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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향욱의 천기누설, 연산군과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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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향욱의 천기누설, 연산군과 통했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99%의 역사관

왕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성한 권위라고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정조의 호처럼 왕은 만백성 한 명 한 명에게 내리비치는 밝은 달 같은 존재라고 했다. 따라서 왕권은 결코 사적일 수 없으며 항상 공공의 권력으로서 탕탕평평하게 바른 정치를 뿜어내는 원천이라야 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깨뜨리고 왕권이 그 무슨 공공성의 대변자이기는커녕 일개인의 욕망으로 만인의 천부적인 권리를 빼앗고 성립한, 나아가 세습을 통해 그 개인의 혈족이 독점하는, 지극히 사적이고 부당한 권력이라는 천기(天機)를 누설한 자가 있었다. 조선 왕조의 제10대 국왕인 연산군이다. 그는 왕권을 신성한 공공의 권력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사대부들의 견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적이며 독점적인 권력의 본질을 마음껏 드러내다가 사대부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연산군의 이 같은 천기누설은 멀리는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부터, 가까이는 증조할아버지인 세조의 계유정난으로부터 쌓여 온 세습 왕권의 모순을 폭로하는 행위였다. 특히 세조는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다 못해 그 어린 소년을 죽여 버리기까지 하고서야 권력을 확보하는 패륜 행각을 통해 이미 연산군에 앞서 왕권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바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이 같은 패륜 행위를 위기에 처한 왕권의 회복이라는 논리로 그럴 듯하게 합리화하고 포장했다. 어린 단종을 둘러싼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천명을 받은 이 씨 왕권을 위협하고 있기에 자신이 나서 꺼져 가던 천명을 되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의 구축과 담대한 변경 개척을 벌여 나갔다. 그가 왕으로서는 꽤 잘했다는 평가가 아직도 있을 만큼 세조의 합리화는 성공한 편이다.

그처럼 세조가 승승장구할 때 뒤에서 한을 품고 살아가던 한 여인이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였다. 1457년(세조 3년) 초겨울 남편의 비보를 들었을 때 그녀는 서울 낙산 부근의 동쪽을 바라보며 봉긋이 솟아 있는 동망봉(東望峰)에서 구슬피 울고 있었다. 열여덟 어린 처자의, 가슴을 후벼 파는 애끊는 울음소리에 인근 지역의 여인들도 덩달아 울었다.

정순왕후는 유배지로 떠나는 남편과 청계천의 영도교에서 생이별할 때 꼭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하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리는 결국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기 위해 건넌 다리'요, '영영 이별'하고 만 슬픔의 다리가 되고 말았다. 여인은 눈에 핏발이 선 채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부인(夫人)에서 서인(庶人)으로 한 단계 더 강등된 정순왕후는 이제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세조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반드시 살아서 당신과 당신 자손들의 파멸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고 말이다.

그녀의 저주였을까? 세조는 왕이 되기 위해 몹쓸 짓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환영을 보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겪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 엄청나게 많은 적을 만들었기에 죽은 뒤 폭군으로 낙인찍힐까 봐 그는 직계 후손에게로 왕통이 이어지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나 세조의 비극은 말년에 겪은 자기 일신의 고통에서 그치지 않았다. 맏아들 의경세자는 아버지의 악업 탓인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21명의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재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세조는 부랴부랴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해양대군, 곧 예종도 건강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저세상으로 떠났다.

예종에게는 제안대군, 인성대군 등 두 아들이 있었지만, 후계자의 자리는 앞서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에게 돌아갔다. 여기에는 의경세자의 미망인인 소혜왕후와 권신 한명회가 결탁해 벌인 정치적 책략이 작용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제9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가 성종이다. 그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과단성과 증조할아버지인 세종의 지성을 함께 갖추어, 조선 시대를 통틀어도 명군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성종은 조선 왕조의 근간으로 규정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해 반포하고, 조선 왕조의 관점에서 역사와 문화, 예와 악을 망라하고 정리해 편찬했다. 그뿐 아니라 향촌 사회에 은둔해 있던 사림을 등용해 정변과 공신들의 전횡으로 얼룩진 정치를 정화하려는 노력도 했다. 감찰과 언론 분야에 배치된 젊은 사대부들은 공론을 무기로 국왕과 대신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왕권에 도덕성을 불어넣고자 애썼다. 이 같은 신하들의 견제는 왕으로서는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면 왕권은 공공성으로 포장되어 공고해질 수 있었다.

