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왜 유신 쿠데타 후 한동안 눈에 띄는 저항을 찾아보기 어려웠는지, 그리고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도 저항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진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동안 부문별로 살폈다. 1971년 말쯤 되면 학생, 언론 등 여러 세력이 유신 쿠데타 같은 것을 비판하거나 그것에 저항할 힘을 갖기 어려운 상태에 접어들었고 그만큼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다른 나라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탱크까지 몰고 나온 무장한 군대에 맞서 바로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에 더해, 유신 쿠데타 당시 상황 및 유신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 더 생각해볼 만한 사안으로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한국에선 일제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됐다. 특히 유신 체제는 일제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국주의 파시즘이 한국형으로 출현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1930년대 이후 군국주의 파시즘 내지 천황제 파시즘에 의해 그 사회가 지배받지만,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에는 일본 사회 자체를 그렇게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고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쨌건 지켜지지 않나.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군국주의 파시즘 같은 분위기가 해방 후에도 계속 조성되고 있었다. 그것이 적극적인 운동의 형태로 나타난 적은 없지만, 그런 것들에 젖어 있는 세력이나 개인이 있었다. 그러면서 박정희처럼 특수한 군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 결국 유신 체제를 만들게 된다. 그 결과 군국주의 파시즘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에 나타나버리는, 즉 일제 잔재를 가장 철저하게 청산해야 할 나라가 오히려 일제 유산을 제일 극단적인 형태로 실현하는, 한국형이라고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그걸 실현하는 아이로니컬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한 일제 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던 부문은 군부라고 볼 수 있다. 군부의 대종은 육군인데, 한때 육군이 자신들의 연원을 군사영어학교에 둔 적이 있었다. 군사영어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거의 다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름도 군사영어학교이고 그 출신들이 대부분 친일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어서 육군의 연원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국방경비대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참모총장을 살펴봐도, 1960년대 후반까지 역대 육군 참모총장 중에서 일본군이나 만주군 경력이 없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장성을 비롯한 군 장교들의 다수가 '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 이런 생각을 상당히 갖고 있었다. 또한 이 사람들에게는 극우 반공주의가 아주 철저히 배어 있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맞다. 옳다'고 많은 군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반공주의만은 철저히 견지한 사람이 군인들 가운데 많았다. 김형욱도 그렇지 않았나. 이 사람들은 해방 후 순식간에, 놀랍게도 친미로 대부분 변신은 했지만 파시즘 성향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었으니,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것에 저항감을 갖기가 어렵지 않았겠나.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걸 이어받았다고 하고 있다, 이 말이다. 그러면 우리 군은 최소한 광복군을 이어받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대한제국에서 만든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신흥무관학교가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이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그 맥을 이어받았다고 육군이 주장하면 참 좋지 않겠나. 그런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데,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이 군 수뇌부에 많았던 1960년대 같은 때에는 더 심하지 않았겠나. 물론 그중에는 민주주의자도, 일부이지만 분명히 있었다. 예를 들면, 이번 인터뷰 초반에 이야기한 한신, 1971년 대선 때 장병들에게 공정한 투표를 보장했다가 나중에 참모총장이 되지 못한 그 사람도 그렇게 봐야 하지 않겠나.
일제 유산이 군부에 제일 많이 남아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미군의 역할을 생각할 수 있다. 해방 후 미군이 우리나라 군부를 키우지 않았나. 미국 없는 한국 군부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미군들은 자신들이 비교적 다루기 쉬운,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젊은 사람들을 아주 좋아했다. 미군이 보기에 광복군 출신들은 뻣뻣하고 자신들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이 말이다. 그런데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변신을 잘했다. 이 사람들은 미국 말도 잘 듣고 미국 문화에도 쉽게 적응했다. 그런 점이 하나 있었고,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을 시행할 때 군부만은 성역이 돼버린 점도 작용했다. 당시 총참모장이던 채병덕이 '군부에는 반민법이 적용될 수 없다'는 식으로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그래서 반민법을 시행할 때 악질 친일 경찰 등이 살아남기 위해 군부로 많이 들어가는 걸 볼 수 있다. 많은 친일파가 군부에 들어가 있었는데도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군부에 일제 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다른 관공서, 경찰도 일제 유산이 아주 많이 남아 있던 곳이지만 군부가 더 그랬다.
유신 체제는 일제 유산을 바탕으로 출현한 한국형 군국주의 파시즘
프레시안 : 다른 부문은 어떠했나. 특히 일제의 유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경찰 아닌가.
