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⑥
가깝고도 먼 사람들
종종 역사에는 어려운 운명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는데, 문곡 김수항도 그런 경우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할아버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이모부는 유자신(柳自新, 1533~1612)이었고, 광해군의 부인, 즉 왕비 유씨는 청음의 이종 4촌 누이였다. 그러니까 청음과 광해군은 4촌 처남매부 사이이다.
그런데 문곡의 어머니는 연안 김씨로, 김래(金琜, 1576~1613)의 딸이고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의 손녀였다. 김래와 김제남이 세상을 뜬 해가 1613년이다. 그렇다. 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있었던 해이다. 김래는 인목대비의 오빠이다. 김제남은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였고. 그러므로 인목대비는 문곡의 외고모할머니이다.
당시 문곡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곡은 할아버지의 매형인 광해군에게 외조부 김래, 외증조부 김제남을 잃은 것이다. 계축옥사 이듬해에 살해된 영창대군은 살아있었다면 문곡의 당숙이 되었을 것이다.
청음은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인척이었고, 또 그 국왕이 사지에 몰아넣은 집안과도 인척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할까? 청음의 처신은 이미 다루었으니 반복할 것은 없다. 다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묻는 것이다.
문곡의 기억
나중에 문곡은 외조부인 김래의 동생 김선(金瑄, 1599~1614)의 묘지명을 썼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에 묻는 그 사람의 일대기를 말한다. 그가 광해군대의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불과 16세에 세상을 뜬 김선에 대한 문곡의 기록을 보자.
선조께서 승하하신 뒤 간신(姦臣)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아첨하여 모후(母后)를 폐위하려 모의했고,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며 큰 옥사를 만들어냈다. 의민공(懿愍公, 김제남)이 가장 먼저 재앙을 입었으며 나의 외조부(김래)와 중씨(仲氏) 진사공(進士公, 김규(金珪))도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당시 아직 어렸으므로 홀로 감옥에 갇힌 채 형을 받을 나이만을 기다렸다. 공은 부형(父兄) 모두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하루도 혼자서는 살고 싶지 않아 옥중에서 상소하여, "나이가 실제로 찼으니 법을 시행해야 하고, 처음에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도 죄이니 속히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문장이 너무 슬프고 아파서 듣는 사람이 목이 멜 정도였다.
이듬해에 이르러 마침내 해를 당하니 갑인년(1614, 광해군6) 2월 4일이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께서 사직을 안정시키고 억울한 무옥(誣獄)을 씻어주며 의민공에게 영의정 및 시호를 추증하고, 공에게도 사헌부 지평을 추증했다. (<문곡집> '지평으로 추증된 김공의 묘지명[贈持平金公墓誌銘]')
'의민공'은 김제남에게 인조반정 이후 준 시호이다. 이 '민(愍)' 자는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다. 시호는 대개 훌륭하다고 기리는 칭호이지만, 이렇게 화를 당해 비명에 세상을 뜬 사람들에게 주기도 한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자빈이었던 강씨(姜氏)는 저주의 혐의를 받고 인조 24년(1646) 3월에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나중에 이 역시 억울한 사건으로 인정되어 숙종 44년(1718) 위패와 시호를 회복하였는데, 그 때 시호가 '민회(愍懷)'였다. 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뜻을 가져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권61 44년 4월 17일(을미)) 역사공부를 하다가 시호가 좀 낯설면 무슨 일이 있었나 살펴볼 일이다.
계축옥사는 서양갑(徐羊甲) 등이 김제남 등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면서 이이첨 등이 만들어낸 거짓 옥사였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인 김선은 계축옥사 당시 15세였기 때문에, <대명률>에 따라 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듬해인 광해군 6년, 김선이 16세가 되어 형장을 가해도 될 나이가 되자 광해군은 그에게 압슬(壓膝) 등의 형문을 가하였다. 그리고 김선은 죽었다.
