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기후 변화를 다룬 묵직한 책도 번역돼 나왔다. 캐나다의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나오미 클라인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 자본주의 대 기후>(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16년)다. 이 책은 아직도 기후 변화가 인간 활동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혹세무민을 단호히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이른바 '인류세' 논의처럼 문명 전반에 원죄를 뒤집어씌우지도 않는다. 대기 중에 다량의 탄소를 배출한 주범을 이름 그대로 지목한다. '자본주의'라고.
클라인은 작금의 탄소 배출권 거래 따위로는 기온 상승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자본주의의 이익과 관성에 거슬러서 공공 소유 확대와 비시장적 경제 행위(가령 계획)를 통해 하루빨리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대결하지 않는 한, 기후 변화 속도를 누그러뜨려 인류의 생존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자본주의 대 기후"다.
클라인의 책은 고국 캐나다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클라인을 비롯한 진보 인사들이 화석 에너지 중심 체제를 시급히 종식시키자는 '도약(leap)' 선언을 발표했고, 좌파 정당, 노동조합 등에서 이 선언을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전기 요금 누진제가 논란이 될지언정 아직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해 이 정도의 각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안드레아스 말름의 <화석 자본>
하나는 스웨덴 룬드 대학교에서 생태학을 가르치는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의 최근작 <화석 자본 : 증기 동력의 부상과 지구 온난화의 뿌리(Fossil Capital : The Rise of Steam Power and the Roots of Global Warming)>(Verso, 2016)다. 이 책은 영국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발흥하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클라인의 논지에 살을 붙인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누락돼 있던 동력원 문제를 중심으로 초기 자본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다음 세 가지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첫째는 유동 에너지, 즉 지구 생태계 안의 에너지 순환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흐르는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거나 바람의 힘을 빌려 풍차를 돌리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사람을 비롯한 동물 에너지다. 셋째는 저장 에너지, 즉 지층에 광물 형태로 축적된 과거의 태양 에너지를 태워서 활용하는 것이다.
고대부터 인간 사회는 세 가지 에너지 형태 모두에 익숙했다. 자본주의 들어서 갑자기 저장 에너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산업 활동과 저장 에너지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산업 혁명 초기만 해도 그랬다. 19세기 초까지 영국 면방직 작업장의 주된 동력원은 수력이었다. 흐르는 물의 힘으로 수차를 돌리고 여기에 인간의 제어력을 가해 방직 기구를 움직였다.
전환점은 1820년대에 닥친 산업 자본주의의 첫 번째 구조적 위기였다. 면방직 산업의 과잉 투자로 공황이 닥치자 자본가들은 그들의 후예가 위기 때마다 반복하게 될 행동에 착수했다. 즉, 기술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새롭게 확보하려 했다. 이들은 숙련 노동을 대체할 정교한 방직 기계를 도입했다. 그럼 무엇으로 이 최신 기계를 돌릴 것인가? 이때 처음으로 자본가들은 수차가 아니라 새로운 발명품, 증기 기관으로 눈을 돌렸다.
경제학자들의 익숙한 추정과는 달리 증기 기관이 수차보다 훨씬 저렴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영국에는 수력을 사용하는 작업장을 세울 하천이 부족하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에는 증기 기관을 설치해서 석탄을 떼 가동하는 쪽이 수차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또한 하천을 정비해서 수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계획도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증기 기관이 승리했다. 왜 산업 자본가 1세대는 두 세기 뒤에 인류를 기후 변화라는 대재앙에 빠뜨릴 선택을 했는가?
첫째는 공간의 문제였다. 수력에 의존하려면 공장을 계곡이나 천변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은 인구 밀집지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게 마련이었다. 노동력을 모으기 쉽지 않았다. 숙련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높은 임금을 줘야 했고, 비숙련 일자리는 아예 강제 노동으로 충원해야 했다.
