중에 쓰더라도, 이번에 대학생, 일반인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시도해 봤어요.

책을 쓰면서 제가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새삼 깨달았죠. 우리가 뜨거운 피를 갖고 사는 시간은 '지금'입니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죠. 결국, 모든 역사란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지금 존재하지,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제를 '지금 여기를 위한 역사 공부'라고 쓴 이유입니다.

강양구 : 이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이 단순히 역사학도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장삼이사를 위한 역사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항녕 : 이 책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입니다. 역사 공부는 인생 공부와 같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역사 공부의 소외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나의 인생 말고 역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보통 시민뿐만이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보통 학생 때 배우는 국사에 역사를 국한해 생각하고, '역사'라고 하면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만 떠올리죠. 이런 점이 역사에 관한 오해, 또 소외를 낳죠.

사도세자는 연쇄 살인마

강양구 : 그 대목은 앞으로도 말할 기회가 있을 듯합니다. (웃음) 이 책의 독자는 책의 앞부분에 오항녕 교수께서 정리한 역사의 두 명제를 기억해두면 좋을 듯합니다. 두 명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역사는 변화하는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 모든 사건에는 구조, 의지, 우연이 함께 들어간다.

이 두 명제가 이 책을 꿰뚫는 핵심인데요. 특히 두 번째 명제가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매우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였거든요. 보통 구조만 강조하거나, 의지만 강조하거나, 심지어 우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오항녕 교수께서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 세 가지를 놓고서 얘기를 풀어가고 싶어요.

오항녕 : 좋습니다. (웃음)

강양구 : 책에서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언급하셨어요. 일부 재야 사학자는 노론 세력의 압박 때문에 영조가 어쩔 수 없이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주장했죠. 이런 주장이 영화, 드라마, 소설, 웹툰 등으로 대중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하지만 오항녕 교수께서는 이런 견해에 비판적이시죠?

오항녕 : 이제 논쟁은 조금 꺼리지만, 비판적으로 생각은 합니다. (웃음)

사도세자가 다른 정치를 꿈꾸다, 수구 세력인 노론의 압력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사료(史料)가 없습니다. 사료가 없다면 얘기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료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건, 최소한 사도세자를 둘러싼 정황이라도 파악하고 그런 사실을 추론할 만한 자료도 아예 없다는 겁니다.

강양구 : 그렇다면, 실제로 사도세자의 행적은 어땠습니까?

오항녕 : 세자 가운데 똑똑하지 않은 세자가 없었죠. (웃음) 다 어렸을 때는 총명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씩 짚어 보죠. 일단 사도세자는 세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왕비의 아들도 아니었죠. 영조의 후궁 영빈 이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효장세자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애초 세자가 될 일도 없었죠. 종친이니 편히 녹읍 받고 한량처럼 지내다 죽어도 아무 문제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왕비 김 씨한테서도 아들이 나오지 않자 사도세자 차례가 와 버렸어요.

보통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는 부모가 잘 한다고 칭찬하면 잘 하잖아요? 사도세자도 그랬나 봐요. 그런데, 커가면서 개성이 나옵니다. 특히 사도세자는 영조의 엄격함과 기대감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영조는 재위 기간(1724~1776년)이 길고, 아주 명석한 사람이었어요. 영조가 바라는 세자 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조선은 알다시피 문치(文治) 국가였기 때문에, 쟁쟁한 학자들이 조정에 들어왔습니다. 뭐든 논리가 있어야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세자는 1000만 명 이상의 백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이처럼 학문으로 무장한 관료를 이끌 자질을 보여야 합니다. 영조가 세자에게 이런 능력을 바랐겠죠. 그런데 사도세자는 이 기대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아요.

제가 많이 이용한 자료는 정병설 서울대학교 교수가 쓴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펴냄)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제가 동의하지 않는 대목도 있습니다만, 워낙 자료를 많이 확보하셔서 큰 도움이 됐어요.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 사도세자의 부담감은 처음에 옷을 잘 못 입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다 차츰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죠.

강양구 : 얼마나 죽였나요?

오항녕 : 자료상으로만 100명 이상을 죽였어요.

강양구 : 그들이 전부 가까운 사람들이었죠? 가까운 사람을 찔러 죽이고, 패서 죽이고.

