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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돈을 풀어 미세 먼지를 잡는다면…

[장석준 칼럼] 재벌, 은행이 아닌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

총선 때 새누리당이 "한국형 양적 완화"를 들고 나와 논란이 됐다.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인하하는 것만으로는 경기 회생에 한계가 있으니 산업은행 금융채권(산금채)과 시중 은행 주택담보대출증권(MBS)을 인수하는 통화 완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구조 조정 자금 지원과 가계 부채 경감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한 뒤에도 정부는 이 '한국형 양적 완화' 카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정부는 조선업 불황으로 인한 산업은행 및 수출입은행의 부실 여신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이들 국책 은행에 직접 출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총선이 끝난 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적 완화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사실 정부, 여당이 내놓은 '한국형 양적 완화'만 놓고 보면, 새삼스레 복잡한 토론을 벌일 필요까지는 없다. 한국은행이 구조 조정 자금을 댄다는 것은 조선업 부실 경영의 책임자인 재벌과 정부 경제 부처가 실제 책임을 지는 일은 없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시중 은행들의 주택 담보 대출 부실화를 막는 데 한국은행이 나선다는 것은 은행들 역시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한국은행의 통화 공급으로 이들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한국은행권을 사용하는 국민 모두가 책임을 나눠 갖는다는 의미다. 전형적인, '이윤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는 논리다. 동조해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형' 양적 완화는 그렇다 쳐도 양적 완화 자체는 어떠한가? 양적 완화란 최근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중앙은행이 펼치는 비전통적 통화 정책 중 하나다. 이들 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이 물가 및 금융 시장 안정이라는 전통적 목표를 넘어서 경기 부양에 뛰어들고 있다. 또 이를 위해 금리 조절이라는 통상적 정책 수단 외에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입해 유동성을 공급하는(양적 완화) 등 전에 없던 조치들을 펼치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에는 '이단' 취급을 당했던 이런 비전통적 통화 정책이 지금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새로운 '정통'으로 급부상하는 중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논의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해서 이런 전 세계적인 흐름까지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도 가능하다

마침 과거의 고위 경제 관료 중 한 사람이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발언자는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윤증현 전 장관은 6월 3일 한국은행 주최 강연에서 "한국은행이 지금까지 물가 안정이나 금융 시장 안정에 치중해온 전통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데 머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세계적인 추세로 중앙은행의 역할도 많이 변하고 있"으며 "고용이나 성장에 이르기까지 중앙은행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나오는 외국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확실히 이런 문제에서는 경제학자보다 실무 전문가가 더 과감한 데가 있다. 윤 전 장관의 발언은 정부, 여당이 깔아놓은 궤도를 넘어서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바를 제대로 짚었다. 그것은 최근 여러 나라에서 중앙은행의 발권력이 경제 정책의 중대한 수단 중 하나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금융 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실험의 시대에 진입했다. 과거에는 완전 고용과 성장은 정부 재정 정책의 과제였지 통화 정책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연준(Fed)의 양적 완화를 계기로 중앙은행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의 범위와 강조점이 바뀌었다. 윤 전 정관의 말처럼 "고용과 성장까지" 중앙은행의 정책 목표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라는 담당 주체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추진된 비전통적 통화 정책의 명백한 한계 또한 놓쳐선 안 된다. '한국형 양적 완화'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비전통적 통화 정책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연준이 실시한 세 차례의 양적 완화다. 이는 2008년 위기가 대공황으로 격화되는 것을 막은 핵심 조치였다.

그러나 연준의 채권 매입을 통해 공급된 달러 유동성은 은행 부실은 해결했지만 가계 소득 개선이나 구매력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온통 금융 시장으로 흘러들어가서 거품만 다시 키웠다. 복지 국가 전성기에 재정 정책이 취약 계층의 생활 보장, 부의 재분배, 유효 수요 창출에 기여한 것에 비하면, 통화 정책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맹목(盲目)이다. 아니 맹목을 가장하면서 '부자들의 사회주의(=손실의 사회화)'에 기여한다. 정부, 여당의 '한국형 양적 완화' 안도 바로 이 틀 안에 있다.