서중석 : 경찰의 경우 간부급들이 1960년대에 와서 거의 다 바뀐다. 나이 때문에 친일 경찰들이 남아 있기 어려웠다. 그러나 경찰 역시 그 성향이나 생리로 인해 일제의 유산을 다분히, 계속 갖고 있었다.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쪽에 익숙하지 않았다.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그 명을 잘 들을 수 있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관공리도 대체로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지 않았나. 물론 1960년대 장면 정부 때부터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새롭게 관공리로 많이 들어간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상층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형성된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면, 유신 체제에 관공리가 저항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문화 예술인들 중에도 권력을 추종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문학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많이 그랬다. 진짜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주로 활동한 신동엽, 김수영 같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소수에 속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문화 예술인들이 큰 역할을 하지 않나. 그런데 문화 예술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순수 예술을 주장한 사람들은 유신 체제에 저항하려는 면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 사람들도 한국형 파시즘이라고 할까, 군국주의 파시즘의 한 유형인 유신 체제를 비판하거나 그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오히려 그걸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랬다.
정치인을 살펴보면 여당이건 야당이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진 소수가 있긴 했으나,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소수였다고 볼 수 있다. 야당 정치인들은 다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야당 의원들은 분위기에 따라서 야당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는 상관없이 그랬다. 그런 정치가들도 꽤 있었다. 정상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상이 그랬다. 오늘날의 야당 의원들하고도 굉장히 차이가 난다. 1970년대까지 야당 의원들을 보면, 물론 그중에는 맞서 싸운 사람도 일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아주 보수적이었다.
재벌이나 기업인들은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신 체제가 노동 운동 같은 걸 적극 억압하고, 자기들한테는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지 않았나. 그런 점 때문에도 재벌이나 기업인들은 광고 같은 걸 통해 10.17쿠데타를 지지하는 분명한 세력으로, 반공 어용 단체라고 불리는 단체들과 함께 등장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 사람들이 유신 체제에 대한 정말 확고한 지지층이었다고 보기도 좀 애매한 면이 있다.
4.19 관계자들조차 일부는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데 나서고 그랬다. 혁신계에서도 소수이긴 하지만 '통일을 위해 유신 체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던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유신 체제 같은 걸 용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초기에는 가졌던 것 같다.
대중은 유신 체제에 어떻게 반응했나
프레시안 : 당시 대중의 다수는 어떤 상태였다고 볼 수 있을까.
서중석 : 사실 195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60∼1970년대만 하더라도 지식인을 포함해 상당수의 한국인이 식민 사관이나 군국주의 파시즘 또는 봉건적인 낡은 의식, 이건 일제 때하고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어쨌건 그런 봉건적인 낡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꽤 많았다. '한국인에겐 독재를 하는 게 맞다', 이런 생각은 식민 사관, 군국주의 파시즘에 내장된 건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꽤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까지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소시민층 또는 사회 불만층 중에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처럼 운동 차원에서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군국주의 파시즘을 수동적으로 환영하거나 묵종하는 면이 부분적으로 좀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건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을 전면에 내세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같은 이름이 붙은 것도 한국 사회의 그런 특징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 운동을 벌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면서 수동적으로 묵종하거나 수동적으로 환영도 하는 것이 존재했다. 이 사람들은 그러다가도 상황이 바뀌거나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 '박정희가 너무 잘못하는 것 아냐?' 하면서 언제든 유신 체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거나 유신 체제와 거리를 두는 면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파시즘적 경향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은 독재에 딱 맞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술집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박정희나 유신 체제를 항상 지지한 건 아니었다. 이게 상당히 미묘한 것들이긴 한데,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수동적 환영, 묵종을 이야기했다. 이는 해방 공간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보여준 역동성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된 것인가.
서중석 : 해방 직후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1948년 5.10선거, 1950년 5.30선거만 보더라도 상당히 잘 치른 선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이승만 정권이 빨갱이몰이를 참 많이 하지 않았나. 많은 연구자가 1948년 여순사건을 전후한 때부터 그런 빨갱이몰이가 심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극우 반공주의에 순응하거나 그게 옳다고 보는 사람은 당시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승만 지지 세력이라는 건 제한돼 있었다, 이 말이다. 5.30선거를 가지고도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또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거치며 대규모 주민 집단 학살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그리고 빨갱이몰이가 1948년과 1949년에 심하게 이뤄지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등 아주 강력한 억압 정책이 나타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그런 속에서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 의식을 제대로 갖기는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1971년 대선과 총선 같은 걸 보면 또 유권자 의식을 분명히 보여주는 면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유신 쿠데타 같은 강풍이 불면 고개 숙이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 함석헌 같은 분은 1950년대부터 이미 '체념이 한국인의 민족성처럼 됐다'며 체념, 묵종 같은 걸 아주 강하게 비판했다. 조봉암 같은 사람도 '골방에 들어앉아서 지식인들이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잘못된 권력을 수수방관하거나 그것에 묵종하고 있다', 이런 비판을 했다.
