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그동안 유신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사법부, 정치권, 군부의 상황을 짚었다. 이 시기에 언론은 어떠했나.
서중석 : 언론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국회, 정부, 사법부에 이어 제4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만큼 언론의 힘이라는 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디나 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언론이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중요한 일을 많이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제 치하에서는 한국인들이 어떤 조직적인 활동을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태 아니었나. 여러 단체를 만들기는 했지만, 제약이 워낙 심해서 그런 단체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신간회건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이건 노총(조선노동총동맹)이건 농총(조선농민총동맹)이건 근우회건 그랬다. 언론은 그것과 상황이 조금 달랐다. 언론에 대해서도 몰수를 한다든가 정간 조치를 한다든가 하는 건 있었지만, 그래도 언론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매일 신문을 찍어내는 데 아니었나. 또 그걸 위해 기자들이 뛰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일정한 사회적 활동을 끊임없이 하는 단체였을 뿐만 아니라 계몽적인 역할도 하고 해서 언론은 일제 때 상당한 사회적 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언론의 사회적 힘과 영향력은 기본적으로 제한된 것이긴 했다.
해방됐을 때 한민당은 <동아일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안재홍의 국민당은 방응모 쪽한테 넘어가기 이전에 <조선일보>에서 활약했던 팀들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처럼 해방 직후 우익의 양대 정당은 다 언론을 기반으로 했다. 그건 그만큼 일제 때 한국인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기반이 몇 개 안됐다는 걸 이야기해준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4월혁명에서도 언론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4월혁명의 주역은 학생이라고 하지만, 이때 언론과 미국이 중립을 지킨 군과 더불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언론의 역할을 학생들 다음으로 많이 평가해줬다. 그뿐만 아니라 장면 정권을 붕괴시킨 건 1961년 5.16 군부 쿠데타지만, 사실 그전에 언론한테 참 많이 두들겨 맞았다. 장면 정권 계통이라고 볼 수 있는 <경향신문>, 천주교 쪽이던 이 신문도 장면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KBS와 <서울신문> 같은 데조차도 장면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언론 자유가 제일 많았던 시대라고 이야기되는 때 아닌가. 권력을 직접 뺏은 건 총을 든 군인들이었지만, 언론이 그와 같이 두들겨 팬 것도 장면 정권이 무너지는 데 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언론은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가 무너지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제대로 쓰면 끌려가는 필화 사건 양산한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자유를 누리던 언론은 5.16쿠데타 후 된서리를 맞지 않나.
서중석 : 박정희는 권력 문제에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언론에 대해서는 5.16쿠데타 권력이 때려잡는다고 할까, 대대적인 정비를 했다. 다큐멘터리 작가 김교식이 쓴 글을 보면 박정희는 언론에 대해 이중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면모를 보인 것으로 돼 있다. 뉴스, 사설, 칼럼, 가십 같은 걸 샅샅이 읽으면서도 신문 기자들이나 신문은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가십란은 정치인들을 싸움 붙이기 알맞은 것, 기자들은 별 사건이 아닌데도 늘리고 늘려 요란스럽게 지면을 꾸미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봤고 그래서 집권 18년 동안 국내외 공식 기자 회견을 별로 안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기자들만의 비공식 회견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출입 기자들을 상대로 공식 기자 회견을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그 때문에 출입 기자들이 대통령 보기도 힘들어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청와대의 동정도 기자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김교식은 썼다. 김교식은 박정희만큼 기자를 기피한 사람도 없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선글라스 아닌가. 박정희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데, 박정희는 5.16쿠데타 전에도 선글라스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쿠데타를 일으킨 후 찍은 유명한 사진, 좌우에 박종규와 차지철이 있는 그 사진에도 선글라스를 쓴 모습으로 등장한다. 군대 시절에도 어디서나 선글라스를 많이 썼고 외국에 갈 때도, 심지어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같은 미국의 최고 지도자들을 만날 때도 선글라스를 끼어서 화제가 됐다. 외국에서는 그런 게 아주 드문 일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선글라스를 끼었다.
