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④
비록 자강(自强)만 도모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풍족하게 한 이후에야 인심을 결속시킬 수 있고, 인심을 결속시킨 후에야 외적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굶주리고 노약자가 골짜기에서 죽어 나뒹굴면서 나라를 강고하게 하고 외침(外侵)을 막아낼 수 있던 적은 없었습니다. (<노봉집(老峯集)>, '응지소(應旨疏)')
문곡 김수항(1629~1689)보다 한 살 위인 노봉 민정중(1628~1692)이 효종 8년(1657)경 올린 응지 상소, 그러니까 효종이 의견을 구했을 때 올린 상소였다. 문곡과 노봉은 돈독한 친구였다. 요즘 말로 절친(切親)이라고 해야겠다. 둘 다 장원급제를 했던 인재였다. 노봉은 숙종 왕비였던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작은형이니까, 인현왕후의 중부(仲父)이다.
효종 연간은 병자호란 뒤의 상처를 수습하는 일이 주된 관심사였다. 계속되는 청나라의 견제, 김자점(金自點) 같은 친청파의 발호를 뚫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나 효종의 군사정책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고, 정치세력을 규합하는 효종의 역량은 조금 모자랐다. 거기에 효종 5년, 6년에는 기근까지 겹쳤다. 실정을 도외시한 채 추진된 무리한 노비 추쇄는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민정중의 상소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나왔다.
거꾸로 간 시대
그러고 보니 효종대와 광해군대는 비슷한 데가 있다. 둘 다 매우 큰 충격을 안겨준 외침 이후 그 외침을 수습하고 일상의 안정을 회복해야 하는 숙제를 짊어진 정권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효종은 군비에 치중하다보니 민생을 챙기지 못했던 반면, 광해군은 군비도 챙기지 않았고 민생도 돌보지 않았다는 점이리라. 아니 아예 파탄을 내버렸다.
한때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을 위해 선혜청을 설치했다면서 마치 민생을 챙겼던 군주인 양 묘사했는데, 이제는 그런 경향은 수그러들었다. 사료만 찬찬히 볼 수 있다면 광해군이 대동법이란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지친 삶에 과중한 세금을 때린 정신 나간 군주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논리가 고개를 든다. 내정(內政)에서는 대동법의 실패, 과중한 궁궐공사로 점수를 잃었지만, 대외 정책은 명분론에 빠지지 않는 중립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걸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하나보다. 그러나 나는 역사 공부는 '시각의 균형'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료(史料)가 보여주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립외교라는 전도된 시각
대동법과 궁궐공사는 공물(貢物)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동법이 공물을 합리적으로 줄이기 위한 정책이었다면 궁궐공사는 공물의 과대 소비였으므로, 둘은 상극의 정책이었다. 또 대동법과 계축옥사는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계축옥사를 기점으로 호조판서가 이원익과 함께 대동법을 추진하던 황신(黃愼)에서 궁궐공사 전담맨이었던 이충(李沖)으로 바뀐다. 황신은 귀양을 갔다. 그걸로 대동법도 물 건너갔다. 그럼 궁궐공사와 심하 파병은?
기실 위에서 살펴본 민정중의 말에 답이 다 나와 있다.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기는커녕 도탄에 빠져 허덕이게 만들어 인심이 떠난 지 오래였고, 군수물자는 군비가 아닌 궁궐공사에 투여되었다. 수군(水軍)은 목재, 석재를 나르는 데 동원되었고, 남한산성이나 강화에 비축해두었던 곡식 역시 공사비용에 충당되었다.
명나라 요청으로 심하(深河)에 파병할 때 역시 군사들은 변변한 훈련이나 추위를 막을 옷을 받지도 입지도 못하고 떠났다. 상황을 봐서 후금군에게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었다. 이 '중립외교'로 조선군은 파병된 1만 3000명(2만 명이란 기록도 있음) 중 9000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 노예보다 못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학계 일각에서 흔히 주장하듯이 광해군이 파병을 주저한 것은 명나라에서 후금으로의 변화라는 국제정세를 통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3월 제주 문화방송(MBC) 초청으로 광해군 중립외교론자인 한명기 교수와 내가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한 교수도 이제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했다는 주장은 거둔 듯하다.