그러나 저장 에너지를 사용하면 이런 공간적 제약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굳이 하천 주변에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어디든 석탄을 운반해 오기만 하면 공장을 돌릴 수 있었다. 도시에 공장을 지어서 손쉽게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역설이었다. 유동 에너지는 자본을 특정 장소에 가뒀지만, 저장 에너지는 자본이 유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저장 에너지는 이런 시간적 제약도 극복하게 해주었다. 증기 동력을 사용하면, 자본가가 원하는 속도로 기계를 계속 돌릴 수 있었다. 제1차 공장법 제정으로 더 이상 노동 시간을 마음껏 늘릴 수 없게 된 자본가들은 이제 기계 가동 속도를 높여서 노동 강도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이것도 역설이었다. 유동 에너지 아래서 자본은 자연과 인간의 시간에 자신을 맞춰야 했지만, 저장 에너지는 유례없이 유동적인 자본의 시간을 창조했다.
자본이 화석 연료를 선택한 것은 이렇게 희소성이나 비용이 아니라 권력 관계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말름은 영어에서 파워(power)가 '권력'과 '동력'을 함께 뜻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화석 연료 덕분에 자본은 두 가지 파워를 동시에 확보했다. 유동 에너지 사용이 수반하는 시공간 제약에서 벗어남으로써 노동을 더욱 철저히 제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자본이 화석 연료와 결합해 '화석 자본'이 된 핵심 이유였다. 이를 말름은 "자연을 자본에 실질적으로 복속시킴으로써 노동을 자본에 실질적으로 복속시켰다"고 정리한다.
산업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에너지 체제가 바뀐 이유가 이와 같다면, 정반대 방향에서 에너지 체제의 재전환을 추진하는 데 핵심 장벽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진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 가능 에너지 중심 체제란 결국 유동 에너지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두 세기 동안 석탄과 석유라는 저장 에너지를 통해 두 가지 파워를 마음껏 누려온 자본에게는 굳이 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맡겨서는 산업 혁명 이전처럼 자연 조건에 구속되는 에너지 체제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민주적 계획이 개입돼야 한다. 말름은 최소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전시 경제 같은 비상 경제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해진 21세기 자본에게 이것보다 더 자신들의 이익 및 권력과 충돌하는 전망은 없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처한 궁지다. 말름의 연구는 클라인 저서의 부제 "자본주의 대 기후"에 눈에 확 띄는 붉은 색 밑줄을 보탠다.
티머시 미첼의 <탄소 민주주의>
미첼의 책에서도 권력과 동력은 불가분의 관계다. 동력원은 정치권력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핵심 요소다. 현대 민주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첼은 자본이 석탄을 선택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대중 민주주의가 성장했다고 지적한다. 말름이 정리한 것처럼, 저장 에너지 덕분에 자본은 특정 지역(공단 혹은 공업 도시)에 생산 설비를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노동 대중도 이들 지역에 대거 결집했고, 이는 단결력의 토대가 됐다. 노동조합과 진보 정당을 만들었고, 총파업도 벌였다.
특히 석탄 채굴 및 운반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힘이 막강했다. 광산 노동자, 철도 노동자들이 그들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이 두 부문은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의 온상이었다. 양차 대전 사이에 이들 부문 노동자의 전투력이 최고조에 이른 것과 동시에 화석 자본의 고향 영국에서는 한 세기만에 석탄 생산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화석 자본의 지배를 이어가면서도 석탄의 세기를 끝내야만 했다. 대안은 석유였다.
석탄이 자본의 의도와 상관없이 대중 민주주의 시대를 연 것처럼, 석유 역시 민주주의의 틀을 새로 짰다. 탄소 민주주의의 제2기가 열렸다. 우선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그랬다. 석탄이 선진 공업국에 비교적 고르게 분포한 것과 달리 석유는 지구의 특정 지역에서만 채굴 가능했다. 석탄은 국민 국가 내에서 생산, 운송, 소비된 반면 석유는 중동 등 몇몇 지역에서 채굴된 뒤에 지구 곳곳으로 수송됐다.
이제 과거 탄광 노동자들과 같은 전투력을 지니게 된 것은 산유국 민중이었다. 탄광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과 탄광 국유화 요구로 전투력을 과시했다면, 산유국 민중은 실제로 유전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이는 이들 나라 민주주의의 힘찬 전진이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인 탄소 민주주의 체제에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석유의 값싸고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중동을 관리하던 서구는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할 조짐이 보이기만 하면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말하자면 전 지구적인 탄소 민주주의를 위해서 중동 등 산유국의 민주주의는 제어돼야 했다. '석유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일수록 민주주의는 저발전되고 빈부 격차가 극심하다는 이야기다. 흔히 이것이 산유국 내부의 부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시각이다. 자본주의 중심부가 탄소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도록 산유국의 민주주의가 체계적으로 억압당한 결과다.