이런 걸 언론계에 대한 태도와 연관을 지어서 생각해볼 부분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세상에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아니었겠나. 자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를 세상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모습이 지나칠 정도의 선글라스 착용에 담겨 있었고, 그건 언론계를 기피한 것과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언론이 완전무결한 적은 없었지만, 입에 쓴 약이 병에는 좋다는 말처럼 언론의 쓴소리를 정치 권력이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는 건 민주주의의 상식이다. 그렇지만 박정희 집권 18년을 살펴보면, 언론이 건네는 쓴 약을 거부하는 수준을 넘어 쓴소리 자체를 못하게 하려 한 때가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래서 필화 사건이 박정희 정권 때 참 많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1964년, 1965년 이후 언론이 거듭 탄압을 받아 유신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는 언론이 쓴소리를 한마디도 못하고 오히려 지면만 보면 유신 쿠데타를 크게 지지하는 것처럼 비치는 식으로 보도가 나가게 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1964년 이전의 필화 사건을 한두 가지 살펴보면, 1961년 6월 19일 <민국일보> 정치부장 조세형이 연행됐다. 이 사람은 나중에 유명한 정치인이 되는데, 언론인 출신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연행·구속됐느냐. '혁명 공약' 6항이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이렇게 돼 있었는데 이것이 슬그머니 빠지고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로 돼 있더라, 이것이다. 그걸 보도했다가 구속돼 그해 7월 20일 풀려난다. 박정희 등 5.16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이 이 '혁명 공약' 6항을 넣었다가, 실제로는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슬그머니 한때 뺐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무렵 윤보선 대통령의 기자 회견과 관련된 필화 사건도 발생했다. 5.16쿠데타 후 얼마 안 지난 때인 1961년 6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자 회견을 했다.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넘겨야 한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고려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동아일보>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라는 제목으로 이걸 1면에 보도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한민당 사람으로 <동아일보>와 아주 가까운 사이 아니었나. 또 대통령이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검열을 안 받고 이게 신문에 실렸다고 한다. 그러자 발끈한 5.16쿠데타 세력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 차장 그리고 이만섭 기자를 비롯한 정치부 기자 등을 연행했다. 기사를 쓴 이만섭은 구속됐다.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 유동준까지 최고회의에 끌려갔다고 한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정권을 빨리 이양하라는 말의 진의가 무엇이냐고 청와대 비서관에게 추궁하면서,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한 혁명인데 누구에게 함부로 정권을 내주라고 한다는 말인가"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1964년에도 언론에 대한 공격이 거듭됐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관련된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양헌 판사가 기각하자, 5월 21일 새벽 군인들이 카빈총, 권총을 휴대하고 법원에 난입했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다음 달인 6월 3일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그 직후인 6월 6일 새벽 제1공수특전단 최문영 대령 등 7명의 장교가 이번에는 동아일보사에 난입했다. <동아일보> 기사가 맘에 안 든다며 편집국에 무단 침입해 당직자들을 협박했다. 이게 유명한 <동아일보> 난입 사건이다. 이에 더해, 이 시기에 '앵무새 사건'이라는 것도 일어난다. '앵무새'는 정부 비판과 풍자로 인기를 끈 <동아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이었는데, 최창봉 <동아방송> 부장 등 6명이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송치됐다. 이처럼 언론에 대한 위협이 계속됐는데, 당시 언론인들에 대한 권력 쪽의 대책이라고 할까, 대처 방안이 몇 가지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폭행, 협박에 더해 폭발물 테러까지…언론인 겨냥한 백색 테러 난무
프레시안 : 어떤 것들이 있었나.
서중석 : 그중 하나는 테러로 언론인들을 직접 협박하는 것이었다. 1965년부터 언론인들은 연행, 구속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테러까지 당했다. 예컨대 1965년 9월 7일 자정 무렵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 대리 집 대문이 폭파됐고, 한 시간쯤 후에는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이 괴한 네 명한테 끌려가 폭행을 당한 후 유기되는 일이 일어났다. 언론인이 아니라 정치인이긴 했지만, 9월 8일 자정 무렵에는 민중당 간부인 유옥우의 집 근처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그래서 유옥우 집의 벽 일부와 문짝들이 부서지고 유리창들이 산산조각 나는 등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 집에 있던 유옥우의 딸들과 식모가 겁에 질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떠는 일도 일어났다. 이렇게 테러 및 폭발 사건이 연이어 3건이나 일어났지만 진범도, 그 배후도 규명되지 않았다. (유옥우는 신민당 의원이던 1971년 11월 13일 괴한들에게 습격·폭행을 당하는 일도 겪는다. 참고로 유옥우는 배우 유지태의 할아버지다. <편집자>)
그러면서 이듬해에도 테러가 계속 일어났다. 1966년 4월 <동아일보> 최영철 기자가 박정희를 비판하는 '소신은 만능인가?'라는 기사를 썼다가 자택에서 가까운 골목에서 괴한들한테 테러를 당했다. 그다음 날 새벽에는 "최영철 펜대 조심하라. 너의 생명을 노린다. 구국특공단장", 이렇게 적힌 협박장이 집에 날아들었다. 5월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앞으로 '최영철을 퇴직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 일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박장이 왔다.