그렇지만 한 교수는 예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이 평가했다. 내정은 그렇지만 외교는 잘했다는 논지였다. 내 말은 간단하다. 그렇게 외교와 국방에 관심이 있는 군주였다면, 그 외교와 국방의 근원적, 실제적인 힘인 민생과 재정을 안정시켜야 했는데, 광해군은 거꾸로 갔다. 민생과 재정을 파탄내서 민심을 잃은 통치자가 외교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아니, 하나 있다. 상황이 되는대로 그때그때 눈치껏 처신하는 것, 바로 기회주의이다.
자신의 역량을 주요 변수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스스로 동아시아 주요 변수 또는 상수(常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광해군은 발로 차버린 셈이다. 한 교수의 광해군 외교 해석이 갖는 오류가 이 지점에 있다. 결과를 배경(원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후금의 강성은 조선의 피폐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원인이다.
광해군의 내면화
내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유훈을 예로 들어 주변 10여개 나라 중에 경계 대상 1호가 조선이었다는 사료를 소개하자, 한 교수는 그건 고려 말~조선 초의 상황이라며 내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명나라 초기와 말기를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어둡지는 않다. 내 말은 중국에서 조선을 볼 때 가늠할 수 있는 국제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로 놓고 보아도 고려 말에는 홍건적에게 쫓겨 공민왕이 공주까지 도망쳐야 했고, 해안은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이나 그때나 나라의 형세는 큰 차이가 없다. 반복하거니와 핵심적인 문제는 조선이 갖는 주요 변수의 지위를 아예 고려하지 않고 대외 관계사를 해석하는 왜소한 시각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패배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광해군도 심하 전투를 두고 '패배가 예정된 전쟁'이라고 예감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전략 아닌 전략, 눈치보다 적절히 행동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고. 결국 중립외교 운운하는 해석은 연구자가 광해군을 내면화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더 나아가면 동일시한다. 연구자 자신이 광해군이 되어 역사를 설명하고 해석한다. 이거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광해군이 위험한 거울이라고 했던 것이다.
지방자치체 행사의 우려
이 지면에서 한 교수는 반론할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와의 토론을 소개하는 것이 다소 불공평할 수도 있다. 다만 논의의 흐름상 소개한 것이니 그리 헤아려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이 기회에 지방자치단체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에 대해 한 마디 해두어야겠다.
어디는 홍길동 가지고 다투고, 어디는 임꺽정 가지고 다투는 모양이다. 지방자치체가 자기 고장의 인물을 현창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부심도 주고 일체감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칫 위험하기도 하다.
제주 MBC에서 토론에 초청한 이유는 폐위당한 광해군의 유배지가 제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광해군을 띄울 때 그의 '혼란했던 정치'를 자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초 제주특별자치구와 제주 MBC가 생각하는 '광해군'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제주에서 우리의 토론에 이어 마련된 이벤트는 창극이었는데, 제목부터 '개혁군주 광해군'이었던 데서도 세팅의 성격은 잘 드러난다.
함께 참석한 패널 한 분에게 웃으며 내가 많이 불리하다고 했더니, 장단점이나 공과를 두루 살펴보자는 뜻이라고 짐짓 위로를 던졌다. 알고도 내가 참석한 이유는 올레 길을 한 번 더 걷고 싶었고, 어처구니없는 광해군 부활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학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종종 자기 몫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8월에는 광해군 묘가 있고, 광해군을 제사 지낸다는 봉인사(奉印寺)에서 토론회가 있다. 광해군~인조시대의 국내정치와 대외관계에 대한 발표이다. 불자들이 초청하는 모임이니 어떨지 모르겠다. 너도나도 들추어내고 있는 '내 맘대로 역사'의 하나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압록강에서 추도하다
우리가 광해군 때부터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세세히 다룰 여유도, 이유도 없다.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연구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심하 전투에서 정묘호란까지 시기에 대비되는 흥미로운 두 인물이 있어서 소개해두려고 한다. 심하 전투가 벌어진 광해군 11년(1619) 이듬해인 1620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경신조천록(庚申朝天錄)'이란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시 세 수가 있다.