축소의 혐의
이렇게 광해군대가 흘러갔고, 계해반정이 일어났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으로 흔히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廢母殺弟]', '명나라를 저버리고 후금과 친했다[背明親金]'는 죄명을 거론해 왔다. 전자는 '원래 정치는 비정한 것'이라는 상투어 속에서 그 부당성이 희석되었고, 후자는 '반정 주체들의 맹목적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한 비난 속에서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높이 되었다. 계해반정 때문에 조선의 정책은 사대주의의 강화로 이어졌고, 두 차례에 걸친 후금(청)의 침략을 자초했다는 인식의 결과였다. 그러나 반정교서를 보면 그동안 연구자들의 해석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습 삼아 반정교서에서 밝힌 반정 사유를 알아보자.
① 선묘(宣廟)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②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였으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庶母)를 쳐 죽였으며,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③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④ 선왕조의 옛 신하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 혼인관계가 있는 친척)와 부시(婦寺. 후궁, 궁녀나 환관)들만을 높이고 신임했다.
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 나르며 벼슬을 사고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⑥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⑦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광해군 11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장수에게 동태를 보아 행동하라고 지시했고, 끝내 모든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게 했다. (<국역 인조실록> 권1 원년 3월 14일.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은 필자.)
▲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
물론 '폐모살제'와 '배명친금' 역시 중요한 반정 사유였다. 그러나 나머지 5개 항목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반정의 이유였다. 나아가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 5개 항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태였다면? 그동안 '폐모살제' 따로, '배명친금' 따로, 4개 항목은 눈감거나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광해군대를 이해했던 태도는, 사실의 측면에서 부정확하고, 관점의 측면에서 불합리하며, 윤리의 측면에서는 불공정하다. (이 문제는 나의 저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에서 다루었는데, 조금 수정하였다. 다만, 숭명배금(崇明背金)은 물론, 배명친금(背明親金)이란 말도 조선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배명'이란 말은 간혹 쓰였다. 반정 명분이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라는 두 가지로 단순화된 과정 역시 흥미로운 '현대 사학사'의 연구 주제이다.)
불행한 유산
반정 직후, 15년 이상 지속되던 궁궐공사를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궁궐을 짓기 위해 설치했던 영건도감을 비롯하여, 나례도감(儺禮都監) 등 12개의 난립했던 도감도 혁파하였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던 조도성책(調度成冊, 특별 세금 징수대장)을 소각하는 한편, 민간에 부과되었던 쌀과 포를 탕감해주었다. 인조 즉위 후 탕감한 양이 원곡(元穀) 11만 석이었다. 당시 호조에서 거두던 1년 세금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삭감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 살림도 아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공상지(供上紙)가 각도의 폐단이 된다는 말에, 대비전(大妃殿)에 바치는 것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민생을 소생시키도록 하였다. 사간원의 건의로, 광해군의 토목공사 때 석재와 철물을 헌납하고 자급을 뛰어 넘어 수령 및 동반의 실직을 차지하거나 종실로 봉군된 자들을 찾아내어 도태시켜 혼탁해진 관직 상황을 바로잡았다.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특히 기억해둘 일이 있다. <광해군일기>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간행되지 못했다. 활자본으로 5부를 찍어 춘추관과 지방 4대 사고에 보관하지 못하고, 중초본과 정초본의 형태로 <광해군일기>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유는, 바로 재정의 부족이다. 재정이 궁핍하여 국왕이 즉위하면 제일 먼저 1~2년 만에 간행하던 관례를 어길 수밖에 없었던 사실 그 자체에, <광해군일기>가 전해주는 또 다른 역사의 진실이 있다.
상시가(傷時歌)의 앞과 뒤
계해반정 이후 반정세력은 즉시 정치시스템의 복구를 시도했다. 광해군대 중단되었던 경연(經筵)을 개시하여 국왕과 신하들이 소통하는 문치주의 체제를 다시 가동시켰다. 이는 당장 국정에 필요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도 시급했고, 새로운 국왕 인조에게 전통적인 시스템을 훈련시킬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세력의 교체를 초래하기 마련이었고, 정권의 연착륙은 바로 이러한 정치세력 교체의 연착륙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때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반정으로 혼군(昏君) 광해군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반정과 함께 한달 여 동안 광해조 권신인 이이첨 등을 비롯하여 상궁, 나인(內人)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조사와 신문이 이어졌다.
