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부러지는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흡사 '셀럽'을 마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 한창 연애할 나이다. 아니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적응하려 발버둥 치는 시기일지도.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평범한 고민이 일종의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의 이름은 최윤아(25). 아직은 세월호 참사고 세상을 떠난 '단원고 2학년 최윤민 양 언니'로 불린다.
"사람들에게 배신을 정말 많이 당한, 사람들에게 버림을 정말 많이 받은, 그런 사람이에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계속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려는 감사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누군가 그 손을 잡아줄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마지막 남은 내 희망 같은 거니까."
1년 전인 2015년 4월 10일 윤아 씨가 <프레시안> 기자를 향해 절규하듯 말했다. 세상에 버림받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살려달라고 아직 손을 내밀고 있다고. 1년이 지난 지금도 그럴까. 세월호 참사 2주기 즈음 그를 다시 만난 이유다. (관련기사 ☞ : "세상 밑바닥 본 1년…아직 손 내밀고 있어요")
근황이 궁금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면서 잘 다니고 있던 직장도 그만둔 윤아 씨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열일곱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동생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세월호 참사를 세상에 알리고자 행동했다.
"얼마 전 취업했어요. 몇 달 됐죠. 왜 다시 다니냐고요? 제가 이 일에 2년 동안 잡혀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은 '좀 더 긴 호흡으로, 장기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일이구나'였어요. 1~2년 안에 끝날 일이 아니더라고요. 어느 정도 경험도 쌓여서 이제는 회사 생활하면서도 활동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오래 쉬면 취직하기 힘들어지겠다는 현실적인 걱정도 들었어요."
"나는 세월호 유가족압니다"
대인기피증까지 겪었던 그다. 사람들 눈조차 맞추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런 그가 회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을까. 그는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세월호 유가족임을 밝혔단다.
"솔직히 말해서 유가족인 게 무척 싫어요. 좋을 리 있을까요? 내 동생이 죽었다는 뜻이고 내가 남겨졌다는 건데…. 그런데 부끄럽거나 창피해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은 아니지 않나요? 날 유가족으로 만든 사람들이 부끄러워해야지…. 그런데 지금 상황이 너무 이상해요. 가해자들은 웃으면서 다니는데, 정작 피해자들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숨어 지내요. 그런 게 너무 싫어요. 왜 그래야 하죠? 그래서 당당히 나는 유가족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세월호 유가족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슬퍼하는 존재', '아파하는 존재'로 한정된 게 사실이다. 오죽하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담배를 태우고 술 마시는 것에도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까지 나올까. 윤아 씨는 그런 인식이 싫고 그런 인식에서 당당해지고 싶단다. 그래서 사람들의 작은 인식 변화라도 만들고 싶어 했다.
오히려 자신이 유가족임을 밝히고 나니 더 편한 것도 있다고 한다. 자기 스스로 옭아매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물론, 지금도 행동은 조심해요. 내 행동으로 세월호 유가족들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되니깐요. 언론에서 꼬투리 잡으면 어떡해요. 술 마실 때도 취할 때까지는 마시지 않아요. 한창 술 마실 나이인데 말이죠.(웃음)"
동생 윤민이와 함께 간 제주도
여전히 세월호 참사를 알리기 위해 활동을 하는 윤아 씨다. 최근에는 세월호 2주기 즈음인지라 인터뷰나 행사 참여 요청 등이 많이 들어온다. 지난 2일에는 제주도를 다녀왔다. 세월호참사대응제주대책위원회가 14~24살 제주 청소년을 대상으로 여는 토크콘서트 '하이 헬로 하와유(Hi Hello How are you)'에 참석했다. 윤아 씨 이외에도 다른 세월호 형제자매들도 함께 했다.
처음에는 이 행사에 참석하기를 저어했다. 동생 윤민 양이 가려다 못 간 제주도였다. 다녀 온 뒤 마음이 힘들 거 같았다.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돌렸다. 윤민 양이 눈에 밟혔다.
"제 동생(윤민이의 둘째 언니)이 그러더라고요. 세월호 생존자 아이들이 바다에 빠진 친구들의 영정을 들고 제주도로 수학여행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고. 그것을 보고 '우리 윤민이도 한 번 데리고 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나는 싫지만 윤민이에게는 한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제주도로 갔어요. 윤민이와 함께."
윤아 씨가 제주도에 가지고 간 건 윤민 양의 학생증. 윤민 양은 수학여행을 간다며 집을 나선 지 8일 만인 4월23일 아침 윤아 씨 품으로 돌아왔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발톱에 칠한 분홍색 바탕에 흰 꽃 매니큐어는 그대로였다. 윤민 양의 목에는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 붙여진 학생증이 걸려 있었다. 윤아 씨는 윤민 양과 함께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그 학생증을 들고 제주도로 향했다. 그러면 동생 한이 풀리지 않을까.
"아프다고 말하지 못했던 게 가장 힘들었어요"
윤아 씨는 동생 생각이 나면 그림을 그린다. 이미 언론 등에 여러 차례 보도되기도 했다. 작년 11월28일부터 12월 5일까지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잊지 말아요'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고 박예슬 양을 비롯해 화가 박문찬 씨, 안신영 씨 등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의 그림은 뉴욕만이 아니라 시카고에서도 전시됐다.