(<경향신문> 1966년 5월 14일 자에 따르면, 이 협박장에는 "충고한다. 최 기자를 즉각 파면시켜라. 이 일을 어길 때는 당신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 서대문 허"라고 적혀 있었다. 그와 함께 뒷면에도 "화랑동지회장 박, 우리를 밀어주는 이가 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고 순순히 우리 명령에 복종하라"고 협박하는 문구가 담겨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 시기에 박정희를 비판했다가 핍박을 당한 최영철 기자는 유신 쿠데타 이후 유정회 의원으로 변모한다. 1961년 윤보선 대통령의 '조속한 민정 이양 촉구' 발언을 기사로 썼다가 고초를 겪었던 기자들 중 이만섭은 1963년 공화당 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이고, 이진희는 유신 쿠데타 후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에 들어간 것과 묘하게 닮은꼴이다. 이진희는 1980년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예찬하는 대담을 내보내 물의를 빚은 바로 그 MBC 사장 이진희다. <편집자>)
6월 9일에는 유명한 박한상 의원 폭행 사건이 일어난다. 박한상은 민권 변호를 맡이 했던 변호사 출신 의원이었는데, 이날 자택 앞길에서 괴한 2명에게 폭행을 당했다. 7월 20일에는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권오기가 괴한들한테 테러를 당했다. 12월에는 <강원일보> 기자가 군복을 입은 괴한한테 납치당했다. 이런 식으로 여러 형태의 테러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1967년에도 <호남매일신문> 기자가 폭행당하고 <강원일보> 사회부장의 집에 괴한이 침입하고 <조선일보> 정치부장 남재희 등 4명의 기자가 수사 기관에 47시간이나 억류를 당하는 등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처럼 테러, 구속, 연행 같은 것으로 직접 공포감을 심어주고 그걸 통해 언론인들, 기자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방법이 있었다.
프레시안 : 테러, 구속, 연행 이외에 어떤 방법을 썼나.
서중석 : 야당지를 그 소유주로부터 뺏어버리는 일도 했다. 5.16쿠데타가 날 때 쿠데타 자금을 제공해달라는 요구에 김지태가 응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고 알려지긴 했는데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 경영권을 1962년 5월 25일 김지태가 수갑을 찬 상태로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다 넘겨주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건 5.16재단 쪽으로 넘어갔다가 5.16장학회, 정수장학회로 가게 된다.
그리고 1965년에 가서는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이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된다. 중앙정보부가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그에 따라 결국 나중에 경매 처분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경향신문> 주식의 50퍼센트가 5.16장학회로 넘어갔다. 1970년대 <경향신문> 문패 같은 것이 김지태로부터 넘어간 문화방송과 함께 문화방송-<경향신문>으로 돼 있었던 걸 본 기억이 지금도 난다. 이렇게 <경향신문>은 이제 완전히 일종의 여당지라고 할 수 있는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고는 언론윤리위원회 같은 걸 통해 언론을 통제함과 동시에 한국신문발행인협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쪽을 권력이 장악한다고 할까, 무력화하는 걸 볼 수 있다. 발행인·편집인들을 무력화한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회유라고 이야기한다.
특혜 주고 비판 꺾고…언론사 상층부 회유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회유했나.