지난해 바로 오늘 심하의 전쟁에서 去年今日戰深河
2만의 관군이 백사장을 피로 적셨네 二萬官軍血濺沙
한식날 백골 거둬주는 이 아무도 없고 寒食無人收白骨
집집마다 지전 태워 강물에 제사한다 家家燒紙賽江波
압록강 가에 새로이 선 사당 한 채 一片新祠鴨水隈
사라져간 외로운 넋 언제나 돌아올까 孤魂迢遆幾時廻
오늘 소낙비가 강기슭을 뒤집을 때 今朝急雨飜江岸
백마 탄 채 칼 잡고 파도 타고 오리라 白馬潮頭按劍來
한 곡조 금가 소리 달빛 아래 슬퍼라 一曲金笳月下悲
누각 수자리 서는 졸개 모두 고아로다 樓中戍卒盡孤兒
관산이라 이 밤에 〈양류곡〉이 들리니 關山此夜聞楊柳
몇몇 행인들이 눈물로 옷깃 적시누나 多少行人淚滿衣
월사는 이 시에 "4월 4일, 압록강을 건너려는 차에 북쪽으로부터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빗줄기가 마구 퍼부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이날이 바로 지난해 두 원수(元帥)가 적진에 빠지고 김응하(金應河) 장군 및 2만 명의 관군이 전사한 날이라 응당 원혼(冤魂)이 풍우(風雨)로 변하여 온 것일 터이다. 그래서 느꺼운 마음에 시를 지어 귀신을 맞이하는 노래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 한국전쟁 때 맞은 총탄 자욱이 선명한 김응하 장군 신도비. 마치 후금군사들의 창칼에 죽음을 당했던 장군의 재현 같다. 동생인 김응해 장군(1588~1666)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와 항전을 펼쳤다. 이 신도비는 1899년 건립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
우리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김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 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김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위에서 보듯 의류 장군이라고도 하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하여 '유하 장군(柳下將軍)'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무공으로 명나라에서는 요동백(遼東伯)에 추증했고, 광해군도 충렬사라는 사당을 세워주었다. 훗날 현종 11년(1670) 김응하 장군에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주었다.
각기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은 비슷했더라도 그 이유는 달랐을 것이다. 임진왜란 파병 이후 국세가 기울어가던 명나라는 조선의 심하 파병에 어떤 형식으로든 사의를 표해야 했을 것이다. 특히 명나라 군대의 변변치 않은 전투가 주요 패인이었지 않았는가. 김응하 장군을 요동백으로 봉함으로써 그 패배의 모멸감을 달래고 황제의 위엄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광해군 역시 신속하게 김응하 장군에 대한 추모작업에 나섰다. 제사도 지내주고 사당도 세워주었다. 그러나 패전 소식이 전해지던 3월에 광해군이 내린 명령은 "궁궐 완공이 늦어지고 있다. 서둘러라"는 전교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 없음'이다.(아렌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이히만 재판을 보며 내린 결론이 '악(惡)의 평범성'이었다.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그 평범성! 어떻게 하면? 생각이 없으면(thought-less)!)
그래도 김응하 장군의 추모에 공통된 점이 있다면, 아마 자신이 할 일을 하다 죽은 사람에 대한 경의가 아닐까? 장군으로써 전투에 나가 싸우다 죽었다는 그 사실, 얼핏 보면 당연한 삶이지만 쉽지 않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 같은 것……. 김응하 장군이 자기가 할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할 일을 이상하게 했던 또 하나의 인생이 있었다.
'중립외교' 파트너, 강홍립-정명수
김응하 장군과는 달리 도원수(총사령관) 강홍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복하였다. 다 알다시피 학계 일각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중립외교, 실리외교의 연장으로 설명한다. 문관인 강홍립을 도원수도 삼은 것도 광해군이 글과 말로 오고 가는 외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이 '관형향배(觀形向背)', 즉 '형세를 보고 싸우든지 말든지 하는 전략(?)'을 취하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알린 뒤 항복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사정으로 보아 광해군의 밀지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홍립은 이후 광해군과 후금의 핫-라인이 된다.