오항녕 : 사도세자를 직접 시중 들던 나인이나 내관이 주로 피해를 입었죠. 심지어 사랑하던 빙애(경빈 박 씨)까지 칼로 찔러 죽입니다. 이때 돌을 갓 지난 아들 은전군도 칼로 찔러 마당 연못에 버립니다. 다행히 죽진 않았어요.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가 은전군을 구해 별명을 하엽생(荷葉生)이라고 지었어요. 우리말로 풀이하면 대략 '연잎이' 정도 되겠죠.

영조도 그 얘길 듣고 얼마나 가련했던지, 은전군의 자(字)를 가련할 '련(연)'을 써서 연재(憐哉)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이어지자, 사도세자를 처분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집니다. 최종적으로 요구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사도세자를 낳은 어머니 영빈 이 씨예요. 어머니가 볼 때도 아들이 '더는 안 되겠다' 싶은 거였죠. 영빈 이 씨도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죠.

왕조라는 구조, 사도세자를 굶겨 죽여야 한 이유

강양구 : 사도세자를 죽이지 않고 폐위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오항녕 : 저도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폐위한다는 건 정치적 문제를 낳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영조 뒤를 이은 이가 세손인 정조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죠.

세종이 양주에서 지냈던 형 양녕대군의 도성 출입을 형식적으로는 금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가끔 불러서 잔치도 열어주곤 했죠. 사도세자와 정조의 관계는 이와 다릅니다. 사도세자는 정조의 아버지입니다. 조선에서 효는 모든 것에 앞섭니다. 자신이 왕이 되었는데 아버지를 귀양지에 둘 순 없죠. 효도를 해야 하는데, 도성에 다시 들인다면 선왕(영조)의 유지와 어긋납니다.

더구나 사도세자가 무슨 일을 하든, 정조가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정조가 정치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마는 거죠.

강양구 : 결국 폐위는 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영조가 내리는군요?

오항녕 : 그랬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건은 사도세자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영조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 사건은 구조, 즉 '세습 왕정'의 비극입니다.

강양구 : 책을 읽으면서 '빵' 터진 대목이 있었어요. 시험 기간에 빈둥거리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면서요?

"네가 세자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웃음)

오항녕 : 아들 녀석은 "아버지가 영조가 아닌 게 다행이다"라고 맞장구를 치더군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의 집안 자식이 나중에 책임질 일은 크지 않습니다. 자기 앞가림하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살면 됩니다. 시험 기간에 빈둥거려도 됩니다. 하지만, 세자의 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스트레스를 사람을 해치는 식으로 푼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죠.

아마 영조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세자를 보며 '연산군과 광해군을 합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이 문제를 풀 사람이 영조뿐인 거죠.

강양구 : 결국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입니다. 그런데 죽인다손 치더라도 사약을 내리면 되지, 왜 그런 독특한 방법을 택했을까요?

오항녕 : 강 기자에게 세자(정조)의 아버지에게 사약을 가지고 가라고 지시하면 따르겠어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강양구 : 저라면 도망가겠죠.

오항녕 : 처음에 영조는 자결을 요구합니다. 조선에서 자결이란 목을 매는 건데, 세자의 수발을 드는 궁속(宮屬)들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죠. 그것 역시 불충이니까요. 그러니 자결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영조가 선택한 것이 결국 뒤주에 가둬서 죽이는 거였죠. 사도세자의 비극이고, 영조의 비극입니다.

강양구 : 근본적으로는 세습 왕정 구조의 비극이고요.

오항녕 : 세습 왕정이 아니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면 투표로 바꾸면 되죠.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 길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보고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다'고 논평하는데, 적절한 예가 아닙니다. 조선의 정치 체제를 잘못 이해한 말이죠. 왕의 권력과 세자의 권력은 완전히 달라요. 조선사를 보면, 세자가 세자 노릇을 못 할 때 왕이 개입하긴 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경우 왕의 권력과 세자 권력이 충돌할 일은 없습니다.

강조하건대, 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은 권력 투쟁이 아닙니다. 구조가 낳은 비극이죠.

▲ 광해군이 균형 외교를 실시했다는 주장은 잘못됐다. 광해군은 민생 파탄의 주범이었을 뿐이었다.

광해군의 균형 외교는 허구

강양구 : 영화 <광해>가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인지, 광해군이 혼군이 아니라 민생을 걱정하고, 청나라와의 균형 외교를 도모한 왕이었다는 시각이 제법 있습니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역사학계 내에서도 제법 발언권을 얻은 시각이죠. 그런데 오항녕 교수께서는 이 영화 개봉 즈음에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라는 책으로 이런 견해를 정면 반박하셨어요.

