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의 장기 불황의 근본적인 원인
현재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세계적인 불경기와 중국의 발전에 따른 국제적 분업 체계의 변화 등으로 산업 구조 조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난 54년간 장기 집권한 자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대기업, 언론, 보수적인 학계, 법조계, 금융권 등 기득권 집단의 이기주의가 원활한 산업 구조 조정을 막았다. 그 결과 긍정적인 경제 구조의 개혁과 새로운 혁신 산업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장기적인 불황의 주요 요인이 됐다.
일본 경제 장기 불황의 근본 원인은 내수 축소에 있다. 비정규직 고용 확대와 임금 정체는 국민 가처분 소득을 실질적으로 감소시켰다. 2000년대 초반 최장의 불황이라고 하는 고이즈미(小泉) 정권 동안에도 대기업은 미증유의 수익을 올리면서 내부 유보를 증대했고 주식 배당을 늘렸지만, 임금은 정체됐다. 이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소비세 증세, 법인세 감세, 소득세의 누진성 완화, 중산층의 실질적 세금 부담 증대 등 재정 악화에 역행하는 정책을 시종 일관 추진했다. 증세 정책은 세수 확보뿐만 아니라, 조세를 통한 적극적인 2차 분배와 각종 복지 사업 등 정부의 역할 강화를 의미하는데, 일본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기업의 성장과 국가 경제의 장기적 발전 간의 상관관계가 약해졌고, 국가에 의한 기업의 조절 관계도 약해졌다. 일본의 경우 상장 기업 주식의 약 30%를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다. 한국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일본도 기업의 이익과 발전이 국민 경제의 활성화나 국가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한국과 유사한 상황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주요 기업들은 외국인 주식 보유 비중이 높아 '한국의 기업'이라고만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대기업의 이익이 자연스럽게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 이제 외국인이 주식의 반 이상을 소유하는 기업의 경우, 해당 기업의 이익은 근로자의 임금 상승을 유도하지 않고 고용을 적극적으로 창출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돈벌이가 오히려 국민 경제의 장기적 쇠퇴로 귀결된다고 할 정도로 그 관계가 달라졌다.
일본의 산업 구조 조정 경험
조선 산업과 해운 산업 등 최근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산업 구조 조정을 일본의 구조 조정 경험과 비교해 보면, 한국도 일본의 실패를 답습할 우려가 높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최근에 읽은 <일본 기업 구조 조정 20년의 교훈>(이지평 지음, LG경제연구원 펴냄)이 한국과 일본의 구조 조정을 비교하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잘 기술해 놓았다는 생각에서 이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일본도 장기 불황 초기에는 문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과잉 채무, 과잉 설비, 과잉 인력 등에 대한 구조 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하여 부실 기업이 확대되고, 은행의 부실이 심각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기업 간 합병 및 경쟁사 간 통합 등 적극적인 기업 구조 조정 및 산업 구조 조정을 동시에 진행해 철강 산업은 5개사를 3개사로 통합했다. 조선 산업도 여러 조선사를 통합하여 경쟁력을 갖추는 데 더해 신규 성장 산업의 개척과 육성을 동시에 추진했다.
기업들의 절박함에 비해 일본 정부는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해당 산업의 위기가 찾아온 지 15년이나 지난 2000년대 중반에야 본격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구조 조정에 개입하였고 상시 구조 조정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하지만 정권에 따라 전략이 달라지는 등의 이유로 경제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실패했고, 디램(DRAM) 반도체 분야는 해외에 매각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의 인력 감축과 사업 축소, 부실기업 퇴출 중심의 구조 조정에서 이제는 점차 신소재 개발과 신산업으로의 전환 등으로 구조 조정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실제로 세계적인 불경기와 금융 위기, 신기술의 발전 및 산업 구조의 변화는 일본의 산업에도 변화에 대한 압박으로 다가왔고, 여러 분야의 변화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자민당을 지탱했던 주요 정치 세력인 농협이나 지방 건설회사와 같은 '구 기득권'의 일부가 퇴출되고, 오릭스나 미야우치(宮内)와 같은 금융 자본이나 락텐(미키타니(三木谷)나 소프트뱅크(손정의)와 같은 IT 자본이 '신흥 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산업 구조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에는 희비가 엇갈리고, 일본 기업들도 승자와 패자로 나뉘었다.
도요다, 닛산(자동차 산업), 락텐, 소프트뱅크(IT 산업), 오릭스(금융 산업) 등은 승자(勝者)라고 할 수 있지만, 소니, 파나소닉, 샤프와 같은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들은 패자(敗者)가 되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 저자는 "기업의 벌어들이는 힘을 끊임없이 강화하지 않으면 국가 경제가 장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고, 노동자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을 시종일관 유지하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기업의 벌어들이는 힘을 끊임없이 강화"한다는 것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 정부도 그것을 지지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본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시장 경제'에 반(反)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흥하든지 망하든지 그것은 시장에 맡겨야지 기업 활동에 정부가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데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신봉한다면 정부가 어려워진 기업을 지원하는 것도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필요할 때는 기업을 살려야 경제가 산다고 말하면서 세금으로 부실화된 기업과 산업을 지원하고, 그 과정이 끝나면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면서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는 일관되지 못한 자세는 문제다.