15년의 기득권이 일거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인조 원년 7월 말, 기자헌을 우두머리로 삼았다는 유전(柳湔)과 유응형(柳應泂) 역모사건이 터졌다. 직접 연관되지 않았으나, 유몽인(柳夢寅)은 아들 유약(柳瀹)으로 인해 이 사건과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유전의 옥사가 끝나기 무섭게 10월 1일 저녁에 이시언(李時言)이 이유림(李有林)의 반역을 고변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건은 단연 이괄(李适)의 난이었다. 이괄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계해반정의 주축이기도 했다. 반정 이후 북방 방어가 시급했던 까닭에 조정에서는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이괄을 임명되어 영변에 주둔하게 했다. 1624년 1월에 문회(文晦), 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 군대가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도원수 장만 군사와 안현(鞍峴)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위세를 떨쳤고,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 장수인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이괄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궤멸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북 잔여 세력의 반역은 계속되었다. 인조 2년 4월, 이괄의 난의 여파로 김정립(金廷立)의 무고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하면, 같은 해 10월 경상도에서 "정인홍(鄭仁弘)의 나머지 자손[餘孼]으로 이 현에 살고 있는 박건갑(朴乾甲) 3부자 등이, 병사또[兵使道]가 통제사(統制使)와 군사를 이끌고 임금님을 모실 때, 길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몰래 해치워 부형(父兄)들의 원수를 갚을 계획"이었다가 군대의 위세가 무척 엄격하자 원하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뒤를 이어 11월 8일에는 박홍구(朴弘耈)의 옥사가 있었다. 다음 해인 인조 3년(1625) 9월 8일에는 문회(文晦)가 인성군(麟城君) 이우(李佑)를 둘러싼 역모를 고발했는데, 이것이 박응성(朴應晟) 역모사건이다. 가까스로 정묘호란을 수습했던 인조 6년(1628) 1월 3일에도 반역 사건이 있었다. 죽산(竹山)에 사는 김진성(金振聲)·김득성(金得聲)·신서회(申瑞檜)·이두견(李斗堅) 등이 승정원에 나아와 허유(許逌)와 이우명(李友明)이 반역을 일으킨 사실을 고변하였다. 이어 송광유(宋匡裕), 끝치(唜致), 이충경(李忠慶), 한선내(韓善乃), 김대기(金大器), 원충립(元忠立), 이경검(李景儉), 정한(鄭澣) 등 크고 작은 반역 사건이 계속 발생하였다.
인조반정의 허구성, 또는 쿠데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종종 인용하는 <상시가(傷時歌)>라는 글이 있다. <인조실록>에도 나오고, 조선시대 반역사건 심문 기록을 모아놓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도 나온다. 인조 3년 6월 19일, '흉한 격서(激書)'가 군영(軍營)에 투입되었다. 군영은 곧 반정을 일으킨 4대장 중 한 명인 신경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직숙(直宿)하는 곳이었다.
아, 너희 훈신들아 嗟爾勳臣
스스로 뽐내지 말라 毋庸自誇
그의 집에 살면서 爰處其室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乃占其田
그의 말을 타며 且乘其馬
그의 일을 행한다면 又行其事
너희들과 그 사람이 爾與其人
다를 게 뭐가 있나 顧何異哉!
반정 뒤의 공신들이 갖는 권력은 하늘을 찔렀을지 모른다. 실제로 광해군 때 권세를 부린 자들의 가옥과 재산을 훈신(勳臣)들에게 나누어줄 때 광해군 때 권신들이 도둑질했던 것도 차지하고 백성들에게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상시가'와 함께 기억할 사실은 공신(功臣)에게 주는 세곡(稅穀)도 일시 중지시켰다는 점이다.