서중석 : 강준만 교수 책에 의하면, 1967년 일반 대출 금리가 25퍼센트였을 때 신문에 대해서는 18퍼센트밖에 적용하지 않았다. 7퍼센트포인트나 낮았다. 그에 더해, 일반 용지 수입 관세가 30퍼센트였을 때 신문 용지 수입 관세는 그보다 훨씬 낮은 4.5퍼센트를 적용했다. 이런 식으로 신문사에 특혜를 주면서 언론 소유자 또는 발행인 쪽을 회유하는 걸 볼 수 있다.
제일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게 코리아나호텔이다. 박정희 정권은 조선일보사가 상업 차관 4000만 달러를 아주 좋은 조건으로 도입해 이 호텔을 지을 수 있게 해줬다. 언론인 김해식이 쓴 걸 보면, 1967년경 대일 청구권 자금 중 상업 차관으로 들어온 것인데 이게 언론사로 들어온 상업 차관으로는 첫 번째라고 한다.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이 특혜를 준 것이다. 국내 대출 금리가 연 25∼26퍼센트 정도이던 때 연 7∼8퍼센트에 불과한 상업 차관을 허용한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다는 말이다. 기간산업도 아닌 관광호텔을 짓는 데 엄청난 특혜로 귀중한 외자를 배정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경제기획원의 실무 담당 과장이 끝까지 외자 도입 허가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래서 실무 담당자 서명 없이 외자 도입이 허가된 유일한 사례라고 김해식 글에 나온다고 그런다. 이때는 이런 훌륭한 공무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건 이에 더해 조선일보사는 1968년 사옥도 신축했다. 다른 신문사들도 1960년대에 사옥을 신축하거나 증축했다. (정도(正道)를 가려 한 일부 언론인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지만, 언론의 사명을 도외시하기만 하면 기업으로서 언론사의 몸집을 불리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1960년대에 주요 언론사들은 한국 경제 전체의 성장률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규모를 키웠다. 이와 관련, <한겨레21> 771호(2009년 7월)는 '빌붙어 살아남은 자들의 환호'라는 기사에서 "196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연평균 8∼10퍼센트였지만, 신문 기업만큼은 연 20퍼센트씩 성장했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재벌이 방송에 뛰어든 것에 이어 신문까지 창간하고, 기존의 유력 신문사가 방송에 뛰어드는 모습도 나타났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언론사에 똬리를 틀었다. <편집자>)
이와 같이 테러, 구속, 연행으로 한편으로는 언론인, 기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야당지를 뺏어 여당지로 만들고 한편으로는 회유 정책을 쓰고 또 언론윤리위원회 같은 걸 통해 통제했다. 그렇게 되면서, 자유당 때 네 개의 일간지가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네 신문 중 <동아일보>만 빼놓고 다 정권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경향신문>은 뺏겼고, <조선일보>는 회유당해 특혜를 받았다.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은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되지 않았나. 자연히 <한국일보>도 비판적인 필봉을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또한 1965년 <중앙일보>가 생기긴 하지만, 재벌 신문이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이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재벌 신문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여러 차례 받았다. 예컨대 1986년 보도지침을 폭로한 주역 중 한 사람인 김주언 전 언론재단 이사는 삼성·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2005년 <오마이뉴스> 기고를 통해 "<중앙일보>는 1965년 9월 22일 창간 이후 삼성 그룹의 나팔수 역할을 해왔으며 철저하게 삼성을 비호하는 논조를 펼쳐왔다"고 비판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김 전 이사는 <중앙일보> 창간 이듬해인 1966년에 터진 사카린 밀수 사건 보도를 제시했다. 김 전 이사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폭로되자 <중앙일보>는 삼성 쪽 해명 논리를 연일 지면을 통해 쏟아냈다"고 지적했다. 그에 더해 "삼성 그룹이 거느리고 있던 동양방송까지 모기업 옹호에 나섰다"고 질타했다. <편집자>)
동아일보사 노린 <신동아> 필화 사건, 그럼에도 침묵한 여타 언론사들
프레시안 : 주요 신문들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여긴 박정희 정권의 다음 표적이 어디였을지는 자명해 보인다.
