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확산되면서 현행 제조물책임법을 소비자를 좀 더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옥시' 재발방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제조물책임법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제조물책임법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를 보호하기 위한 취지로 지난 2000년 제정되었지만, 입증 책임의 무게가 피해자 쪽에 실려 있어 '소비자 보호'라는 입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토론회 발제를 맡은 박동진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현 제조물책임법을 피해자의 증명 책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법의 실효성 문제부터 지적했다. 2000년 제정 이후 이 법에 의거해 손해배상을 받는 사건이 매우 드물었다는 것. 박 교수에 따르면, 이 법에 따라 대법원 판결을 받은 사건은 20건이 채 되지 않는다. 박 교수는 "이 법이 정작 피해자 보호에 별 영양가가 없었기 때문에 법 적용이 거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제조물로 피해를 입었을 때 증명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기 때문에 실제 소송에 갔을 때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손해인지 증명하기 어렵다"며 "증거가 제조업체 측에 편재돼 있고 증거를 입수하더라도 내용이 전문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해 증명을 위한 정보를 가해자 측에 요청할 수 있도록 '정보제출명령제도'를 도입하고, 제조업체에서 정보 제공을 거절할 때 해당 제조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다만 블랙컨슈머들의 불법적으로 보상을 요구해 산업계가 휘둘리는 것은 막아야 하므로, 개정 작업 시 양자 간 균형을 맞추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제조물책임법이 개정되면 앞으로 업체가 결함 있는 유해 물질을 만들 때 사전 예방적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날 토론회를 개최한 김관영 의원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이 증명된 2011년 이후 5년이 지났는데도 정부 당국은 피해구제의 짐을 소비자에게 떠넘기기만 하고 있다"며 "'옥시' 사건만 봐도 우리 사회의 법이 소비자에게 합리적이고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제도화되어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며 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토론자 다수는 박 교수의 발제 취지에 공감했다. 오행록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안전정보과장은 "제조물책임법의 실효성 제고를 위한 법 개정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제 개정에 이르지 못했다"며 "사법 체계와 피해자 보호 필요성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로운 안을 만들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했다.
법 개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윤현욱 중소기업중앙회 공제기획실장은 "증명 책임 완화를 통해 사실상 제조업자에게 입증을 전가하는 형태의 입법은 외국에서도 논란이 됐던 사안"이라며 "사고는 곧 제조물 결함이라는 등식이 확산된다면 제품 안전성 확보에 들어가는 추가 비용과 인력 등으로 제조 원가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쳐 중소기업 경영상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완제품에서 사고가 났어도 하청 업체인 중소 기업은 현실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거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책임을 전가 받는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토론회에 참석한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제조물책임법 전면 개정 작업에 착수할 것을 약속했다. 안 대표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며 "20대 국회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주도하겠다"고 말했다.
강찬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대표는 "피해자가 접수를 받고 상담하고 알아서 소송하는 등 피해자가 피해 정도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앞장 서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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