이제 이 문제는 산유국만의 비극은 아니다. 화석 자본의 역풍이 기후 변화로 나타나는 것처럼, 전 지구적 탄소 민주주의 체제의 역풍이 자본주의 중심부를 강타하고 있다. 아랍 세계에서 세속 민주주의가 억압당하자 등장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테러가 그것이고, 이 지역의 출구 없는 혼란으로 인해 유럽으로 몰려드는 이민, 난민의 행렬이 그것이다. 유럽연합이라는 장엄한 건축물의 마감 작업 중이던 유럽 민주주의는 이 역풍 앞에서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일국적 차원에서도 석유는 탄소 민주주의의 새로운 구조를 낳았다. 마침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려던 시점(1930년대)에 각국 엘리트들은 자본주의 최악의 공황을 반전시켜서 영원한 성장의 시대를 여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에게 석유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원군이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오일 쇼크)가 닥치기 전만 해도 석유는 아주 저렴한데다 무제한 공급될 수 있는 동력원처럼 보였다. 값싼 석유의 무한한 공급을 전제로 지속 성장하는 '국민 경제'라는 관념이 등장했다. 국민 경제의 성장을 측정할 지표로 국민총생산(GNP)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국민 경제의 지속 성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구 대의 민주제 안정화의 토대였다. 이것은 석유 시대에 탄소 민주주의가 이룬 거대한 성취였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이 민주주의에는 독특한 내적 한계가 있었다. 국민 경제의 지속 성장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는 엘리트들의 권력이 그만큼 전례 없이 확대됐다. 케인스주의 시기에 이들은 관료 엘리트였고,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금융 엘리트였다.
어쨌든 대중과 구별되는 전문가가 '경제'를 관리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자체 안정을 위해서도 이에 토를 달아선 안 된다는 게 불문율이 됐다. 전문가 지배와 민주주의 사이에 깊은 골이 파였고, '경제'와 '정치'가 엄격히 구분됐다. 그 사이에는 바로 석유가 흘렀다. 값싼 동력원이 끊임없이 공급된다는 전제 덕분에 민주주의는 전문가 지배의 고유 영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존속했다.
탄소 민주주의의 이러한 내적 한계 때문에 오늘날의 정치 체제는 기후 변화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기만 하다. 탄소 배출량 조절 역시 전문가들의 영역이 되고, 민주주의는 가령 전기 요금 누진제 논란처럼 기후 변화의 부담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나 논의하는 장으로 남는다. 아니,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정도 논의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탄소 민주주의>는 이런 결론으로 끝맺는다.
"복지 민주주의의 특정한 장소와 일화를 연 20세기 초 대중 정치의 출현이 석탄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면, 현대 민주 정치의 한계는 석유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규명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보다 민주적인 미래의 가능성은 화석 연료 시대를 끝내는 과정에서 우리가 발전시킬 정치적 수단에 달려 있다." (254쪽)
즉, 21세기에 민주주의의 갱신과 에너지 체제 전환은 같은 과제의 다른 이름이다.
동력 혁명과 권력 혁명은 하나다
몇 달 전 스페인 총선에서 신생 정당 포데모스가 연합좌파(공산당이 중심이 된 정당 연합)와 선거 연합을 결성하고 발표한 공약의 첫 번째는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노동, 복지 공약들보다도 더 먼저였다. 전통 좌파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클라인과 동지들의 책을 읽고 난 뒤라면,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동력 혁명과 권력 혁명은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동력원의 전환 없이 계급 세력 관계의 역전 없고, 그 역 또한 진실이다. 새로운 에너지 체제를 바란다면 사회 변혁을 각오해야 하고, 사회 변혁을 꿈꾼다면 에너지 체제 전환을 첫 번째 과제로 놓아야 한다. 포데모스의 총선 공약은 이런 깨달음의 한 표현이다.
어쩌면 이 깨달음에 도달하자고 두 세기 넘게 산업 자본주의가 지속되어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두 세기가 풀어 놓은 역풍이 너무나 무시무시하다. 과연 인류의 깨달음이 역풍이 불어오는 속도를 앞지를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이 참기 힘든 이 무더위에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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