잠시 한 사람 더. 인조반정 이후, 곧바로 이괄(李适)의 난이 있었다. 당시 기익헌(奇益獻)이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베었다. 이때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탈출하여 구성(龜城)에 숨어있었다. 한 해가 지나서야 구성 부사 조시준(趙時俊)이 듣고 잡으려고 했더니, 한윤은 기미를 알아채고 후금으로 도망쳤다. 여기서 한윤은 강홍립을 만난다. 도망친 한윤은 강홍립 등에게 말하기를,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나 당신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습니다. 나와 함께 만주(滿州) 군사를 빌려 복수하십시오."라고 했으며, 인조 4년(1626)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연려실기술>에서 <일월록(日月錄)>을 인용함)
당시 강홍립은 한윤과 함께 여러 차례 계책을 꾸며 오랑캐[후금] 추장에게 조선으로 쳐들어 갈 것을 청하였으나, 누루하치는 그들이 자기 나라를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꾸짖고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홍타시(弘他時)가 대를 이어 즉위하자 강홍립과 한윤이 간청하여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인 1627년(인조5)에 후금은 8만여 기(騎)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는 바, 정묘호란이 그것이다. 강홍립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침략할 때는 길잡이였고, 조선과 후금이 휴전협정을 맺을 때는 통역을 맡았다. 어떤 사람은 강홍립이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에 황해도 백성들이 덜 죽었다고 한다. 어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박해일 씨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인조 때 조정에서 탁상공론을 일삼는 동안 후금이 침략한 것으로 나온다. 거기서 빠진 것, 침략하는 후금의 앞잡이로 광해군이 보냈던 강홍립이 있었다는 점이다.
▲ '민초의 생명력'에 기대어 패배주의를 벗어날 가능성을 보인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장면. 여전히 허접한 조선 관군과 용맹한 만주 용사들을 대비시키는 한계를 노정했다. 이 후금 침략군의 앞잡이가 다름 아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맡겼던 총사령관 강홍립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영화 책임은 아니다. |
같은 시대, 다른 인생
문곡 김수항의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 등은 사신으로 명나라 북경에 있었는데, 조선이 병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兵部)에 글을 올려 본국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순무(巡撫)에게 명하여 정예병을 뽑아 후금의 배후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국내에서 평안 병사 남이흥은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준(金浚) 등과 함께 안주성(安州城)에서 이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다가 불가항력의 싸움임을 알고 화약을 터뜨려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또 다른 중립외교의 증인이 있다. 정명수(鄭命壽). 광해군 때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 거기에 눌러 살면서 조선 사정을 밀고함으로써 후에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용골대(龍骨大)의 통역으로 나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청나라의 힘을 믿고 조선 조정을 압박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까지 올랐다. 효종 연간에도 친청파 김자점 등과 결탁하여 청나라와 내통하고 급기야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효종 3년 김자점 등은 처형되었고, 정명수도 이듬해 청나라로부터 관직을 빼앗겼다.
▲ 철원군에 있는 김응하 장군의 묘정비 탁본. 무덤이 아니라 사당 앞에 세운 비석이다. 탁본 하는 중이라 글자가 잘 보이지 않지만 맨 위 예서(隸書)로 쓴 '김장군묘비(金將軍廟碑)'라는 글씨는 문곡 김수항이 썼다. ⓒ국립문화재연구소 |
첫째, 바로 국제 관계에서 주체적인 역량을 배양하거나 행사하지 못했고, 둘째, 그러다보니 정세에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하여 지역의 평화 같은 공통, 공존의 명분은 고려하지 않고 힘의 우열에 따라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이런 삶보다는 김응하 장군 같은 삶을 기려왔다는 점이다. 나로 말하자면 김응하 장군처럼 싸우다 죽을 무용(武勇)도 없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사라져갈 용기도 없다. 아마 적절히 보신하며 그럭저럭 한 평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강홍립-정명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아니, 설사 강홍립-정명수처럼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었다고 강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최소한의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김응하 장군 같은 분들, 이름 없는 독립군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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