해방으로 한국 사회는 혁명적 변화, 엄청난 변화, 그야말로 유사 이래 최대의 변화를 맞이했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쟁취했다. 그런데 이건 철저하게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해방과 함께 저절로 온 면이 상당 부분 있었다. 그러다보니까 민주주의가 체화, 내면화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민 혁명을 철저하게 겪지 못한 채 시민 혁명의 부수적 효과를 많이 갖게 된 상태에서 친일 세력이 강고하게 자리 잡아 친일파 정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가 되고 그런 속에서 유신 체제까지 등장하니까, 그것에 대해 강한 민주주의 의식을 보여준다는 건 쉽지 않았다.
프레시안 : 박정희 쪽은 특정 지역의 지지를 발판으로 해서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고 전에 이야기했다. 지역 간 격차를 더 크게 만들고 갈등을 부추기는 통치 전략도 사회 전반의 민주주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는 걸 가로막은 요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유신 체제는 지역 분할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군이나 검찰, 경찰이나 내무부, 재무부, 경제기획원, 중앙정보부 같은 주요 기관, 그리고 국영 기업체에 있던 사람들을 포함한 엘리트층을 보면 특정 지역 사람들이 이런 곳들의 간부나 요직, 일반 직원으로 취직을 많이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정 지역이 다른 지역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모습은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농민들의 경우 1970년대에 들어가면 비료 같은 문제는 점차 해결되지만, 별것 아닌 것이라 하더라도 특정 지역 농민들이 다른 지역 농민들에 비해 혜택을 받는 게 좀 있었다. 도로를 만든다거나 조그만 공장을 세우는 것 같은 데서도 아무래도 다른 지역보다 우선해서 되는 게 있었다. 그러면서 특정 지역 주민들이 다른 지역 주민들에 비해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면이 일정하게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공화당이나 친여 세력에서도 유신 체제에 협력하지 않은, 유신 체제가 되니까 빠져나간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다시 말해 유신 체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자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적극적인 지지 세력으로 경찰, 관공리, 재벌, 기업인 등을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새마을운동 쪽도 생각해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 중앙 간부야 권력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리, 동, 면 간부들은 뭘 받는다고 해도 푼돈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아주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하고 유신 체제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새마을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일시적으로 그렇게 지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후 지금까지 굳건하게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 예컨대 부녀회 같은 데서 활동한 여성들이나 리, 마을 단위에서 새마을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대만, 스페인 등 다른 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한국에서는 반유신 투쟁, 전두환 신군부 반대 투쟁이 민주화 운동으로 아주 강렬하게 전개됐다는 점이다. 이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한국에서 가장 강한 형태로 나타난 현상이다.
유신 쿠데타 저지할 수 있었던 건 미국뿐?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프레시안 :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국내의 여러 세력이 유신 쿠데타에 맞서기 어려운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유신 쿠데타를 저지할 힘을 지닌 건 미국 아니었느냐며 이 시기 미국의 역할에 눈을 돌리는 시각도 있다.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유신 체제를 반대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미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일각에 있다. 그런데도 미국이 유신 체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은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통고도 쿠데타 전날에야 받았지만, 일부에서 '미국이 유신 체제를 강하게 반대하거나 저지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이 시기에 미국은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돼 있었다. 그런 주장은 미국을 과대하게 평가한 것이다.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61년 5.16쿠데타 시기라면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이것 안 되겠다'고 판단했을 경우 아마도 간단하게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 진압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더라도, 예컨대 미국 측에서 '5.16쿠데타는 우리 미국의 이해관계와 정면충돌한다'고 봤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국에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그 후 박정희는 미국의 작전권에 속하지 않고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갖는 군대를 확보해갔다. 미국의 작전권에서 빼냈다고 볼 수 있다. 수경사는 5.16쿠데타 이후 새로 조직된 부대인데, 미군의 작전권 대상에 안 들어가 있었다. 특전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군 요직이 박정희에 대한 절대 충성파로 채워져 있었다. 서부 전선에 있던 사단장급 이상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군을 동원해 10.17쿠데타를 저지한다? 그렇게 하기가 아주 어렵게 돼 있었다. 5.16쿠데타가 날 때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수경사는 본래 1949년 6월 창설됐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수도 사단에 편입됐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1961년 6월 1일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가 창설된다. 5.16쿠데타 직후인 이때 수방사가 만들어진 건 쿠데타 세력과 미군이 벌인 협상의 산물이었다. 서울을 확고히 방어할 부대가 없던 틈새를 노려 권력을 잡은 쿠데타 세력에겐 자신들을 보호할 새로운 부대가 필요했고, 쿠데타 세력의 자의적인 군대 동원으로 작전권을 침해당한 미군은 작전권 회복을 원하는 상황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미군의 작전권 회복에 동의하고, 그 반대급부로 미군의 작전권에 포함되지 않는 부대인 수방사 창설을 얻어냈다. 1963년 수경사로 이름을 바꾼 수방사는 1984년 증·창설하며 수방사로 다시 이름을 바꾼다. <편집자>)