광해군은 나라 말아먹은 왕이라고 평가하셨죠?

오항녕 : 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양구 : 영화 <광해> 도입부를 보면, <광해군일기>의 광해군 8년, 보름간의 기록이 사라졌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정말인가요?

오항녕 : 영화가 나오고 나서 기자 몇이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광해군일기>를 찾아봤죠. 그런 일 없습니다. 완전한 허구예요.

강양구 : 영화가 '뻥'을 심하게 쳤군요. (웃음) 그런데 <광해군일기>가 제대로 편찬되지 못한 유일한 실록이라면서요? 광해군이 하도 나라 살림을 거덜 내서.

오항녕 : 맞습니다. 사극을 보면, 사관이 왕 앞에 앉아 사초(史草)를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일종의 실록 초고입니다. 이걸 모아 편집해 정식 실록을 편찬합니다.

강양구 :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정조실록>, <영조실록>은 사초를 그냥 묶은 게 아니군요.

오항녕 : 그렇죠. 사초는 그때그때 질서 없이 써놓은 내용입니다. 당장 언제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종이 크기도 다 다르죠. 어차피 다시 정리를 해야 합니다. 초초, 중초, 정초를 만들어서 최종 실록을 편찬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조선왕조실록>은 보통 다음 대에서 앞선 왕의 사초를 재정리해서 편찬한 것이죠.

인조 때 광해군 재임 기간의 사초를 모아서 실록(<광해군일기>)을 편찬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일기>는 조선 왕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만 남았습니다. 저처럼 기록을 연구하는 사학자 입장에서는 좋은 자료죠. 초초본과 정초본(실록) 사이에 어떤 작업이 진행되었는지를 비교 연구할 수 있으니까요. 광해군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습니다만. (웃음)

강양구 : 아무튼 광해군 대의 사료를 보면, 광해군이 실은 민생을 파탄 냈고, 실제로 균형 외교라고 할 것도 없었다는 거죠?

오항녕 : 일단 광해군의 외교부터 평가하자면, 간단히 말해 전략이 없었습니다.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할 뿐이었죠. 그러니까 균형 외교라고 평가할 만한 것도 없었어요.

강양구 : 광해군의 업적으로 대동법(大同法, 공물을 쌀로 통일해 바치도록 한 납세 제도)을 꼽기도 하는데요. 교수께서는 선조의 업적으로 정리하셨어요.

오항녕 : 광해군 즉위년 5월에 대동법 실시를 위해 선혜청(宣惠廳)을 만듭니다. 2월에 선조가 죽었으니, 이때는 상중입니다. 그 세 달간은 국정을 하지 않습니다. 이때 선혜청이 설치됐다는 건, 선조 때 이미 대동법 실시가 결정됐다는 뜻입니다. 이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죠.

더구나 중요한 건, 선혜청 설치 2년간 광해군은 계속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예전 방식인 방납(防納, 상인이나 중간 관리가 백성의 공물을 대행 남부하고 그 대가로 이자를 붙여 받은 행위)을 주장한 기자헌 같은 인간을 좌의정으로 앉혔어요. 대동법 안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대동법 도입을 주장한 명 정승 이원익이 병을 핑계로 사직해버리죠. 최근 연구 중에도 광해군 후기 방납이 얼마나 기승이었는가를 데이터화한 자료가 있습니다.

강양구 : 인조가 청나라의 침공 때, 머리를 조아리는 상황에 처했죠. 그렇다면, 오항녕 교수께서는 광해군이 그토록 국정을 문란하게 하지 않았다면 청나라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 보는 거군요.

오항녕 : 당연하죠. 광해군이 나라를 15년에 걸쳐 파탄에 빠뜨리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었겠죠. 영화야 해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지만, 그 시대를 연구한 역사학자 가운데도 근대주의라는 귀신에 씐 사람을 보면 화가 나요. 식민사관의 영향이 가시지 않은 면이 아직 있습니다.

강양구 : 그러고 보니, 광해군을 처음 높이 평가한 학자도 일본인이죠. 이나바 이와키치라는….

오항녕 : 네. 최근에 한 고등학교 교사께서 말씀해주셨는데, 7차 교육 과정에 광해군이 대동법과 더불어 양전(量田, 토지의 실제 경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 측량)도 실시했다고 나온대요. 양전은 지금 얘기로 하면 소득 조사입니다. 이걸 해야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 있죠.

