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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잘 보는 여성이 왜 남성보다 못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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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잘 보는 여성이 왜 남성보다 못 살까?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3.8 여성의 날 단상

오늘(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유엔이 정한 세계인의 기념일이고, 러시아에서는 연휴일 정도로 큰 명절이다. 중국은 공휴일은 아니지만 '국제부녀절'이라고 해서 직장 여성들이 반일만 근무하고 곳곳에서 행사가 벌어진다고 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초콜릿을 주며 사랑과 우정을 표시할 날은 출처도 불분명한 화이트데이(3월 14일)가 아니라 이날이어야 하지 않을까?

금방 당연시될 일에 왜 목숨을 걸었을까?

작년(2015년)에 외국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영국 영화 <서프러제트> 생각이 난다.

아직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은 이 영화의 제목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목 그대로 20세기 초 영국 여성들의 선거권 쟁취 투쟁을 그린 영화이다. 20세기 초라면 100년 전이니까 긴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별로 오래지 않은 과거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그 시절 영국의 여성 인권 상황은 고대 노예제 사회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비참했다.

영국 여배우 캐리 멀리건이 연기한 모드 왓츠는 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여성 노동자이고, 직장 동료 노동자의 아내이며, 한 아이의 엄마였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한 계기에 의회의 여성 선거권 관련 청문회에 참여하고, 정말 우연히 자신이 일하는 방직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참담한 삶에 대해 증언하게 되었다.

이후 모드 왓츠는 에멀라인 팽크허스트가 이끄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툭하면 감옥에 잡혀 가고, 경찰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고, 집에서 쫓겨나고, 끝내 아이마저 빼앗기고 만 것이다.

모드 왓츠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사건 속에 개연성 있게 녹아들기 때문에 진한 공감을 자아낸다. 평범한 여성이 열혈 운동가가 되어 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기 때문에, 여성 참정권이라는 거창한 문제가 보통 사람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더 잘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

이 영화를 본 뒤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12년보다 앞선 1893년 뉴질랜드에서는 이미 여성 선거권이 인정되고, 1919년에는 피선거권도 도입되었다. 영국에서도 1918년에 재산이 있는 30세 이상 여성의 선거권이 인정되고, 1928년에는 모든 성인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1925년에는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도 인정되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전 세계로 파급되어 오늘날 문명 국가치고 여성의 참정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나라는 없다.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이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될 텐데, 모드 왓츠처럼 모든 걸 희생하면서 싸울 필요가 있었을까? 더욱이 영화 속에서 왓츠의 동료인 에밀리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정말 없었던 것 아닐까?

서프러제트의 꿈은 이루어졌나

물론 엉뚱하고 바보 같은 생각이다. 이 세상에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주는 냉엄한 교훈이다. 영화를 보다가 정당한 권리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왓츠'와 '에밀리'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나머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수많은 여성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은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일이 100년 전만 해도 부자연스러운 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남성 정치인들은 이렇게 외쳤다.

"여성은 감정에 치우치기 쉬워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아빠와 오빠와 남편이 대변해 주는데 무엇 때문에 여성에게 선거권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 서슬에 눌린 보통 사람들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외면하고 따돌렸다. 그들은 남성만 참정권을 갖는 현실이 신으로부터 부여된 질서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천리에 역행하는 질서였다는 인식이 보편화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사의 진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지금 당장은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비정상적인 것, 사회의 존립에 해로운 것, 어떤 수를 써서라도 억눌러야 할 것으로 치부되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나면 마치 공기 속에서 숨 쉬듯 당연하게 여겨지게 될 그 어떤 것의 실현! 그리고 그 실현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렇다면, 팽크허스트가 이끌던 서프러제트의 '당연한 소망'은 오늘날 완전히 이루어진 걸까? 물론 그들이 내건 여성 참정권 획득이라는 목표는 달성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참정권 획득을 통해 얻고자 했던 여성의 권리가 다 확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성이 자신의 대표를 직접 뽑고 공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나,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불평등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프러제트는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기만 하면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게 되어 양성 불평등의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만 되면 우리끼리 잘살 줄 알았던 것이나, 계몽주의자들이 대중을 깨우치기만 하면 그들이 알아서 불의에 등 돌릴 줄 알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외세가 물러가니 민족 내부의 계급 대립이 고개를 들고, 대중의 일부는 알 것 다 알게 되고서도 여전히 '나쁜 놈'한테 표를 던진다. 여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도 선출 공직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성들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직에 출마할 사회 경제적 여건이 남성들에 비해 불리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공직자를 시험만 봐서 채운다면 여성이 벌써 절반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게다가 참정권과 무관한 민간 부문의 남녀 불평등은 훨씬 더 열악하다.

문제는 소유다

결국 민족 해방이든 여성 해방이든 오늘날 한계에 부딪힌 지점은 동일하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남녀평등을 비롯한 사회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진보는 바로 이 지점에서 편견과 억압에 발목 잡혀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비유되는 심각한 빈부 격차가 서프러제트를 비롯한 진보의 투사들이 피땀 흘려 이룩해 온 성과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있다.

국제 구호 단체 옥스팜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전 세계 하위 인구 50퍼센트, 즉 35억 명과 맞먹는 부를 가진 '슈퍼 리치'의 수는 62명에 불과했다. 그들 중 여성은 9명에 불과해 남녀 간 부의 편중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각종 통계가 나오고 있지만 구체적인 수치만 다를 뿐 이런 세계적 추세는 조금도 거스르지 않고 있다.

이처럼 부가 편중된 상황에서 무슨 사회 통합이 가능하고 선거 혁명이 가능하며 남녀평등이 가능하겠는가? 민족은 극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빈민으로 나뉘고, 생존조차 버거운 대중은 정의고 나발이고 자기한테 떡고물이라도 조금 더 줄 것 같은 부자 정당에 표를 던진다. 돈 없고 힘없는 여성들은 눈물로 밤을 지새울지언정 돈 있고 백 있는 남자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런 부의 편중이 천리에 위배되는 것,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 한 명의 부자가 대한민국 국민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재산을 갖고 있는데도, 이를 그 부자의 능력으로 치부할 뿐 그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경제학 이론을 갖다 대지 않아도 전대미문의 '약탈'이 아니고는 한 개인에게 그렇게 많은 부가 쏠릴 수 없는데도 말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사적 소유를 방임하는 데서 비롯된 빈부 격차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이야말로 사회 경제적 평등이 이 시대의 진보 코드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현재 한국 사회의 유력한 정당이나 정치인 가운데 양극화를 초래한 소유 구조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 민주화'니 '동반 성장'이니 하는 미사여구로 양극화가 발생하는 뿌리를 건드리지 않고도 봉합이 가능할 것처럼 떠드는 약장수들은 널렸다.

한 사람이 수많은 다른 사람이 평생 벌 수 없는 돈을 손에 쥐었다면 그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 구조에 기댄 착취와 약탈 때문이라는, 따라서 그 돈은 반드시 성실하게 일하고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몫을 빼앗긴 다수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 그것야말로 이 시대 진보의 다음 기착지이다.

서프러제트가 표면적 목표를 달성하고도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남녀평등의 꿈은 그곳에서야말로 더 이상 꿈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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