손자인 성종이 이 같은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세조가 지은 피비린내 나는 죄업은 어느 정도 씻겼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세조와 그의 자손에게 닥친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도학(道學) 군주로 명성이 높은 성종이지만 여자 문제에서는 그다지 지조가 높지 않았던 듯하다. 아니, 더 많은 씨를 뿌려 왕통의 기반을 폭넓게 다져야 한다는 군주의 의무를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왕비인 제헌왕후를 제쳐 두고 후궁인 소용 엄 씨, 귀인 정 씨를 가까이 했다. 이것이 제헌왕후의 투기를 불러일으켜, 그녀는 부부 싸움을 하다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상처를 내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제헌왕후는 두 후궁이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두 후궁의 처소로 가는 길목에 죽은 사람의 뼈를 묻고는, 그들이 자신과 원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감찰 상궁 명의로 숙의 권 씨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것이 정말 제헌왕후의 소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행위는 오래가지 않아 대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진노한 소혜왕후는 성종을 설득해 제헌왕후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다가 사약을 내려 목숨까지 빼앗도록 했다. 이렇게 사사(賜死)된 제헌왕후가 바로 그 유명한 '폐비 윤 씨'다.

한국인에게 알려진 그 후일담은 다음과 같다. 폐비 윤 씨의 아들인 세자 융은 어머니의 비극적인 최후를 알지 못한 채 할머니인 소혜왕후, 의붓어머니인 정현왕후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아버지 성종을 이어 즉위하니 그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닮아 성군의 싹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서히 태만해지다가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되자 광기 어린 폭군으로 변해 갔다. 연산군은 폐비 윤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엄 씨와 정 씨를 때려죽이고, 병상에 있던 할머니 소혜왕후를 몰아붙여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다. 폐비 윤 씨의 죽음에 책임이 있거나 방관했던 사람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고, 한명회처럼 이미 죽은 자들은 관 속에서 시신이 파헤쳐져 목을 베였다.

이 같은 연산군의 패륜 행위를 두고 보지 못한 신하들은 들고일어나 못된 임금을 몰아냈다. 그리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옹립하니, 그가 중종이다. 역사에 '중종 반정'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정순왕후가 열여덟에 청상과부가 된 지 50년 만인 1506년에 일어났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정순왕후는 욕된 목숨을 끈질기게 이어 간 끝에 이와 같은 인과응보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뿐 아니라 그 뒤로도 15년을 더 살아 자신과 남편을 능욕한 시삼촌에게 철저히 복수했다.

세조로부터 연산군에 이르는 한 가족의 비극은 그것이 일가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비극 자체는 그들이 남들과 똑같은 가족이면서도 온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로 군림한 데서 비롯되었다. 왕권이라는 '공적인 권위'가 이들의 머리 위를 짓누르지만 않았어도 천륜을 어기는 범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산군의 폭정이 단순한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폭군으로 돌변했다는 것은 연극의 주제로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인내심을 발휘하며 만들어 놓았던 신하들의 왕권 견제 장치를 못마땅해 했다. 성종은 신하들이 감찰과 언론 기능을 통해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권력의 본질에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만인지상의 절대자인 왕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이성계의 무력으로부터 출발한 이 씨 가문의 권력은 결코 하늘이 내려준 공적인 권위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이며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거기에 사적인 복수심이 기름을 부은 것이다.

'99퍼센트 민중은 개돼지이고 자신은 그들을 사육하는 1퍼센트에 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망언은 연산군의 천기누설을 떠올리게 한다. 나향욱은 교육의 목적이 전인적이고 보편적 교양을 갖춘 공동체 구성원의 육성이라는 겉포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지배 구조의 재생산이라는 천기를 누설한 것처럼 보인다.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가 왕권을 보좌하는 지적인 관료 집단을 양성해 군주 체제의 재생산을 도왔다는 것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민주주의 시대라는 오늘날의 교육도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을 누가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겠는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교육'을 통해 1퍼센트의 지배층은 계속 충원되고 재생산될 텐데 말이다.

나향욱의 천기누설은 조선 왕조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나아진 게 무엇인가를 묻게 할 만큼 자극적이다. 누구나 그러려니 하고 있던 사실을 겉으로 드러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그 망언은 99퍼센트의 민중을 분노케 하고 깊이 사유케 할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99퍼센트의 민중에게 연산군의 폭정은 '문제적 개인'의 일탈에 불과하고 조선 시대에도 좋은 왕은 많았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역사학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민중이 99퍼센트나 되는 줄 몰랐던 1980년대에 반짝했다가 무대 뒤로 내려앉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고찰하는 그 민중사학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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