박정희에게 맞서는 군사 행동을 미국이 사주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박정희가 쿠데타 방지에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철저하게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그래서 설령 일부 군대가 박정희에게 맞서 들고일어난다 하더라도 쿠데타 군대가 과연 청와대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청와대를 쿠데타군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아주 철저하게 취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 미국이 적극적인 개입 쪽으로 방침을 정했을 경우 군사적 수단 이외의 방안도 활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반론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미국이 손을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면 그건 경제적 제재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사실 5.16쿠데타 후 미국은 경제적 무기를 많이 활용했다. 예컨대 1963년 2월 18일 민정 불참을 선언하고 2월 27일에는 국민 앞에서 엄숙히 선서했던 박정희가 3월 16일 군정 연장 쪽으로 방향을 확 틀었을 때, 그걸 정면으로 가로막고 제압한 건 미국의 경제적 제재였다. 특히 식량 같은 걸 활용해 군사 정권에 압력을 넣었는데, 박정희 세력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압력이었다. 물론 밀가루 선거로 불리는 1963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는 미국이 밀가루를 넘겨주며 박정희 쪽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어쨌건 군사 정권 때나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그래도 미국의 경제적 제재가 먹혀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때쯤에는 식량 사정이 호전됐고, 통일벼가 보급되고 하면서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식량 자급을 하게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더군다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베트남전쟁의 영향이기도 한데,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71년 12월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달러화를 공식 평가 절하한다는 발표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것들 때문에도 한국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한다는 건 아주 힘들었다. 물론 꼭 하겠다고 한다면 수단이야 있었겠지만, 그렇게까지 큰마음을 먹고 할 필요가 뭐가 있었겠나. 예컨대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든가 하는, 다시 말해 쿠바에 대해 쓰던 그런 정책을 쓴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미국이 큰 칼을 빼들었을 때에야 가능한 것 아니겠나.
월남전을 수행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 반전 운동이 아주 격화되지 않았나. 그 때문에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유신 쿠데타가 나기 6개월 전인 1972년 4월, 월맹군이 쾅트리성 신방위선을 돌파했다. 또한 1972년 4월을 전후한 시기에 미국의 100개 대학에서 반전 데모를 했다. 결국 미국은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고, 조금이라도 한국군이 늦게 철수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1969년 4월 3일 시점에 월남전에서 죽은 미군이 3만3641명으로 한국전쟁에서 죽은 3만3629명, 이 수치는 통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하여튼 이것을 넘어섰다. 그에 더해 1973년 11월에는 전쟁 선포, 미군의 해외 파병 및 철군에 관해 대통령이 갖고 있던 권한을 의회가 확보하는 법안(전쟁권한법 또는 전쟁수행법, War Powers Act)을 미국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의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해외에서 미군의 전투 행위를 60일 이내에 정지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 그 골자였다. 미국 상하 양원에서 통과시킨 이 법에 대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상하 양원이 다시 가결해 정식으로 발효시켜버렸다. 이 무렵 미국은 이런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도 박정희 정부에 압력을 강하게 넣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닉슨 대통령의 경우 박정희와 갈등을 빚어 중국이나 북한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은 중국과 소련에 대한 전초 기지였고, 주한 미군은 소련과 중국을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는 군대라고 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와 표면적인 갈등을 심하게 노정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서중석 : 닉슨을 말할 때 대국주의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좋게 말하면 전략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미국과 중국의 화해 정책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를 그렇게 중시하지는 않았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돼야 한다고 닉슨이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 뭔가가 없다, 이 말이다.
사실 미국은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할 때도 과연 얼마만큼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졌느냐, 이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는 5.16쿠데타에서도 나타나지 않나. 또 10.26 이후 1980년 봄에 미국이 보인 태도를 보더라도 과연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1980년 '서울의 봄' 그 시점에서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느냐, 이런 걸 물어볼 수 있다.
거기다가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압승했지만 몇 달 후 워터게이트 사건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지 않나. 1973년 5월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할 특별 검찰관이 지명되고 상원에서 청문회가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수렁 속에 빠져든 사람이 굉장히 미묘한 점이 많은 한국 문제에 개입할 수 있었겠나. 그러니까 유신 체제를 내버려둔 것이다. 그런 상태로 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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