서중석 : 마지막 남은 <동아일보>가 그래서 1968년부터 집중적으로 당하게 된다. 1968년 3월 8일 자 <동아일보>에 <한은, 정부에 긴축 정책 건의 "통화량 대폭 억제토록">이라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경제부 이채주 차장, 박창래 기자 등 여러 기자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이때 취재원으로 지목된 한국은행 관계자는 바비큐 고문이라는 걸 심하게 당하는데, 전에 이야기한 물고문과 비슷한 것이다. 나도 두 번 당했는데, 손발을 묶은 상태에서 작대기를 꽂아 몸을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놓고 물고문과 구타를 하는 것이다. 이걸 당했다고 그런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 말, 예전에 경제 문제를 다룰 때도 이야기했던 <신동아> 필화 사건이 터진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안을 동아일보사를 때려잡을 중요 사건으로 여겼다. 계기는 <신동아> 1968년 12월호에 김진배, 박창래 두 사람이 '차관'이라는 꽤 긴 기사를 쓴 것이다. 차관이 어떤 식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해서 그 일부가 정치 자금으로 변질돼 이후락, 김성곤 등에 의해 정치 자금화하는가 등에 대해 자세하게 썼다. 그동안 들여온 차관 중 최소 5퍼센트는 정치 자금이 된 것 아니냐는 내용이 시사돼 있었다.
이 기사가 나가자 중앙정보부는 기사를 쓴 두 기자뿐만 아니라 <신동아> 홍승면 주간, 손세일 부장도 연행했다. <동아일보> 관련 사업체에는 세무 사찰이 들어갔다. 그렇지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회고록에 "도대체 어디다 시비를 걸 수가 없을 만큼 빈틈없이 꾸며놓고 있었다"고 나올 정도로 잘 쓴 기사였다. 이 글만 가지고는 <동아일보>를 때려잡을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주필 천관우가 '<신동아> 필화'라는 사설을 <동아일보>에 썼다. 권력 쪽에서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보고, 이걸 기회로 삼아 부사장 겸 발행인으로 실력자이던 김상만, 그리고 천관우, 홍승면, 손세일을 싹 연행해 <동아일보>에 압력을 넣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그해 10월호 <신동아>에 실린 글을 문제 삼았다. 미국에 머물던 조순승 교수가 쓴 '북괴와 중소 분열'을 <신동아>에서 번역해 실었는데, 이걸 트집 잡았다. 제목에도 그 당시에 하던 대로 '북괴'라고 했는데도 이 글을 걸고넘어졌다. 김일성을 당연히 공비 두목이라고 해야 하는데 원문대로 빨치산 지도자라고 번역했다는 게 문제가 됐다. 어떻게 김일성을 빨치산 지도자라고 쓰느냐며 반공법으로 몰아세웠다. 그것 앞에서는 꼼짝 못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들을 전부 해고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천관우 주필, 홍승면 <신동아> 주간, 손세일 <신동아> 부장이 다 사표를 내게 된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된다. 1950∼1960년대 한국 언론에서 큰 역할을 했던 천관우가 이제 야인이 돼 재야로 들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언론으로서 힘을 쓰기가 더 힘들게 됐다.
이렇게 중대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지만, 주요 매체들은 이것에 대해 항의하기는커녕 사실조차 단 한 줄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니 1969년 3선 개헌을 맞았을 때 일반 언론들이 1954년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 때 정도로라도 비판적인 역할을 했어야 할 일인데도, 그런 태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3선 개헌에 대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그러니까 그나마 그렇게라도 비판의 뜻을 담아 쓴 곳이 <동아일보>밖에 없었다. 그 사설을 나도 읽었는데, 이게 비판하는 건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린 글이었다. 그만큼 우리 언론이 죽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언론을 무력화한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선데이 서울>(1968년 창간) 같은 선정적인 주간지들이 막 나온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많이 봤는데, 여성의 벗은 몸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1969년에 가면 서울대 문리대 기독학생회 같은 데에서 노골적인 성인물 중심의 일부 주간지를 소각하면서 항의 시위도 벌이고 그랬다. 어쨌건 그런 황색 주간지 같은 걸 통해 인간을 타락시키는 식으로 언론이 기능하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3선 개헌이 일어나는 1969년, 그리고 1970년과 1971년에 언론이라는 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었겠나.