광해군은 양전을 실시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교과서에 버젓이 실립니다. 전란(임진왜란)이 끝나고 그토록 피폐한 상황에서 양전이 가장 중요한데, 광해군은 그걸 안 했습니다. 그렇게 백성의 삶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국가가 전략적인 외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 꼴이 엉망인데 균형 외교를 했다고요?

광해군 때가 요즘 상황과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북한에 대고, 바깥에 대고 큰소리 칠 여유가 없습니다. 안이 썩어 들어가고 있잖아요? 군대 가야 할 젊은이가 당장 자기 삶이 불안합니다. 당장 내 삶이 불안한데, 누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어요?

지킬 만한 나라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사람들이 지킵니다. 최선의 외교, 국방 정책은 젊은이를 비롯한 그 나라 사람에게 '이 나라가 지킬 만한 나라'라는 확신을 주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광해군 때도 이게 전혀 안 되었어요. 이렇게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 어떻게 균형 외교를 했다는 것인지, 저는 이해를 못하겠어요.

의지의 문제와 구조의 문제는 다르다

강양구 : 박근혜 대통령께서 만드신 유행어가 있습니다. '의지가 있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도 그 가운데 하나죠.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요즘 부쩍 '의지'를 강조하는 분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 나와 비싼 돈 받고 강의하는 멘토도 그렇죠. 역사의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의지라고 앞서 얘기하셨죠. 요즘의 의지 열풍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오항녕 : 대체로 역사의 범위는 인간이 개입한 사건으로 한정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시키는 대로만 살지 않죠. 의지를 지닙니다. 자유의지라고도 하죠. 그래서 역사에는 의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볼 때, 구조뿐만 아니라 의지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제가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젊은이의 상황을 그래도 조금 더 밀접하게 접해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졸업하면 거의 다들 취직했어요. 그런데 취직이 어려운 요즘 학생의 능력이 저희 때보다 훨씬 나아요. 학생들이 팀 과제하는 것만 봐도 저희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아주 기특하죠.

이런 학생을 보고 있노라면 무책임한 기성세대의 말에 화가 납니다. 제가 가장 화났던 말이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이에요. 제가 비슷한 책 몇 권을 봤습니다. 다들 전형적으로 '노력하면 현재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가끔은 노력하면 우주가 도와줍니다. 하지만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에요.

역사학자로서 이런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해봤습니다. 구조의 문제인데 의지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의지의 문제인데 구조를 탓해선 안 됩니다. 앞서 '모든 사건에는 구조, 의지, 우연이 함께 들어간다'고 했죠? 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게 우리를 속이는 프로파간다인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 20대의 취업이 어려운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의 문제죠. 의지를 강조하는 기성세대의 말은, 노력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는 겁니다.

학생들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나요? 대학 4년도 부족해서 휴학하고, 유학 다녀오고, 온갖 공부를 합니다. 그 학생들이 무슨 요트를 사고, 별장 세우고자 저러는 게 아니거든요. 그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삶을 살고자 저러는 거거든요. 이걸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학생을 위해 한국 사회가 정책적으로 해주는 게 뭐가 있습니까?

만일 의지에 문제가 있다면 학생이 아니라 지금 구조를 바꿀 힘을 가진 사람, 즉 정책을 입안하는 세력의 의지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국민의 의지로 바로 그 정책을 입안하는 세력을 갈아치울 수도 있겠군요. 만약 그렇게 넓혀서 생각한다면 의지의 문제로 바라볼 수도 있겠습니다. (웃음)

▲ 박근혜 대통령은 "의지가 있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을 역사에 남겼다.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건 신자유주의 체제 후 지배층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청와대

진보사관의 문제

강양구 :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우연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대목도 흥미로웠어요. 책에서 우연의 정의를 기막히게 내리셨더군요. "서로 목적이 다른 사건의 만남!"

오항녕 : 우리의 삶에서, 또 역사에서 우연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뤄지길 바랐지만 이뤄지지 못한 남녀의 사랑.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

강양구 : 비극이든 희극이든, 서로 목적이 다른 사건의 만남이란 거군요.