그림은 참사 이후 힘들어서 그리기 시작했다. 동생을 잃은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부모님도, 남은 동생도 모두 똑같은 상처가 있었다. 혼자서만 상처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답답하고 힘든 나날의 반복이었다. 사람들이 무서웠다. 정 견디기 힘들면 이불 속에 숨어 울었다.
'그림'은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윤아 씨가 겨우 자신의 마음을 털어내는 '공간'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동생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은 늘 밝은색이었지만, 자기가 등장하는 그림에는 늘 어둡고 우울한 색이 사용됐다. 자기를 '상처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이 그림에 구현된 셈이다. 그래도 동생은 밝은 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랐나 보다.
사실 세월호 이후 힘들지 않은 척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부모님이 걱정하니 내가 더 잘해야지, 걱정 안 하게 괜찮은 척해야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다.
"티를 못 냈어요. 부모님이 아파하실까 봐. 가뜩이나 동생 때문에 아파하는 부모님들이니깐요. 그런데 저도 힘들었거든요. 참사 이후 무척 많이 울었어요. 밤에 자기 전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죠. 둘째 동생은 반면에 강했어요. 사고 이후에도 울지 않았죠. 하지만 나중에 알았어요. 내가 울기 바빠 동생이 울고 있는지 몰랐던 거였어요. 나중에 이야기하더라고요. 부모님과 저에게 들키지 않고 울려고 화장실 샤워기를 틀어놓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그러니 저나 우리 엄마는 모를 수밖에 없죠."
"왜 가해자는 늘 모르쇠로 일관할까요?"
하지만 그런 그도 가끔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고 했다. 지난 3월 말 진행된 세월호 특별진상조사위원회의 청문회 때가 그랬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했던가. 회사가 한창 바쁠 때인지라 출근했지만 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가 그의 몸에 '이상'을 만들었다. 두통, 복통, 그리고 피부병까지 다양하게 이상이 왔다. 병원에도 갔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저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말과 진통제만 줄 뿐이다. 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나마 고통이 완화되지만 이내 다시 아프다. 몸이 아픈 것도, 약을 먹고 진정되는 것도 일시적인 일이 됐다. 언제부턴가는 병원을 가지 않게 됐다.
그런 윤아 씨가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왜 가해자가 보호를 받아야 하는가'. 2차 청문회에 출석한 김한식 청해진 해운 사장 등 증인 14명 중 5명은 비공개 증언을 신청, 가림막 안에서 증언했다. 이들은 세월호 과적에 대해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부터 화물 고박을 담당했던 우련통운 관계자, 세월호 인양 관련, 해양수산부 관계자 등이다. 증인이라고는 하지만 윤아 씨가 보기에는 '가해자'다.
"여전히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해자는 늘 '몰라요. 기억 안 나요' 이럴까요. 그리고 그렇게 대답하면 끝이에요. 더 묻지도 않아요. 하지만 피해자는 '니가 이런 짓을 했잖아. 니가 지시했잖아' 이렇게 하나하나 지적하고 밝혀야 해요. 이상하지 않나요? 가해자는 모른다고 하면 끝이고 피해자는 그런 가해자들의 범죄사실을 밝혀내야 해요.
그리고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은 피해자인데 거꾸로 가해자를 보호해요. 이번 청문회에서 가해자 얼굴이 나왔나요? 이미 얼굴이 알려진 이준석 선장의 얼굴은 나왔지만, 나머지는 거의 안 알려졌어요. 하지만 우리 유가족들은 어떤가요? 모두 나와요. 가해자 보호는 엄청 신경 쓰지만 피해자 보호는 신경도 쓰지 않죠.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피해자는 아프고 힘든 존재인데, 여기에다가 그 피해를 증명하라고 해요."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잔인한 속담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단다.
여전히 세상을 향해 손 내밀고 있는 윤아 씨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무척이나 단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단단해질 듯했다. 상처가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앞으로도 더욱 단단해질 듯하다'고 기자가 이야기하자 윤아 씨는 화를 냈다. 더는 단단해지기 싫단다. 단단해진다는 의미는 더 두드려 맞아야 한다는 의미 아니냐는 날선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기자가 말한 대로 앞으로 더욱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듯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도 문제가 많아요. 6월이면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중단하려 별별 짓을 다 하지 않겠어요? 8월께 세월호가 인양되면 또다시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겠죠. 쉴 새 없이 쏟아질 거 같아요. 그런 가운데 저는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 해요. 마음도 단단히 먹어야 해요.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저도 지금보다 더 단단해지겠죠?"
하지만 굴하지 않고 윤아 씨는 앞으로도 그런 세상을 지켜보겠단다. 4.13 총선에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지난 9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2주기 '약속콘서트'에도 참석했다. (관련기사 ☞ : "4.13 투표는 못 돌아온 아이들 꺼내주는 일")
"제가 겪는 트라우마는 '거짓말'입니다. 내가 믿는 사람일수록 작은 거짓말에 속았다고 느끼면 발작하듯이 화를 냅니다. 이게 정말 단순히 동생을 잃은 사고 때문에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일까요. 1년 전 시청광장에서 울면서 살려달라고, 이 나라에서 숨 쉴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내게 잊지 않겠다고, 행동하겠다고, 이 나쁜 나라를 바꾸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저에게, 부모님에게, 자기 자신에게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2년 전 그날과, 아니 1년 전 그때와 무엇이 바뀌었나요. 바뀌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서서 아직도 살려달라고 외쳐야 하나요?"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니 어쩔 수 없다면서 가만히 있는 것은 비겁하단다. 윤아 씨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내민 손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