그런 속에서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학생들이 하도 비판을 하니까 언론인들이 큰 충격을 받고 1971년에 자성하면서 언론 자유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결국 그것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언론 쪽은 유신 쿠데타가 날 때 이미 무력화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인도, 문인도 진실을 쓰면 철퇴를 맞던 시대
서중석 : 1971년 10월 위수령 발동 이후 언론의 수난은 한층 심했다. 언론인들이 줄줄이 중앙정보부나 군 기관 등에 연행되고 폭행을 당했다.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 끌려간다는 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는가를 요즘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냥 건물에 끌려가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중앙정보부에 들어가면 여러 군데의 복도에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정말 음산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리도 나는 것 같았고, 밤에 잠을 안 재울 때는 고문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그랬다. 상당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거기서 하룻밤만 있다가 나와도 '다시는 여기 오고 싶지 않다. 아주 정나미가 뚝 떨어지고 정말 무섭다', 이런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구속을 당하지 않아도 그랬다, 이 말이다. 하여튼 그런 데 끌려가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끌려가면 고문당하는 수도 있었고, 폭행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12월 17일에는 정부가 발행하는 프레스카드를 소지해야만 취재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프레스카드제가 실시됐다. 정부가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위수령 발동 이후 1972년 5월 5일까지 6개월 동안 471명이 권력에 의해 언론계에서 강제 추방을 당했고, 48명은 기관원 등에게 연행돼 폭행을 당하거나 심문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소설가, 시인 같은 문인들에 대한 구속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예컨대 1965년 7월 9일 한일협정 반대 문인 성명서가 발표됐는데, 남정현이 쓴 소설 <분지>가 이날 문제가 됐다. 반미 사상을 고취하고 북괴의 대남 전략에 동조했다면서 남정현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참 판사가 괜찮아서 이 양반은 선고 유예를 받았다.
김지하는 여러 번 감옥에 끌려간다. 우선 담시 '오적'으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신랄하게 비난했다가 1970년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사상계>가 이 시를 게재했는데, 정부가 이걸 빌미로 <사상계> 등록을 취소해버리는 사태도 일어났다. 1972년에는 담시 '비어(蜚語)'를 발표하는데, 김지하는 이것으로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비어'는 '오적'과 비슷한 형태라고 보면 된다.
월간 <다리> 1970년 11월호에 임중빈이 쓴 글도 문제가 됐다. <다리> 발행인은 김대중의 오른팔로 불리던 김상현이었다. 임중빈은 그 당시 대선에 사용하기 위해 김대중 회고록을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임중빈은 <다리>에 '사회 참여를 위한 학생 운동'이라는 글을 썼다가, 대선을 두 달 앞둔 1972년 2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때 임중빈뿐만 아니라 <다리> 편집인 윤형두, 김대중 공보 비서이기도 했던 발행인 윤재식도 걸려들었다.
정권의 손아귀에 꽉 잡힌 채 유신 쿠데타 맞이한 언론
프레시안 : 곡필(曲筆)하지 않고 언론인, 문인으로 살기가 참 어려운 시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가지 일이 거듭 발생하면서, 유신 쿠데타가 났을 때 언론은 비판은커녕 겉으로 보면 유신 쿠데타를 마치 적극 지지하는 것처럼 비치는, 권력 쪽이 요구하는 그런 기사를 계속 실을 수밖에 없었다. 문공부에서 지정한 "통일 위한 구국 영단 너도나도 지지하자", "새 시대에 새 헌법 새 역사를 창조하자", "뭉쳐서 헌정 유신 힘 모아 평화 통일" 같은 표어를 6단 크기로 신문 1면과 7면에 계속 실어야 했다. 그러면서 유신 지지와 관련된 여러 기사를 써대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니까 언론이 옛날 이승만 정부 시절 4월혁명 때, 또 장면 정부 때와 같은 기능을 한다는 건 이 시기에는 눈곱만큼도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론이 다시 살아난다고 할까, 자유 수호 투쟁을 새롭게 벌이는 건 1974년 하반기에 가서 있게 된다. 1971년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이 벌어진 지 3년여가 지난 시점에 있게 된다. 그러면서 피투성이의 싸움이라고 할까, 언론인의 수난사, 언론 자유 수호 투쟁사가 전개된다. 동아투위 사건, 조선투위 사건으로 귀결되는데 그러한 언론 자유 수호 운동도 1975년 3월 이후에 완전히 막혀서 결국 1979년까지 제도 언론은 유신 체제의 손발 노릇을 하고 만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스물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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