선조(宣祖) 때 광국(光國)·호성(扈聖) 등 여러 공신에게 세곡을 주지 않은 것은 시세를 참작하여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사(靖社)의 공은 막대한 공적이기는 하나 공로를 보답하는 은전(恩典)은 물력을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오늘날 공사(公私)간에 재물이 바닥나고 세입(稅入)이 부족하여 제향(祭享)과 어공(御供)도 모두 줄였습니다. 많은 공신들에게 전례대로 세곡을 지급하는 것은 결코 이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서쪽 변방의 일이 진정되고 나라의 저축이 조금 넉넉해질 때까지 선조 때의 옛 규례에 따라 세곡을 주는 일을 거행하지 마십시오. (<국역 인조실록> 권5 2년 3월 27일(신사))
사헌부에서는 공신에게 세곡을 주도록 법전에 나와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세곡 지급을 중지하자고 청하였고, 인조는 3년 동안 세곡을 주지 말도록 조치하였다. 이 역시 조선 초유의 일이었다. 공신이 세곡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시가>를 인용하여 광해군대나 인조대나 마찬가지라고, "갈아봤자 별 수 없다"고 주장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농업 생산력이 거의 전부였던 시대에 광해군이 도탄에 빠트린 나라의 업(業)은 착실하게 고스란히 인조 시대로 전이되었다. 재정과 민생의 파탄에서만 불행한 유산이 남겨진 것은 아니었다. 반정에 반대하는 광해군대의 기득권 세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반정에 동의한 세력은 동의한 세력대로,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세력은 배제된 세력대로 정리가 필요했고 나름의 길을 선택하였다. 어느 경우든 거기에는 업(業)을 풀기 위한 수행이 필요했다.
대명의리란?
청음과 관련된 척화론과 대명의리의 실제에 대한 자료를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청음은 인조반정 당시 어머니 이씨의 상중이었으므로 조정에 들어오지 않았다가 이듬해인 1624년 55세에 승문원 부제조로 입조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가 있었으므로 전란을 국내에서 겪지 않았다. 그러나 모문룡의 조선을 명나라 조정에 무함한 일을 석명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부에 글을 올려 출병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명나라는 수병(水兵) 수천 명을 압록강으로 보내는 등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궁금한 대목은 청음이 귀국한 뒤의 일이다. 청음은 인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명나라 조정은 내관(內官)이 정권을 독단하며 현사가 배척받고 언관이 삭적되어 조정을 떠난다"고 말하였다. 한편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간원은 인조에게 "숭정황제가 국사에 나태하여 나라를 망친 일과 광해군의 일을 인용하여 거울로 삼으라"고 하거나, "숭정 시기는 안으로 현명한 재상도 없었고 밖으로 이름난 장수도 없었다. 이교(異敎)를 숭상하고 환관(宦官)을 총애했으니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명나라의 실정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듯 척화론자들의 명나라에 대한 인식이 맹목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명나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조선 후기 정치가나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특히 병자호란 무렵 후금과 화의(和議)를 거부하겠다는 척화(斥和) 의리는 홍익한(洪翼漢)이 천자(天子)로 칭하려는 청의 의도를 명료히 표현한 데서 확인하였듯이 조선의 자주성에 대한 침해를 거부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내 스스로 애걸하면 적은 더욱 조선을 경멸하여 진정한 화의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싸워 지킬 수 있음을 보여준 후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라는 홍문관 교리 윤집(尹集)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당색을 불문하고 척화 의리는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후금이 천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상관할 바 아니며 조선은 조선대로 판단하겠다는 자기의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명나라의 현실에 대해 맹목적인 추종을 보였다면, 그런 조선 사람들의 태도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소외의식이라고 해야 마땅하겠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 '주체의식과 대립되지 않는 대명의리', 앞으로 좀 더 진중히 검토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문곡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기라 좀 길게 다루었다. 이제 문곡의 어린 시절부터 하나하나 그의 삶의 궤적을 훑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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