오항녕 : 우리 또래에서 역사학 개론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E. H. 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저도 존경하는 학자입니다. 그런데 우연 문제를 설명할 때 카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자꾸 우연을 필연에 대입하려 합니다. 하지만 우연도 자연법칙의 필연성 아래에서만 발생합니다. 역사의 우연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우연은 필연의 반대가 아니라, 서로 목적이 다른 사건의 만남이라고 파악하는 게 맞아요. 수업 중에 우연의 정의를 칠판에 적어놓고 학생에게 "이건 내가 역사학자로서 내린 가장 중요한 명제"라고 자랑한 적도 있어요. (웃음)

강양구 : 사건을 이루는 세 가지 명제, 즉 구조, 의지, 우연 중에 가장 중요한 건 뭘까요?

오항녕 : 전체적으로는 구조-의지-우연 순인 듯해요.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우리의 삶에서 무의미합니다. 역사의 개별 사건에서 그 순서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니까요. 구조, 의지, 우연의 비중은 개별 사건마다 다릅니다. 개별 사건마다 세 가지 요인 가운데 무엇이 중요했는지를 따지는 게 그래서 중요합니다.

보수 세력이 모든 문제 원인을 의지로 돌려 개인 탓만 하려 하는 게 문제인 만큼, 모든 문제를 구조로만 돌리는 사관에도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접근을 항상 조심해야 해요. 예를 들어, 역사 전체를 진보로 보느냐 아니냐가 의미가 있나요? 지금 내가 배가 고프다면, 밥을 먹으면 행복해집니다. 백수로 있다가 취직하면 삶이 나아져요. 그러다 경제 공황이 온다면 다시 불행해지겠죠. 그렇다면, '인류가 지난 5000년간 진보했다'는 말은 역사의 현장을 살아가는 개개인에게는 무의미한 말이 되죠.

그런 점에서 저는 계몽주의적 역사관인 진보사관이 심각한 역사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양구 : 진보사관에 관해 불편한 심기를 책에서도 비중 있게 서술하셨어요. 우리나라 사학을 '식민사관'이라며 비판하는 분이 적잖습니다. 그런데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대두한 게 '민족사관'입니다. 오항녕 교수께서는 둘의 한계를 모두 지적하셨어요.

오항녕 : 저는 현재 역사 교육에서 이른바 '국사'의 중요성이 지나치다고 봅니다. 국사가 강조된 것은 19세기 이후 근대의 아주 특수한 현상입니다. 제가 조사해봤는데, 전국의 한국사학과 커리큘럼이 거의 같습니다.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국사 중심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백화점이죠.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많은 층위의 역사를 살고 있습니까? 가족사부터 시작해서 지역사, 경제사, 문화사, 과학사 등 다방면에 쌓인 역사 위에 살고 있죠. 당장 우리가 몸담은 단체만 하더라도 학교부터 시작해 종교, 직장, 도시 등 여러 층위가 있고, 각각에 쌓인 역사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는 '국민으로서의 역사'만 떼 내어 배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국민'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공무원 시험이죠. 여기에 저는 부당함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삶에 여러 층위로 존재하는 풍부한 역사를 '한국사' 하나로 모두 환원해버렸습니다. 이건 폭력입니다.

여기에 진보사관이라는 계몽주의 사관이 개입합니다. 논리는 간단합니다. 인류 탄생 이래 자유, 평등, 이성, 거기다 더해서 생산성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쭉 나아갔다는 겁니다. 일단 생산성은 늘어났다 칩시다. 그런데 정말 자유가 커졌습니까? 이성이 발전했습니까? 평등해졌습니까?

계몽주의는 중세를 암흑기로 놓습니다. 우리도 암암리에 조선 시대를 암흑기로 상정하죠.

'조선=암흑기'는 허구다

강양구 : 책 보고 깜짝 놀란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세를 암흑기로 상정하며 드는 대표적 사례가 초야권이죠. 농노 계급의 신부는 첫날밤을 영주와 보내야 한다는…. 그런데 이게 완전히 거짓말이라면서요?

오항녕 : 역사학 연구자는 완전히 허구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세를 암흑기로 만들고자 가져다 붙인 허구죠.

강양구 : 오항녕 교수께서는 전작 <조선의 힘>에서 조선이 우리 생각처럼 '빨리 망했으면 좋았을 왕조'가 아니라고 주장했어요. 500년이나 이어진, 나름의 장점을 가진 문명이었다고.

오항녕 : 조선의 장점만 부각해서 이 책을 쓴 건 아닙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겁니다만, 현재의 시각으로, 좁은 의미의 정치적 목적으로 한 시기를 긍정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편향을 낳으니까요. 조선도 마찬가지죠. 우선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취지로 쓴 책이 <조선의 힘>입니다.