지금 세계 경제가 좀처럼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런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긴축 정책을 고집하는 유럽연합은 제쳐두더라도, 미국, 일본은 대규모 양적 완화를 실시했는데도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몇몇 국가는 또 다른 비전통적 통화 정책인 마이너스 금리를 실험하고 있으나 역시 투자는 늘지 않는다.

물론 웬만한 충격으로는 수요가 확대되지 않는 더 근본적인 요인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구축된 경제 구조와 사회 세력 간 균형에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구조 개혁을 뒤엎을 정도의 탈신자유주의 구조 개혁만이 근본 처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구조 개혁('경제 민주화'의 온전한 실현)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 현실 정책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침체에 빠진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단기 정책이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

이 점에서 미국 연준식 양적 완화와는 다른 방식의 비전통적 통화 정책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영국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 대표가 작년 당 대표 경선에서 약속한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People's QE, 진보적 조세 전문가 리처드 머피가 처음 제안했다)'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 안의 골자는 이렇다. 영국은행이 직접 출자해서 국영 투자 은행을 설립한다. 국영 투자 은행은 공공 주택 건설, 에너지 전환, 대중교통 확충, 정보통신 프로젝트 등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추진한다. 이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고용을 늘리면서 미래 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강화한다.

이 구상은 한 마디로 비전통적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장기 침체로 세수가 제약되고 적자 재정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정책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면서 국영 투자 은행을 통해 유동성이 금융 시장이 아닌 생산 활동에 투입되게 한다. 굳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미국 연준식 양적 완화와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물론 '한국형 양적 완화'와도 거리가 멀다.

에너지 전환을 위한 국책 투자 은행

이러한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는 한국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훌륭한 처방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조선업 등 기존 주력 산업은 흔들리는 반면 미래 산업 기반은 극히 취약한 형편이다.

특히 지속 가능한 미래 경제를 뒷받침해야 할 에너지 체계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스웨덴은 이미 태양광 등 재생 가능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은 1~2%를 맴돈다. 포르투갈은 최근 재생 가능 에너지만으로 4일 동안 모든 전력 수요를 충당했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아직도 핵발전소 수명 연장, 미세 먼지 문제로 옥신각신이다. 세계의 시간으로부터 한참 뒤쳐져 있는 것이다.

복지 기반을 갖추는 것만큼이나 이렇게 뒤쳐진 미래 산업 기반을 벌충하는 것도 시급하다. 그런데 정부가 전통적인 재정 정책 방식만 사용해서는 이 둘을 동시에 확충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우선순위를 따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복지 확대와 미래 산업 기반 조성 중 어느 한 쪽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경기가 장기 침체에 빠질수록 재정 압박이 커지면서 복지-산업 정책의 동시 병행이 더욱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전통적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의 융합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복지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증세에 바탕을 두고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재정 정책은 복지 확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대신 미래 산업 기반 조성에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할 수 있다.

가령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 안처럼 한국은행의 출자로 국책 투자 은행을 새로 설립하는 것이다. 기존 산업은행 등과 달리 새 국책 투자 은행은 미래 산업 투자에 집중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는 전면적이고 신속한 에너지 전환일 것이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핵 발전, 화력 발전 대신 재생 가능 에너지 중심 체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 투자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중앙은행이 새로 공급한 유동성은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과 경제 발전 잠재력 강화의 소중한 연료가 될 것이다.

재벌, 은행을 살리기 위한 편법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한국형 양적 완화'이지만, 비전통적 통화 정책의 등장이 여는 가능성의 지평은 이렇게 정부와 새누리당의 시야를 뛰어넘는다. 한국판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가 충분히 가능하고, 또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 여당의 양적 완화 논의 제1라운드를 넘어 진보 세력이 주도하는 제2라운드가 시작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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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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