일본의 각종 구조 조정은 신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시행됐다는 한계가 있다. 산업 구조 조정을 위해 투입된 정부의 자금은 해당 대기업을 살리는 데만 집중되었고, 유럽 국가들과 달리 구조 조정 과정에서 국민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거나 민간 기업을 공공화하거나 공기업으로 전환하는 등의 조치를 병행하지 못했다. 정부가 국가 재정을 투입하여 구조 조정을 한다면 적극적 복지와 사회 정책을 동시에 실시하여 국민의 가처분 소득을 늘리고 내수 경제를 활성화해야 하는데, 정부와 정치권이 그런 역할을 못한 것이 산업 구조 조정의 한계였다.
일본 양적 완화, 서민 부담만 늘어나
한국도 최근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 양적 완화 정책이 논란이 되었고, 실제로 얼마 전에는 조선 산업의 구조 조정을 위한 기금 조성 목적으로 추가 발권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 자민당은 199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를 추구했다. 하시모토(橋本) 내각부터 고이즈미(小泉) 내각에 이르도록 자민당은 일관되게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추구했다. 나중에 아베 총리 등 자민당 우파 정권이 다시 집권하여 '엔화 무제한 방출 정책' 등 통화량 팽창을 중심으로 하는 양적 완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경제 구조가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고, 임금을 통한 소득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아 지속적인 통화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내수나 기업 투자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아 재정 투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엔화 무제한 방출 정책으로 일컬어지는 아베(安部) 정권의 양적 완화 정책은 그 목적 자체가 '내수 진흥'이 아니고 '엔저(低)로 인한 수출 확대'였다. 그 결과, 엔저로 인해 도요타를 비롯한 수출 대기업들은 미증유의 수익을 얻고 내부 유보와 배당금을 증액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엔저는 수입 물품들의 가격을 증가시켜 서민 생활을 압박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쌀을 제외하면 먹을거리 자급률이 40%에 불과하여 식량의 대부분을 수입할 수밖에 없으며,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원유는 엔저로 인해 국민에게는 유가 상승을 초래했다.
한국과 일본이 유사한 또 하나의 분야는 유럽과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달리, 경제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구시대적인 토목과 건설에 대한 투자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아베 정권의 재정 투입 또한 과거 자민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필요 없는 공공사업에 투자했던 것이 눈에 보인다. 신칸센 확장, 핵발전소 건설, 도쿄 올림픽 관련 경기장 개축 등 필요가 없거나 효율성이 낮은 공공사업에 자민당과 연관된 특정 기업이 수주했지만, 이로 인해 국가 경제가 나아지고 내수가 확대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한국도 영남권 신공항 건설로 나라가 들썩이고, 서울에서 세종시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 건설이나 수서발 KTX 건설 등 여전히 토목 건설에 돈을 쓰는 것을 보면서 일본의 실패를 뒤따라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한국은 이미 2004년도 사회 간접 자본(SOC) 축적도 조사에서 SOC가 충분히 과잉이다. 도로 건설은 당시에 전면 중지해도 120% 과잉(2004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 결과에 따른 기획예산처 대통령 보고)이었고, 공항도 예상 수요보다 더 증설됐는데, 그로부터 12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도로 건설이 계속되고, 공항 신설 논란도 일고 있다.
당시 기획예산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 정부의 재정 지출 중 경제 사업 지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2∼4%인데 비해 한국은 5.6∼6.4%로 매우 높은 수준이므로, 최소한 2∼3%를 줄여야 한다고 보고했다(SOC 스톡 진단 연구 결과에 대한 대통령비서실 내부 토론회, 예산처, 건설교통부, 해양수산부 참여, 2004년 4월). 이것을 현재 수준으로 평가하면 연간 30조∼45조 원 정도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다.
이런 연구 결과와 대통령 보고 때문에 정부 재정에서 SOC에 직접 투자하는 것은 줄었지만, BTO(민간이 건설하고 소유권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 양도한 채 일정 기간 동안 민간이 직접 운영하여 사용자 이용료로 수익을 추구하는 민간 투자 사업 방식)나 BTL(민간이 공공시설을 짓고 정부가 이를 임대해서 쓰는 민간 투자 사업 방식) 사업으로 민간 자본이 참여하도록 하면서 수익률을 정부 재정에서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도로와 교량 등 건설 사업이 연구 결과만큼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가와 기업들은 부유한데 다수의 국민은 가난하고, 국민이 가난하니 소비가 원활하지 않아 장기적으로 일본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은 물론, 현재 상태로 지속하기에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과 일본 모두 복지 국가가 해결 방안이다
현재 일본은 자본주의라는 입장에서 봐도 건전한 경제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공공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산업 구조의 변화나 국제 경쟁력의 약화로 본래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 기업들이 존속하는 원인이 되고, 또 한 축에서는 정부 재정 적자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하는 저임금 체계가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 기업을 존속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힘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이들 두 가지는 불식하고 중지해야 한다.
현재 총선을 앞두고 아베 정권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내세우고 있지만, 진정으로 그 정책을 시행할 마음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노동자의 생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불량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지 않고 존속시키는 한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공정한 발전은 어렵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제 한국도 성숙한 자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내수를 확대하고, 각종 보편적 복지를 확충하는 등 사회복지가 제도적으로 충실해져서 국민 생활의 진정한 풍요로움이 충족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은 복지 국가로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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