강양구 : 제가 이 책을 주변 여럿에게 권했는데, '그처럼 장점이 많은 나라가 왜 그런 식으로 망했느냐'는 반응이 나오더군요. 이런 의견은 대개 '조선 이후에 더 좋은 역사 시대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조선의 문제로 인해 식민지 시대가 와버렸다'는 전제가 깔린 듯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어쨌든 조선은 열등한, 또 '망했어야 할' 나라죠.

오항녕 :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고, 가질 수 있는 의견입니다. 조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에 식민지의 상처가 너무 컸죠. 그 후에 바로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런 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현실의 눈으로 과거를 보기는 쉽습니다. 현실에서 독재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 눈으로 과거를 보게 되죠. 조선의 당쟁이 나라를 망쳤다는 주장이 계속 살아남는 이유는, 현대 정치의 정당 대결이 정책 싸움이 아니라 자리싸움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의해 우리가 규정되기 때문이죠. 이게 바로 E. H. 카가 말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란 뜻 아닌가 싶습니다.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현재 우리가 디딘 현실도 바로 봐야 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강양구 : 카의 말이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라'는 뜻뿐만 아니라, '현재에 관한 성찰도 필요하다'는 의미도 포함한다는 거군요?

오항녕 : 그렇습니다. 저는 카가 그 정도를 내다봤으리라고 봅니다. 현재를 성찰하지 못한다면, 과거가 틀어집니다.

역사는 권력이 쥐고 흔들 수 없다

강양구 :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합니다. 이런 통념을 앞장서 실천하는 분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이들이죠. 그런데 교수께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틀렸다고 하셨어요.

오항녕 : 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 <호모 히스토리쿠스>(오항녕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역사는 사실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남한 단독 정부가 민족의 안녕을 위해 긍정적이었을까, 아니면 민족적 과제를 남겼을까? 이런 질문을 놓고서 역사학계는 단독 정부의 한계를 기술합니다. 그런데 지금 국정 교과서는 민족사적 과제를 지우고, 통일 문제나 평화 문제가 우리의 고민거리가 아닌 것처럼 논리를 끌어가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승자니까 역사 교과서만 바꾸면 모든 이가 역사를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착각하죠.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옆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존재합니까? 언론만 해도 그래요.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프레시안>과 같은 언론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국정 교과서 문제도 똑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현대사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내놓고 있는데, 그걸 저들이 무슨 수로 가리겠습니까? 승자의 역사를 만들려는 시도 자체가 좁은 시야에서 나온 불가능한 도전일 뿐입니다. 국정 교과서를 학교에서 가르치게 되면 당장 저부터, 또 <프레시안>부터 나서서 다른 역사를 얘기할 텐데요.

에릭 홉스봄이 자신의 <역사론>에서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말을 인용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승자의 편에 있는 역사가는 단기적인 성공을 장기적으로 소급되는 목적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기가 쉽다. 패배자는 그렇지 않다. 패배자의 주요한 경험은 모든 것들이 희망했던 것이나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 패배자들은 왜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일이 발생했는지 설명해야할 필요를 더 크게 느낀다. 이것은 중기적 원인과 장기적 원인에 대한 연구를 자극할 것이다. 이 연구는 예기치 않은 일의 발생을 설명하고 (…) 더 지속적인 통찰력을 낳고 (…) 결국 더 큰 설명력을 낳는다. 단기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 이해의 증대는 패배자로부터 나왔다." (<역사론>(강성호 옮김, 민음사 펴냄), 384~385쪽)

강양구 : 우리도 보통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뭔가 배우는 경우가 많잖아요?

오항녕 :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죠. 우리 인생에서 승패로 결정되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의 최근 삶을 돌아봐도 학생들과 수업하고, 친구들과 술 마시고, 이렇게 팟캐스트 출연했습니다. 승패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어요. 인생을 승패의 관점으로 보는 건 또 다른 분쟁을 낳는, 역사학적으로 무의미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합니다.

강양구 : 오늘 <호모 히스토리쿠스>의 저자인 오항녕 교수를 모시고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시고 지금 여기 나의 역사, 우리 공동체의 역사를 직접 기록하고, 정리하고, 이야기하는 작업을 시작하셨으면 합니다. 작은 역사가 풍부해질수록 역사를 제 입맛대로 요리하고 지배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해지겠죠. 오항녕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항녕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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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기자
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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